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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사랑 안에 염려가 없어요 1 / 허운석

LNCK 2014. 5. 8. 10:03

◈사랑 안에 염려가 없어요 1           요일4:17~18                   인터넷설교녹취

 



 

요한일서 4:17~18절을 교독하시겠습니다.

‘비로소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염려)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염려)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위 구절에서 ‘두려움’을, ‘삶의 염려’로 바꾸어도 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확신한 성도에게는.. 삶의 염려가 있을 수 없다는 주제의 설교문입니다.

 

 

◑십자가 센서 Sensor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저의 그 길지 않은 생을

이처럼 인도해 오신 것을 보면 기막히신 것 같아요.

제가 온전히 주님을 얻기 위한.. 그러한 삶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우리 딸이 디즈니랜드에서 제작한 ‘동물의 왕국’ DVD를 아마존에 보내왔어요.

그 동물들이 수 천 Km를, 물을 찾아 이동하는 그러한 모습이었어요.

 

제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아니 도대체 무슨 센서(전자 탐지기)가 있어서, 저 동물들은 수 천 킬로나 되는데 물을 찾아갈까?’

 

너무나 신비스럽잖아요. 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끌고 가는 것도 아니에요.

모세가 이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저희들끼리 그냥 그렇게 가는 거잖아요.

 

저는 항상 이렇게 뭘 보거나 그럴 때, 주님과 같이 보기를 바라요.

그 분초 마다 제가 항상 주님께 말을 해요. 보고하고.

내 마음의 상태를 매사에 주님께 올려요. 그것이 아주 철저하게 훈련이 되어있어요.

아마존에 가서 제가 훈련이 되었거든요.

 

벌레들한테 막 뜯기면서 분, 초마다 주님께 고백을 안 하고서는

도저히 살아 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들 말이지요. 정말 그 하나님, 내 뜻대로 살고 싶지 않으면,

내 뜻을 이루기를 원하지 않으시면

분, 초마다 나에 대한 상황 보고를 반드시 하셔야 돼요.

 

내가 이렇게 나쁜 생각을 하고 있고, 내가 이렇게 흉측한 생각을 하고 있고

하나님, 제게 지금 이런 마음이 들고.. 그런 것을 주님께 아주 상세히 보고해야 되요.

그러면 내 자아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있겠어요?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이, 주님 뜻에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어떻게 알아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생각을 믿습니까? 절대로 믿으시면 안 돼요.

세상에 자기 생각을 믿는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이 없고, 교만한 사람이 없어요.

 

일단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이 생각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 하시느냐고’ 반드시 여쭈어 보아야 해요.

이것이 겸손이요, 죄악을 막는 일입니다.

 

그냥 내 뜻대로 생각하고 내 생각대로 하면,

그것을 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서 판단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으면, 어둠 속을 헤매며 고통당하는 날을 만날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로 내 생각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여쭈어 봐야 되요.

 

‘동물의 왕국’을 이렇게 보고 있는데, 제가 주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예수님, 저 동물들은 무슨 센서가 있어서 저렇게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센서를 가지고, 주님께로 찾아가서, 생명 되신 주님을 만날까요?’

제가 이렇게 여쭤보았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십자가’ 이러시더라고요.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십자가가, 너희를 내게로, 생명의 근원되고 생수의 근원된 나에게로 인도한다’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센서가, 그게 성도의 영적인 본능이에요.

 

우리는 그렇잖아요.

순간적인 내 판단과 말과 행동이, 내 육적 본성인지, 영적인 본성인지 잘 몰라요.

그러나 늘 십자가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겁니다.

 

우리가 욕하고 싶을 때.. 십자가를 기억하면, 내 속에서 뭐라고 하죠? ‘하지 마’

그 십자가가 바로 주님께 나를 데려가는 센서잖아요. 그렇죠.

하여간 놀라워요. 그 십자가의 센서가 나를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다가 보면,

수많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치 수 백 킬로를 이동하는 초원의 짐승 떼처럼,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께 찾아가서,

생명수 강가에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거예요. 얼마나 멋져요!

 

 

◑내 자아를 죽이는 수술을 받아야.. 믿음의 계보에 들어갑니다.

 

지금도 제가 언니하고 이야기해요. 옛날 추억이 생각나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때, 수업 후에 따로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종종 했어요.

 

산수, 구구단을 배웠어요. 그런데 선생님 앞에 가면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항상 방과 후에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하는데, 집에 가려면 십 리를 넘게 걷는 거예요.

 

그러면 언니가 항상 마을 어귀에서 저를 기다리는 거예요.

언니가 기다렸다고 하면, 무슨 소문이 나겠어요?

내가 나머지 공부를 하고 왔다는 것을, 온 마을에 방송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동네 입구에서 언니가 보이면,

막 신경질을 내면서 ‘빨리 가라, 누구 망신을 시키려고 그러느냐’

그럴 정도로 언니가 나를 핍박을 하던 생각을 하면 참 소름 끼친다고..

그런 추억꺼리들을, 요즘도 만나면 서로 얘길 나누면서 웃는데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제게는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식에 대해서는

완전히 잠궈 놓으셔서, 나는 외우지도 못해요. 남들 공부하는 것 흉내도 못해요.

남들은 외우기도 잘하지만, 나는 외우지도 못하고, 되는 게 없어요. 산수도 못하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저를 조금 열어 놓으셨어요.

그러니까 이쪽을 잠궈 놓으신 것은, 다른 쪽을 열어 놓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들 공부 못한다고 협박 하거나 공갈하거나 핍박하지 마세요.

그것도 다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잠궈 놓으시고 열어 놓으시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예수님 처음 믿고 나니까, 저는 정말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한 30년 동안.. 이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주님, 저는 거라사 광인과 같은 (미친) 자입니다.

저는 바로 왕보다 더 강퍅한 인간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주 완고한 자요. 고집스러운 자요.

세상에! 성경에 기록된 나쁜 것은, 다 나로 인하여 기록이 되었군요! (그래서 회개합니다)’

 

내가 성경을 보니까, 안 지은 죄가 없어요. 안 행한 죄가 없어요.

여러분, 그것 발견하셨어요? 이것을 발견하셔야 되요.

성경에 ‘악한 죄, 악한 놈’이라고 써놓은 것이.. 죄다 제게 적용되더라고요.

 

그래야 (죄의 권능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령을 가져야)

십자가에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보혈에

내 심령을 적시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아담은 모든 세상의 죄의 기원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후손인 나한테, 여기 성경에 기록된 죄들이 없을 리가 없죠.

죄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고, 도덕적인 죄를 조금 끊었다고 해서

내가 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내 자아의 죄’가 무섭습니다.

과거에 농촌에서,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 저희 부부가 6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그 시골에 가 보니까, 의인된 것이 뭐냐 하면..

담배 끊고 술 끊고. 그게 이제 의인 된 증거예요.

과거에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것은 죄도 아니잖아요.

하나님을 대항하여 역사하는 우리 의지 will.

그 의지가, 그 자아 ego가, 일반 죄보다 더 무서운 거잖아요.

 

왜냐 하면 죄는 저주를 받지만, 이 자아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음모와 계책이 있는 것이잖아요.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짓밟고 서는 것이잖아요.

 

이게 자존심이고, 우리가 삐지고, 화내고, 신경질내고,

이게 ‘내가 왕 되는 대우를 못 받아서’ 그것들을 하는 것이잖아요.

 

오늘도 삐지셨습니까? 왕 대접을 못 받으셔서?

그 놈(내 자아)이 융숭한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 놈이 대접을 받지 못해서, 내 속에서 화를 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사실 그 놈(내 자아, 의지)을 징계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미워서 징계하시는 줄 알고 오해하는데

내 속의 ‘그 놈’을 때려 부숴서 작살을 내려고, 하나님이 그러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를 때리는 줄 알고, 날마다 원망하고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놈(내 자아, 내 육신)을, 박살을 내서, 쪼개서, 내쫓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러한 어려움도 주시고, 낮아짐도 주시는데,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시는데..

 

다만 그런 어려운 환란들은,

내 속의 사단을 난도질하시는 일로 하신 것이잖아요.

이것을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하고 동역을 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절대 동역을 안 하잖아요.

그냥 삐지고 맨날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래서 우리 신세가 말이 아닌 거예요. 성화도 안 되니까, 늘 그 과정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광야 40년을 뺑뺑이 돈 백성들처럼요.

 

▶우리가 이제 나이가 들면, 존귀가 있어야 되요.

존귀는 무조건 십자가에서 오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을 때,

그 분이 만왕의 왕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조금만 낮아지면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으로 우리를 옷 입혀 주시잖아요.

 

그 암 말기인 사람을 서울에다가 끌어다가, 여기에 세워 놓을게 뭐예요.

배 아파 죽겠다고 해도, 오늘도 배 아파서 간신히. 오는데 죽는 줄 알았어요.

왜 그렇게 했겠어요.

뭔가 저한테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세상에, 조금 낮아지는 것 시늉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 병든 나를 데리고, 멀쩡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잖아요.

 

얼마나 여러분들이 버티고 순종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픈 사람을 데리고 그랬겠어요. 그렇잖아요.

얼마나 주님이 안타까우시겠어요.

 

진짜 주님이 저한테 너무 고마워요.

머리는 나쁘고 성격은 안 좋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걸으려고 하는 제 마음,

그래도 주님 말씀을 들고 가려고 온 마음을 다 해서 몸짓을 하는 제 마음.

그것을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믿음으로 살아야 되요.

믿음과 우리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이 모든 분들은 우리의 자아 부정의 길에 선조들이에요.

그리고 모든 벌거벗음의 선조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히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생을 벌거벗기셨다는 거예요. 일생 동안!

 

그래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을, 자기 삶을 통해서, 이 땅에 그림자(예표)로 보여주셨잖아요.

 

그래서 제 소원은, 아마존에서 그랬어요.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계보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여인들이 나오잖아요.

마태복음1장 족보에 네 명이 나와요.

 

그런데 제 마음에 어떻게 하면,

나도 예수님 같은 생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야무진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항상 그 여인들을 묵상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여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 되어서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시는데 그 몸이 사용 되었을까.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면 오늘 날에도, 나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또한 그 재림을 앞당기는 역사가,

나를 통해서도 나타나실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 믿음의 조상, 족보의 여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인격 속에 열매로, 그 분이 온전히 드러나셔야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갈5:22)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이게 벌써 예수님의 할머니들이, 예수님을 낳는 믿음의 조상이 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 열매를 맺어야, 생명의 계보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비밀을 여러분들이 묵상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시 무시 하다는 것을,

그 무게를 아셔야 되요.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성령의 열매는 십자가 위에서 태동되는데

자기 전 소유를 다 주님께 드린 후에 와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령의 열매가 내 인격 속에 이루어지면 누가 오신 거예요.

주님 자신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주님 자신이 와 계시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 놀라운 것이.

사도들의 모습 속에 계셨던 주님을 우리가 볼 수 있죠. 그 상태까지 간다는 거예요.

 

사도적인 삶. 순교자적인 삶을,

그 사도들이 사셨던 것처럼, 똑같이 나도 이 시대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엄청난 것이잖아요. 믿음의 계보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대단해요. 이것은 진짜 너무나 존귀하고 거룩해서

진짜 우리가 아무나 발설을 해서도 안 될 말씀이에요.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우리 전 생애가 으깨져서 자아가 무너진 후에, 이것이 드러나는 일들이에요.

그 값어치, 그 열매를 가진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겠어요.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주님에게 드리는 그 순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도대체 이 땅에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이 여러분들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어렵습니까? 여러분들이 조금만 이제 훈련이 되어지면

모욕 받고 낮아짐을 받고 모멸을 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몰라요.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폭포수 같이 흘러 담길 수 있는 게

내가 사람들의 모멸을 받을 때, 낮아짐을 받을 때,

그 때야 말로 그 순간이 오는 거예요.

 

미련한 우리는, 오는지를 모르고.. 그래서 찬스를 놓쳐요.

그 때야 말로 샤론의 꽃, 예수, 그 장미가 내 심령 속에서 활짝 피잖아요.

그러니 그 십자가를 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믿음의 성인들은, 고통이 오면 올수록 더 기뻐했어요.

슬퍼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그것이 없이는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믿음의 우리 조상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님,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나에게 고통을 주시옵소서.’

 

그 고통 가운데에서 내가 주님을 보기를 원하고

주님과 함께 하심을 내가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대단하잖아요.

 

▶제가 23살 때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전에 제가 토정비결을 한 번 보고 왔거든요?

그랬더니 내 토정비결에 운수가 ‘허송세월’이었어요.

그런데 그 말을 잊어버려지지 않아요.

 

내가 지금 어느 때는 주님의 은총이, 은혜가 안 느껴질 때 두려워하거든요.

너무 떨죠. 사시나무처럼 떨 때가 많아요.

그 때에 가장 잠들기 쉬운 시간이거든요. 영적으로.

 

그래서 제가 그 생각이 난 거예요. 이게 토정비결에 나왔던 허송세월이 아닌가,

물론 토정비결이 맞고, 믿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냥 ‘허송세월’이란 단어가 제 뇌리에 꽂힌 거죠.

 

지금. 너무 두렵고 떨리고.. 그럴 때는 부리나케 일어나서

청소라도 열심히 하고 몸을 막 움직여서라도

내 안일함에서 나를 깨우고자 하는 그러한 모션을, 하나님 앞에서 애쓰고는 해요.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다 귀찮으니까 그냥 편하기만 하면 돼!’

그것은 개구리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쫙 벌린 것. 그 상태인데

뭘 그게 평안함이라나? 가짜 평안이잖아요.

 

그것은 독 먹은 건데, 그게 좋은 줄 알고,

‘우리는 아무 문제 없어. 자식 문제도 없고, 남편 문제도 없어. 너무 잘 나가.’

그거 너무 무서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이 뒤집혀서, 그 시간이 평안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잖아요.

너무 좋다고.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립니다.

 

오늘은 제가 사실은 원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아주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 하세요.

 

그래서 보면 생명에 대한 말씀, 빛에 대한 말씀, 사랑에 대해서,

원죄에 대해서, 아담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요한1서에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두려움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했어요.

왜 형벌이 따릅니까.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온전히 내 마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잖아요.

 

왜 주님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죠? 십자가의 삶을 안사니까.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고 주님을 밖에다가 내동댕이쳤다는 것이잖아요.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염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왜 없겠어요.

 

저도 항상 있어요. 제게 특별히 걱정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굶어 죽을 걱정’이, 저는 그게 평생에 항상 따라 다녀요.

 

그게 놀라워요, 나는. 그게 너무 놀라운 거예요.

'어떻게 해서 이럴 수 있을까..'

 

아직 까지도 입에 밥이 안 들어갈까, 하는 마음이 제 속에 있어요.

이것이 아담이 범죄한 결과에요.

 

하나님이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돈이 보장이 되는 것이잖아요.

항상 피해망상적인 그것이 제 뇌리에 입력이 되어서,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죽 하시겠어요. 이게 무서운 이야기에요.

왜 우리가 그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밥 못 먹을까봐예요.

 

우리에게 제일 무서운 두려움이 뭐냐 하면, 굶어 죽을 두려움이에요.

까짓 거 굶어 죽을 두려움 없으면, 이판사판이에요.

 

남의 잔소리 들으면서 살 필요도 없어요. 돈만 있으면 되잖아요.

돈만 있으면, 사람들은 죽을 때도 편하게 죽어요.

 

그런데 돈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명의 문제에요.

지옥가고 천국 가는 것만 빼 놓고는, 돈이 이 세상의 강력한 힘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택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돈을 나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진짜 온전한 삶이에요.

그래서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님을 체험한 후에 뭐가 달라졌어요?

주머니가 거듭났잖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헌금하라고 하면 막 떨려요.

진짜 이 비참함은 언제 끝날런지 몰라요.

 

그런데 감사해요. 세상에 주제가 이런데.

그러니 내가 성도님들의 마음을 이해하죠.

얼마나 그들이 진짜 힘겨운지.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번 집회에, 여러분들이 나쁜 것(죄)을 발견해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는 것. 행복해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왜냐하면요,

이것 때문에 내가 겸손해 질 수 있는 것. 그래서 남(죄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웃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만 여러분들이 얻으셔도 큰 수확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돈이 보장이잖아요. 목숨 걸고 돈 움켜쥐어야 해요.

사람을 죽여서라도 그 돈을. 그러니까 무시무시하잖아요.

 

여러분들이 가만히 묵상을 해보시면서, 주님한테 가르쳐달라고 해보세요.

그 돈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런데 여러분들이 시험에 들어, 안 돼. 이러면 안 되요.

그 얼굴을 확실히 보아야 해요. 그 돈의 위력을.

그 두려움을 알고, 결국은 믿음으로, 그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저는 그래요.

지금도 내게 사단이 와서 물질로 시험을 해요.

선교사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런데 때로는 마귀가 나와서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그래요.

'그래 이놈아. 내가 굶어 죽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두려움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마귀에게 놀림을 받나 그랬더니,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게 두려운 마음이 있잖아요. 그런데 왜 두려운가, 들여다보면

그 마귀가 거기 앉아서, 우리를 이렇게 부지깽이 같은 것으로 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예요. 돈으로.

 

그럴 때에 그 돈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더러운 짓거리를 확실하게 보아야 해요.

하나님이 나를 굶어 죽이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머릿속에 있냐는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아주 낙인이 찍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시면서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묵상하시면서

 

‘하나님, 정말 저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이 돈에 대해서 보게 해주세요.

그리고 주님이 나의 보장이심을 확신케 해 주세요.’

 

▶그런데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돈이 자기 보장이에요.

그래서 돈 없으면 안 되요. 여기서 영적 간음이 나오고, 죄가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걱정 되는 것. 이게 남편되신 하나님을 배신한 영적인 간음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이에요.

내가 죽었으니까 염려를 해요, 안 해요.

 

그러니까 이제 간음하다가 걱정은 되지만

믿음 안에서 고백 하면서 ‘주님, 내가 걱정 한다고 뭐가 되겠어요?’

살려고 하니까 걱정이 생기지, 죽으려고 각오하면 무슨 걱정이 생기겠어요?

 

왜 살려고 해요? 주님이 죽이겠다는데 죽어야지 왜 살려고 덤비느냐는 말이에요.

그러면 죽어버리면 그 때 되겠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까지 보세요. 진짜 하나님은 얼마나 섬세하신지 몰라요.

‘진짜 네가 이래도 나를 따라오겠냐?’

 

이게 세상은 허상이잖아요. 염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빌어먹게 해주신다.. 그러면 빌어먹으면 되죠.

은혜만 받아도 빌어먹을 수 있어요.

 

옛날에 길거리에 구걸 다니는 사람들 있었잖아요.

특별히 아이들, 길에서 자고. 얼마나 그 부모가 쌓지 않았으면

마귀가 붙어서 길거리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으면서 그렇게 살겠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내 생명을 거두어주지 않으셨으면, 나도 그 꼴이 아니었겠어요?

여러분들 그런 생각 안 해요?

 

나는 예수님 안 믿었으면, 아마 저기 구걸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었을 거예요.

왜냐 하면 나는 그런 팔자인 사람이거든요.

 

주님이 손대지 않으면, 나도 그 허망함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주님으로 체험을 받지 않으면

나도 생명을 살 수 없는, 지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그 내가 엎드려져야 하는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물질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셔야 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돈이 내 것이에요, 하나님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걱정하십니까?

지난번에 어느 교회에 갔더니, 거기는 십일조를 없애셨다고 해요.

 

왜냐 하면 우리의 물질은 다 주님 것이니까, only 십일조만 하면 되겠냐는 거예요.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자원해서 드리면 좋죠.)

 

그런데 '나는 십일조도 하기 싫더라'는 사람이 있어요.

십일조만 하려면 자기 손이 떨려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