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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는 인생

LNCK 2014. 5. 17. 20:23

◈천천히 걷는 인생           행9:32~43           출처보기

 

 

◑한가하게 다니는 것 같지만.. 놀라운 사역을 이루었던 베드로

 

▶본문에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서, 누구보다도 바빴을 것 같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여유를 부리며 사방으로 두루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방으로 두루 여행을 다닐 만큼 한가했던 것일까요?

시간이 남아 이곳저곳 돌아다닌 여유가 생긴 것일까요?

본문을 언듯 보면 무슨 분명한 목적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교회를 떠나 마치 한가한 사람처럼 사방으로 두루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바쁘게 돌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바빴는지, 7집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면에서 볼 때 베드로는 지금 천천히 인생의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걸음을 통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

또한 욥바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천천히 걸어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실, ‘빠름 빠름 빠름’을 강조하는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방향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문제는

느린 것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주1)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지금 잠시 속도를 늦추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천천히 걸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천히 걷는 인생으로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문제 제기

 

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왜 하루를 여실 때 큐티나 기도를 하시나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문젯거리를 안고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풍성하고 기쁜 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해 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신 오늘 하루,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구하며 기다릴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더 바쁘다고 말합니다. 주중에도 바쁘고 주말에도 바쁩니다.

그 결과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공허합니다.

행복하지가 않아요. 아니 더 큰 문제는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까, 누군가를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그 바쁜 상황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사방으로 다닐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느냐였던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본문 32절 보세요.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자, 베드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사방으로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이 짧은 단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베드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여기서 ‘사방으로’라고 번역된 ‘디아 판톤’은

‘모든 지역들을 관통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의도적으로 다른 지역을 두루 살펴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죠.

 

왜요?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로서, 예루살렘에서도 할 일이 많았을 텐데

그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의 서부 지역을 향해 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단순히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갑자기 룻다였을까요?

룻다는 바벨론의 포로기 이후 사마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갔겠습니까? 그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코스타 강사로도 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개척을 전후해서 코스타를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계속 초청을 받고 있는데

제가 섬기는 교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움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서 매년 초청하는 거예요. 매년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목사님, 중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 한 번 해보세요!”

순간,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제 머릿속에 ‘무조건 안 간다’라는 생각이 꽉 들어차 있어서

기도 한 번 해 본적 없었거든요. 기도하지 않고 결정한 제 모습을 들킨 것 같아서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너는 내가 왜 코스타 강사로 세웠는지 모르느냐?

너는 이름뿐인 코스타 강사구나!”

 

순간 제가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는 어리석음 가운데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로 결정 했습니다.

 

▶여러분, 천천히 걷는다는 것, 그것은

게으르게 사는 것도, 쉬고 싶은 대로 쉬는 것도 아닙니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삶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천천히 걷는 인생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2.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시간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룻다로 내려 간 베드로가 누구를 만납니까?

소외된 사람들을 만납니다. 본문 33절 보세요.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헬라세계에서 흔한 이름인 ‘애니아’라는 이름으로 봐서

베드로는 헬라파 유대인 성도를 만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사방으로 왜 두루 다녔는지

그 또 다른 목적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외된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여행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14년) 2월 7일이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몇 주 전에 믿음을 가진 아내와 함께 등록한 새신자가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페암에 걸려 주께로 나온 분이셨거든요.

수술을 위해 기도해주고 나서, 그분을 아직 방문하지 못한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목사님께 지금 어디 계시냐니까.. 퇴원했다는 거예요.

너무 미안해서 집으로 찾아 뵈야겠다 싶어서, 구정 연휴 기간이었지만

전화를 드렸더니 아직 병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심방을 가겠다 하니까, 바쁜데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병실을 알려 달라고 여쭈니까 아주 자세히 알려주시는 거예요.

본관이 아니라 암 병동이라고 말입니다.

 

병원에 가서 대화도 나누고 기도하고 돌아오는데,

명절날 차 막힘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심방이 꼭 필요한 분을 심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쁜 예루살렘교회의 일정을 일단 멈추고, 멀리 룻다에 내려와서 보니까

팔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있는 성도가 있는 거예요. 그 성도를 보는 순간,

분명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룻다로 오게하신 이유가 있었구나!’

 

순간, 그는 주저 없이 그를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4절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계속됩니다.

사역이 자꾸 열리고 있습니다. 본문 38절 보세요.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제자들이 지금 누구를 청하고 있습니까? 베드로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줄 알고 또 움직입니다. 본문 39-40절 보세요.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베드로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 이라 그러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어떤 최선의 결정을 내려주시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때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지, 우리의 욕심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천천히 걷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휴식도 우리를 위한 어떤 결정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저자들이 말하는 자기를 위한 멈춤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기 위한 멈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멈춤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걷는 인생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3. 믿지 않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바쁜 일상에서 멈추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를 룻다와 욥바라는 팔레스틴의 서부지역으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베드로는 소외된 성도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섬김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35절 보세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어떻게 되었다고요? 주님께서 돌아왔습니다.

믿지 않던 영혼들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룻다에서만 그랬나요? 아니요. 본문 42절 보세요.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이 보이시나요?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룻다를 거쳐, 욥바까지 강력하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의 걸음을 천천히 걸었던

베드로의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룻다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 욥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섬김의 걸음을 통해서 다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알게 됩니다.

천천히 걷는 인생, 그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섬기는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 섬김은 반드시 복음 전도라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맺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74세 였던 1999년 펴낸 ‘노령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퇴 이후 생활의 기쁨은 일주에 골프를 몇 차례 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노후에 몇 번의 골프를 더 치기 위해

더 쉴 수 있는 여가를 만들기 위해, 바쁜 젊음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 누군가를 돌아보거나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니 지미 카터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 천천히 걷는 인생은,

그런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위하여 더 많은 것을 즐기는 시간이 아닌

이웃을 위하여 남은 인생을 철저히 드리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은퇴 이후 지미 카터는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1982년 ‘카터평화센터’를 창립하고 본격적인 ‘평화 전도사’로 일을 시작 합니다.

그 기구를 통해서 그는 북한과 아이티, 수단 등을 돌면서 분쟁을 해결했고

1986년에는 강력한 보건위생활동을 통해

아프리카의 고질적 풍토병이 ‘메디나병’을 근절시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골프채 대신 사랑의 망치를 들고 해비타트 운동을 벌여

수많은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찾아가느라 그는 늘 사방을 두루 다니느라 바빴지만

한없는 평화가 여유가 그 마음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미국 역사상 ‘첫 번째 거듭난 크리스천 대통령’이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90년의 인생에서 끌어 올린 지혜서,

‘지미 카터의 위즈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삶을 선택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제한하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넓히고 해방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

 

주1)

예일대와 동경대, 대만국립대와 서울대, 하버드 대학원을 모두 졸업한 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한국으로 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한국 이름으로 이만열 박사이지요.

 

그가 한국 사회를 경험하고 나서 느낀 사회전반의 문제를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해

내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자라가고 싶다면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얼마나 빨리 성장하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라는 질문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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