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씨줄과 날줄 2 롬14:1-13, 계19:7~8 로마서 75강, 출처보기
※내용이 딱딱하지만,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의 씨줄과 날줄 1 -클릭-
▲예수님은 내용이 빠진 신앙을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어느 시대나 동일합니다.
신약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신앙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은 십계명의 두 돌 판과 같습니다.
두 돌 판은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과 행함과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행함은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둘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이 됩니다.
십계명의 두 돌 판은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걸 신약적인 의미로 본다면
첫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에 관한 계명은.. 교리적인 것으로서, 믿음에 관한 것이고,
둘째 판은, 이웃에 관한 계명은.. 실천적인 것으로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한 계명은.. 교리이고,
이웃에 관한 계명은.. 사랑으로서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리와 삶이라는, 두 구조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둘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의 결론을 말하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러서, 그 신부들에게 흰 옷을 입혀 줍니다.
그런데 그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을.. 왜 “옷”이라고 할까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듭니다.
옷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실을 가지고 천을 만들어야 합니다.
천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씨실과 날실로 만듭니다.
즉 두 실이 가로 세로 십자 모양으로 서로 교차하여 엮어지면서
천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씨실과 날실이 가로 세로로 서로 한 눈금씩 지날 때마다
하나로 엮어지면서, 옷을 만드는 천이 되는 것입니다.
씨실과 날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도가 입을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입고 나갈 의(義)의 옷이고!
아래로는 이웃에게 입고 나갈 사랑의 옷입니다.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십자가 속에는 두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아래로는 이웃과 화목 하는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둘은 씨실과 날실이 서로 교차하여서 천을 만들고, 그 천으로 옷을 만들 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도(道) 역시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옳은 행실을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반드시 교리와 삶이라는 두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리가 뭔가요?
율법의 의(義)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합니다.
즉 인간의 공로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적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교리가, 이 사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걸 믿어지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이 이 믿음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성도에게 오셨어요.
성령은 성도들 안에서, 이 교리가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 교리가 믿어지는 성도는 자기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비록 죄를 짓고 살지만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으로 정죄 받지 않는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대신(對神) 관계로서
하나님 앞에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로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삶입니다.
이건 교리적으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 자들은
이웃과 화목하는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즉 대인(對人) 관계로서 이웃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즉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알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롬13:1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십계명의 두 계명을 완성 하셨습니다.
두 가지 사랑을 이루셨어요.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사랑을 이루셨고,
아래로는 이웃과 화목하는 사랑을 이루었어요.
▲에베소서 2장을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을 이어주는 길이면서도
또한 사람과 사람을 연결 시켜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죄인 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었습니다.
십자가가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의 길이므로 수직적 관계로 서 있고,
아래로는 사람들과의 화목의 길이므로 수평적 관계로 눕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길이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해 주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성도들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삶에서 구현이 되도록, 간섭을 당하게 됩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간섭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는 예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교리로 나아가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는 너와 나는 모두가 용서 받은 자라는
차별이 없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나아갈 때는, 서로가 용서 받은 자로서 사랑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라고 하고,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옳은 행실을 빛의 갑옷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교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봅시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쟁이라고 합니다.
쟁이란, 전문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같은 자들이
바로 예수쟁이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바나바가 예수쟁이들이 있는 안디옥 교회에 갔습니다.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어요.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행11:23
바나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란, 추상 명사입니다.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았습니까?
십자가 정신으로 나타나는 삶을 본 것입니다.
은혜가 성도들 안에서 어떤 일을 하게 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은혜가 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은혜가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교회 성도들 안에서 일을 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일을 하게 되면,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나타납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사랑이 자기 교회를 넘어서까지 유출이 되었어요.
어디까지 그 사랑이 전해졌느냐 하면, 예루살렘 교회로 까지 확대 되어서 전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아가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도 고통을 당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고자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십시일반으로 연보를 하여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금으로 보내서, 기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
예수의 사랑이 형제를 돕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은혜가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야고보서에도 나타나는 바) 믿음이 일으킨 행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시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이고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약 52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고 왕래가 없었어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남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고 하자
너도 나도 한 마음으로 구제를 했습니다.
이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벽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한 형제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실제로 나타났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이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나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면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를 한 것입니다.
즉 예수로 구제를 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예수로 구제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준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물질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준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크기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교리를 삶으로 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제.
이것이 바로 교리와 실천이 씨줄과 날줄처럼 하나가 되어서
옳은 행실이 되어서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성도의 옷’입니다.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3장을 봅시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어떻게 보이셨나요?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빚졌습니다.
그 사랑을 누구에게 갚으라고 합니까?
형제에게 갚으라고 합니다.
입술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속한 증거라고 합니다.
즉 그 속에 진리가 살아서 일을 하니까 이러한 삶이 나오더란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교리만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진리로 사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부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부인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어린 양의 아내에게 입혀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율법의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교리를 받고 보니
너무도 기쁜 겁니다.
그 기쁨이 밖으로 발산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고!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이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율법을 자신의 죽음으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율법으로 인한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자기 백성들을 참소하는 죄의 삯인 사망을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이 요구할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성도 안에서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곡식의 껍데기와 알맹이와 같아요.
율법은 껍데기에요.
하나님은 그 율법이라는 껍데기 속에, 알곡이라는 생명을 담아놓았어요.
이 둘은 떨어질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 되어요.
껍데기는 알맹이를 위해서 있고!
알맹이는 껍데기를 통해서 영글어 가요.
벼를 심으면 먼저 쭉정이부터 생겨요.
이 쭉정이 속에 알곡이 채워져 가요.
만약에 껍데기가 없으면, 알곡은 채워지지 않아요.
그러므로 벼가 쌀이 되기까지는 껍데기인 쭉정이를 지나서
알곡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금방 씨를 뿌리고 나서, 알곡이 없다고 해서, 벼를 뽑아내지 않아요.
때가 되면 그 껍데기 속에 알곡이 채워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어요.
짐승도 새끼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되어요.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요.
율법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은혜로 넘어오게 되어 있어요.
옛 언약을 거쳐서 새 언약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을 버리거나, 폄훼해서는 안 되어요.
옛 것과 새 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해요.
택한 성도는 반드시 율법을 지나 은혜로 나아오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 악한 것이 되지만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무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은혜 안에 들어 와서도 마찬가지로 생명의 과정을 거처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많은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부대낌과 사건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의 풍성함을
점점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진짜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옛 언약인 율법 신앙도 귀히 여겨요.
새 언약 안에 있다고 하여서, 옛 언약을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옛 언약을 통해서, 새 언약의 귀함을 더 알아가게 되어요.
복음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생명으로 받은 성도는
반드시 복음의 내용이 삶으로 점진적으로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을 ‘말씀이 육신화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육신으로 풀어냈어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이 일들을 행하게 하세요.
말씀이 소욕을 일으키세요.
이건 우리가 말씀을 온전하게 다 지켜 낸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경향성이, 우리 안에 또 다른 법인 죄의 법과 충돌을 하게 되어요.
이 충돌 과정에서 우리의 죄가 고발되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고,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롬14장을 보면,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오지요.
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희를 받으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믿음이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구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믿음에 분량을 저울에 달아서 한 것이 아니에요.
구원하는 믿음은 사람마다 동일해요.
너도 나도 주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주셨어요.
차별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비록 믿음이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여서
그를 옳다 그르다 를 정죄하고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린 판단 받을 자들이지 누굴 판단 할 자들이 아니에요.
강함이란 게 뭔가요?
약함을 감싸 안을 때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은 폭력이에요.
진짜 강함은 약함을 위하여 자기 강함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은 강한 분이에요.
그런데 그 강함을 약함을 위하여 포기하셨어요.
이게 은혜이고 사랑인 겁니다...
모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에 빚진 자’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인 우리의 죄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 이외는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롬13:8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 사랑의 빚을, 예루살렘 교회에 갚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 시대 우리를 고발하는 거울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린 안디옥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 없는)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분류 없음 > 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뚝뚝한 설교 (0) | 2014.06.07 |
---|---|
베데스다 연못의 미스터리 (0) | 2014.06.06 |
기적과 자연법칙의 조화 (0) | 2014.06.04 |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지만.. (0) | 2014.05.30 |
더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 정원 (0) | 2014.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