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의 미스터리 요5:1~4 출처보기
◑서론
본문 요5:1~4절엔, 베데스다 연못가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몇 개의 소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에 대한 상징적 뜻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이 보라고 써놓은 성경은
그 무엇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이
아주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어나 지리적 특수성, 인명이나 지명의 뜻 등!
▲히브리어로 된 '베데스다'는
'베이트(집)'+헤세드(은혜)'의 합성어입니다. *헤세드: goodness, kindness, faithfulness
즉,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베이트(집)'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여럿 있는데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베들레헴'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인데
예수님이 '산 떡'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데스다도, 그 이름이 가진 뜻이 참 의미심장한데
연못에 이런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거기다 '양문'곁이랍니다.
'양문'이란 양이 드나드는 문을 말하는데
성경에서 '양'은 곧 예수님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곧 베데스다 라는 장소는, ‘예수님 곁’이란, 상징적 뜻을 가집니다.
'어린양'으로 불리우는 예수님은
이미 구약시대의 제사에 주된 제물로 사용된 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죄가 없는 순결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죄'라는 것은 한번 결과되어지면
그 원인을 없애기 전까지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반드시 져야만 사라지게 되는
원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피할 방편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짐승에게 인간의 죄를 전가하여
그 짐승의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깊고도 놀라운 공의와 사랑입니다.
어찌 짐승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다 죽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 살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짐승도 계속 죽어야만 하지요.
그러나 이제 그 번거로운 행위를
단번에 끝낼 수 있는 분이 오셨습니다.
영혼이 없는 짐승이 아닌
죄가 없는 실체가 오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죄의 빚을 단번에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병자' 셋이 등장하는데
듣기만 해도 심각한 중병에 걸린 사람들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맹인,
하나는 다리 저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중풍병자입니다.
요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행각 다섯에 모인 사람들이 많기에
이 셋은 단순히 숫자만 가지고 얘기하기 보다는
이 세 부류의 병자들이 주된 병자라고 봐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힘으로는 거동이 불가능하거나
목적지를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연못 이름도 하필 '은혜의 집'이고,
위치도 '양문' 옆입니다.
'은혜'란 '선물'이라는 뜻이고
선물은 받는 자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며
주는 쪽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즉, 이 연못이 가진 이름의 뜻을 분석해보면
병이 낫게끔 돼 있는 원리가
'은혜, 선물'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론
자, 그렇다면 이 본문의 얘기가
뭔가 앞뒤가 맞질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은혜요 선물'이라고 앞에서 운을 띄워놓고
흘러가는 내용은
천사가 동하게 하는 연못에
선착순으로 일등하는 병자만 낫게 해준다며
얼마나 빨리 그 연못에 도착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얘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소경, 절름발이, 중풍병자는 모두
자신의 능력으로는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인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낫게 된다고
전제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 연못이 아무리 효험이 있으면 뭐합니까!
거기까지 갈 수가 없는데요...!
이건 마치 미국 의사에게 가면 병이 낫는데
미국까지 갈 차비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용한 의사가 있으면 뭐합니까!
의사에게 갈 수가 없는데요...!
또, 연못으로 들어가야 나을 수 있다면
그건 건강한 사람이나 가능한 일 아닌가요?
그럼 건강한데 연못엔 왜 들어갑니까?
이 아이러니한 얘기를
굳이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애초에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원을 얻을 방법과 힘이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 저자는, 또는 성경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꺼내놓고
정작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한번 추적해봅시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5:5
'38'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난 후
광야생활을 계산하면 38년입니다. 민1;1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 정탐꾼을 보내는데
거의 전부가 못 들어가겠다고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광야생활 중에 태어난 사람들만 들어가게 됩니다.
곧 38년간 병을 앓았다는 것은,
광야에서 38년간 방황한 기간과 같습니다.
이 병자에겐,
베데스다, 즉 ‘은혜의 집’에서
양문 곁에서, 즉 ‘구원의 주님’ 곁에 있었지만,
아직 은혜와 구원을 맛보지는 못한 것입니다.
38년간 방황만 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광야의 히브리 백성들처럼, 가나안 목전에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겁니다!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럼 대답이 보통 어떻게 나와야 맞습니까?
"네, 낫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죠.
그런데 이 중풍병자의 대답이 특이합니다.
아니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죠.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고 싶은건 당연한데 그딴 건 왜 묻습니까?
문제는 병이 나으려면 지금 저 연못까지 달려가
1등을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돼서 이러고 있구만.
누가 날 저 연못에 넣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하소연만 늘어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님은, 은혜로 그를 구해 주시기 원하시지만..
그 힌트를 서두에서 ‘베데스다’, ‘양문 곁’이란 말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는 38년 동안이나,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광야의 방황과 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연못에 먼저 뛰어들려고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우리를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실체가 자기 눈 앞에 와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능력으로 해결해 보는데, 안 되더라는
푸념만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38년 된 중풍병자의 병을 단번에 고쳐주십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공짜로 선물을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구원이란 것은 이렇게 일어납니다.
생각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결과가 나에게 쥐어져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지난 38년간이나 안 되는 것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구원을 믿고, 힘든 발을 (벌벌 떨면서라도) 내 밀어 보십시오.
이 38년된 병자가,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벌벌 떨면서, 힘겹게 어렵사리 걸어가는데.
그 과정에서 점점 팔 다리에 힘을 얻는 것입니다!
▲절대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포자기 해서도 안 됩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또 주님의 도우심이.. 단 1초만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지만,
주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믿고,
현실의 상황을 결코 비관하지 않고,
믿음의 발걸음을, 벌벌 떨리는 그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넘실대는 요단강을 건널 때처럼 말입니다.
◑미문 앞 앉은뱅이의 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어, 그저 성전 美門에 앉아
구걸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사람이
성전으로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여전히 구걸하다가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쳐다보다가,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3:6~8)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다.
돈을 좀 얻을까 하였던 앉은뱅이에게
그가 상상치 못한 최고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건 ‘은과 금’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요,
그 주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은혜, 구원’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아주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선물은 그저 따라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11:9~10)
이 내용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결론은 바로 다음 구절에 연결되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11~13)
하나님이 누구신가요?
그분은 자녀인 신자에게 최고로 좋은 것만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이십니다.
그때 은혜/구원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38년된 병자처럼, 자기 힘으로 뭘 해보려고 하고
-미문 앞 앉은뱅이처럼, 은과 금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을 간절히 찾으라는
이 얘길 하려고
앞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내용을 쓴 것인데
인간들은, 결론은 내팽개치고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혈안이 돼있습니다.
자녀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구절은 참으로 소름이 끼칩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갭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고급한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가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자!'
이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입니다.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자는 것이지요.
천국은 그 개념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어떤 '상태'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환경을 만들려고 애씁니다.
죄인들끼리 모여서 무슨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오직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뜻을 수준에 따라 조금씩 실천하며
자녀답게 성장해 가는 자에게만
보여지고 누려지는 곳입니다.
▲비신자들이 종종 신자보다 나은
도덕관념과 실력을 자랑하지만
신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베데스다 연못까지
도저히 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무언가를 이룰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지혜의 근본이 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작은 일 하나라도,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을 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은과 금을 구하기 이전에
나사렛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베데스다, 즉 은혜의 집에 거하면서도,
양문 곁, 즉 예수님 집에 거하면서도
내 곁에 계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38년이나 자기 힘으로 바둥거리지 마십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절한 심령으로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을
간절히 구하십시다.
그리고 만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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