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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십자가와 자기 자랑

LNCK 2014. 6. 18. 12:32

 

◈십자가와 자기자랑   갈6:14, 골1:13~14      인터넷설교 스크랩, 녹취

 

나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서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십자가와 어느 정도 거리에 있었는가는

바로 그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모여든 것이죠.

 

그 많은 무리들은, 실상 예수님이 어떻게 되시던지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구경꾼이었기 때문이죠.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그 역사적 사건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전혀 관심이 없는 구경꾼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소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 사도 요한 등, 다섯 명의 소수의 제자들이

예수님 그 못 박히신 바로 그 가까이 십자가 앞으로 왔습니다.

 

물론 더 가까이 있었던 강도들도 있었고 로마 군병들도 있었지만

그들과는 다른 마음과 느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대한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다. 그 분이 얼마나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그분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시고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분의 죽음 가까이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십자가 곁에 있는 나는.. 군중으로서 입니까, 제자로서 입니까?

 

 

◑본론/ 십자가는 나의 자랑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한

그리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 성도들이 경험하는 또 하나의 고백은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14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내게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는 세상이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라.’

 

▲이 구절에서 특별히 중요한 단어는 “자랑”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이 ‘자랑’이라는 단어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자랑이라는 단어는 59번 사용되었는데

55번이나 사도바울의 서신서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33번이나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면서 아주 애용하였던,

자주 등장하였던 단어가 ‘자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자랑’이란 말에는, 3가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①첫째가 말 그대로 ‘자랑’입니다.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자랑이죠.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부모는 절대 침묵 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거나, 큰 상을 받았을 때 반드시 말하게 되어있습니다.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인생 가운데에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너무 뿌듯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삶 속에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 쓰는 단어가 ‘자랑’이죠.

 

②둘째로 자기 내면속에 생각만 해도 기쁘고 즐거운 것, 자긍심이 느껴지는 것.

살맛이 느껴지게 하는 것. 삶의 보람과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하는 것.

그것도 ‘자랑’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③세 번째는, 내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고 맡길 수 있는 그 무엇.

이 또한 자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할 때, 위 세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됩니다.

 

내가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기는가는 곧 그것이 나의 신앙이요, 나의 인격이요,

나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나의 인생 속에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자랑의 강도 만큼이나, 어쩌면 그것이 나의 신앙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어쩌면 내 안에 숨겨진 우상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입니까, 아니면 유명한 학교의 학위입니까,

아니면 사회적 위치,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외모, 많은 지식입니까.

많은 재물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명세입니까. 무엇이 자랑스러우십니까?

 

만일 그 자랑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어쩌면 그것은 신적인 대상, 곧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내 안에 내가 진정 자랑으로 여기고 사는 것,

사도 바울의 인생에서 진정 자랑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갈6:14

 

그것이 그의 인생의 중심이고 삶의 보람이었고,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의 삶의 중심이 되고,

그의 인격을 형성하고 그의 간증이 되었던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이었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지식을 가진, 바리새인 중에 특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유대 사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자원할 정도로, 그는 헌신적이고 열심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유대 사회에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였습니다.

오늘 날 말하면 화려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겠죠.

 

단지 한 가지 바울에게 조금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그의 외모는 별로 잘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바울은 그다지 외모가 화려한 사람은 아니었다.. 라고 알려져 있어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는 것 중에, 외모까지 빌립보서에 나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을까요.

말도 그렇게 수려한 언어 구사력이 안 되었다.. 라고

그가 가진 지식에 비해서는 표현력이 좋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있죠.

 

어쨌든 그는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이제는 내게 모든 유익한 것들을 내가 배설물처럼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긴다.’

 

여기서 ‘고상하게 여긴다’는 말도 “자랑한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와 같은 맥락입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 비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

 

역사 속에 있었던 십자가가

단지 억울한 죄수의 죽음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 속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사건이며,

 

또한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기 때문에

그는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 가장 고상하게 여긴다”고 고백했던 것이죠.

 

 

◑‘세상’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도 못 박은 사건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와 이 세상을 다른 관계로 만들어 놓았다.. 라는 거예요.

세상은, 나와 다른 관계로.. 십자가가 그렇게 변화 시켰어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을 행하셨다는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나를 분리시켰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보이는 물질세계를 모조리 다 포함해서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하나님 나라 밖에서의 삶,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생, 모든 영적 세력들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한1서 2:15~17절에,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탐욕안목의 정욕세상살이의 자랑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사라지고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 세상은 3가지로 구성된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탐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살이의 자랑.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세상은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다 이 세상에 속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 속한 인생을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기 때문에요.

이 세상도 지나가고 이 세상의 정욕도 지나간다고 말씀 하고 있어요. ↑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사라지는 거예요.

심판이 임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있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왜 ‘멸망치 않고’ 라는 말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본래 멸망 가운데에 처해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 그냥 있으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결과는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을 안 믿으면, 괘씸죄로 형벌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멸망’ 가운데에 처해있습니다.

 

로마서에 표현대로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겁니다.

그 진노와 심판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구출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사전 심판’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임할 모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신 다 쏟으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과 연합되는 자는

이 세상의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받았기 때문에.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받는 거예요.

그런데 아프지 않게 받는 거예요. 얼마나 멋진 구출 방법입니까.

 

 

◑믿음으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다’고 하면.. 신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얼마나 아플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있겠지만)

믿음으로 ‘내가 못 박히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못에 박히는 그런 아픔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못에 박히셨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모든 고난을 다 담당하시고,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내가 못 박히면, 얼마나 아플까?’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내 자존심 때문에 힘든 거예요.

내 불안 때문에, 불신 때문에 힘든 것이지

자기의 불안과/ 염려와/ 불신을 극복하는 것이 힘든 것이지

 

사실 십자가를 순수하게 믿으면.. 우리에게는 고통이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내 세상 고통을 가져가 버립니다.

 

우리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가 뭔가 고통을 받으면서,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의 공로도, 노력도, 희생도

예수님의 희생(십자가)에, 보탬이 되지 않는 거예요.

 

완전히 다 이루신 거예요.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어요? 에베소서 2:9절에 말씀 하셨죠.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런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내가 구원 받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도, 어떤 지식인도, 능력자도,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거예요.

 

★관련글/ 다 이루었다. rfcdrfcd.tistory.com/15975018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구원 받는 것을 보험 드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보험에 들어놓은 만큼, 내가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안전하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 천주교 보험을 다 들어놓는 분이 있어요.

보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믿는 구원은 보험이 아닙니다. 확신이고,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이루신 것을 믿는 것.

 

하나님의 선물인 까닭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인간에게 속한 어떤 것(내 고난)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거예요. 멸망치 않게 되는 거예요.

 

............................ 길어서 쉬어가는 지점 ...........................

 

◑그리스도 안으로 이사갑니다.

 

골로새 1:13~14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셔서

그분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함께 연합될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우리는 그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거예요.

 

십자가의 구원은, ‘나라(내 소속)를 옮기는 사건’이에요.

‘옛 사람 아담 안에’ 있던 우리의 몸이 → ‘그리스도의 몸으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단지 무슨 교회에 등록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인류가 모두 60억인데,

단 두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 안에 속한 사람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 아담은 없어요.)

 

모든 자연인은 다 ‘첫째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에요. 멸망당할 운명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가운데 예수님은, 멸망 받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이 세상 안에 심으신 거예요. ↙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함께,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신비스럽게도 두 번째 아담의 인생에 속한 사람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동일한 집에 살고, 동일한 혈통의 동일한 나라에 살지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겨지게 되는 거예요.

 

눈으로 볼 때는 모릅니다. 똑같은 얼굴이고 같은 삶이기 때문에.

그러나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마지막 심판때,

첫 번째 아담에 속한 사람은.. 멸망이요,

두 번째 아담에 속한 사람은.. 영생인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분리 되어, 우리는,

그의 아들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골1:13~14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땅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인생을 살 수 있게 우리가 변화되었다는 것.

바로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못 박힐 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영향력, 세상의 가치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 없는,

그러한 이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영향 받지 않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른 나라로 이사했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나라를 옮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로 옮기려면, 그 몸으로 들어가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야 되요. 그것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기만 하면,

그 십자가는 그 나라로 들어가는 비자가 되는 거예요.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티켓이 되는 거예요.

 

(내 믿음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다.

그런데 삶의 증거가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믿는 사람에겐요.)

 

바로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나에 대해서 못 박힘으로써, 이제 나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인생,

두 번째 아담에 속한 인생, 하늘에 속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우리 안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입니다.

 

 

◑나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 갈6:14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을 때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도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을 왜 이기십니까?

세상이 대적했다는 것이죠.

세상이 대적하지 않으면, 왜 ‘이겼다’ 라는 단어가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은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C. 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에 보면

‘하나님의 침공’이라는 챕터에서 그랬어요.

 

거기서 “예수님은 반란 지역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서 오신 사령관이다.”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그 세력들을

다시 정복하시고, 예수님은 승리하신 거예요.

 

▲사탄은, 죽음의 권세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죠.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었죠.

 

이 죽음 앞에 종노릇하는 인생들을, 죽음이라는 무기를 통해서

괴롭게 하고, 무릎을 꿇게 했죠.

 

예수님조차도, 죽음 앞에 잠시 무릎 꿇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사탄의 모든 권세는 무너지고, 예수님의 승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골로새서 2:14~15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스려 대적하는 조문들이 담긴 채무증서를 제거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로.. (영적인) 권력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공개적인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두 가지를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①첫째, 우리가 사탄의 종 되었던 채무증서.

우리가 죄를 범하므로 사탄에게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서를 없애 버리셨다는 거예요.

 

②둘째, 사탄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무장해제 시켰다는 거예요.

이제는 사탄이 쓸 수 있는 무기가 없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에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또 한 번 부활할 수 있게 됨으로

더 이상 종노릇 하게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없다는 거예요.

 

사탄의 무기가 뭐예요? 죽음이잖아요.

여러분, 이제 사탄은 죽음을 무기로 하는, 이 세상의 권세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는, 병들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죽기까지밖에 더 하겠어요?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종노릇하는 사탄의 무기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확실히 누리는 관문인 것이에요.

오히려 승리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사망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

사망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가정이 봄 날 드라이브를 나갔는데 차 안에 큰 벌이 들어온 거예요.

아이들이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 때 운전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손을 내밀어서 벌을 잡았어요.

 

잠시 동안 벌을 잡고 있다가, 다시 손을 놓았을 때,

벌이 다시 날아다니니까, 아이들이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 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아버지 손을 봐라.’

아버지 손은 벌이 침을 쏘아서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어요.

 

‘벌은 아버지 손을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쏠 수 있는 침이 없다.

아무리 소리를 내며 돌아다녀도 너희를 쏠 침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단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를 쏠 수 있는 죽음의 독침을 다 써버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세상의 죽음의 사탄의 권세를, 다 흡수해버린 죽음이에요.

더 이상 사탄은 죽음으로써,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없게 된 거예요.

 

사탄의 권세로부터, 세상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죠.

그래서 죽음이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렵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이 사탄의 독침을 다 빼버렸기 때문에요.

 

 

◑정리하면,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지혜자가, 어떤 정치 권력자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까.

모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었죠. 기껏해야 하는게 뭡니까.

시체 보관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권력자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자기 시체를 조금 오래 보관해 달라.’ 얼마나 미련합니까.

 

흙으로 돌아가야 될 것을 오랫동안 보관하고, 미라를 만들고 궁전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사탄과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식 때, 찬송을 부르는 거예요.

 

슬픔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이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의 승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에게

동일한 승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①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인생이 되었어요.

멸망 받을 세상에 속한 인생이 아니라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어요.

 

②그리고 이 세상에 패배자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기에, 십자가를 사랑하며 자랑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적용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 속에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이 나의 주님인 것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어떤 모임이나 상황에서, 여러분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제일 먼저 무엇으로 소개합니까?

 

만일 여러분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그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요즘 너무 교회에 문제가 많아서 말하기가 부끄러워요.’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고, 우리 개개인의 신앙의 고백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자랑해야죠.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도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어떤 상황에 있든지

나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담대하게,

부끄럽지 않게 고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이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함께 그 고난에 참여하는 거예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만을 자랑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할 때

 

그 자랑으로 인하여

어떤 핍박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 고난까지도 함께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그런 인생을 살았죠. 그가 많은 고난 속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서 12절 말씀.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위해 나를 선포자와 사도와 선생으로 세우셨다.

이로 인해 내가 다시 이러한 고난을 당하지만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믿고 있는 분을 알기 때문이며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자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했을 때,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자랑한다’ 라는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가장 애용했던 두 가지 단어가 이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랑한다. 사실 같은 말이에요.

 

자랑한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에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자랑한다는 말이에요. 기뻐한다는 거예요. 즐거워한다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 24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은 고난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웁니다.’

 

이 고난을 기뻐한다. 이것도 자랑한다는 거예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소극적인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역사의 열쇠요,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하고 역사를 구원하고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에.

유일한 역사의 희망이요, 세상의 희망이기 때문에요!

 

▲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함께 못 박혀 죽을 때

우리는 이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라는 렌즈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은 멸망 받을 세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만 구원 받은 것을 자랑합니까. 그것은 또 하나의 교만입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자랑함으로써, 복음을 자랑함으로 나를 통해

 

내가 받은 영생의 구원의 기쁨을, 누군가가 또 다른 사람이

그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것을 위해서 노력할 때 받는 고난, 희생,

그런 헌신을 기쁘게, 즐겁게, 부끄럽지 않게 감당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인생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랑의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나 자신에 속한 것.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 교만에 속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고

이제는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인생으로 우리가 변화된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과 한 10분만 대화해 보면 ‘그가 무엇을 자랑하는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 타고나야 느껴지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 다 알잖아요.

 

-이 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자랑하고 있구나,

-아니면 자기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를 자랑하는구나, 외모를 자랑하는구나,

지식을 자랑하는구나, 사회적 경험을 자랑하는구나, 다 느끼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느끼듯이, 나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십자가 위에서 날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하며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 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옛 사람으로 살아서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 무덤 속에 장사되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