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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2 / 허운석

LNCK 2014. 6. 24. 13:56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2           벧전2:21, 사50:4~11                설교스크랩, 녹취

 

 

 

 

 

이제 어떠한 고난이나 문제가, 올 때에 무엇이 드러나요?

그렇지 못한 신자들은, 문제 앞에서, 자기 죄성이 드러나지만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은, 자기 죄성보다, 예수님이 더 많이 드러나지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어떤 불평/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은사와 은혜 속에서, 이런 것은 조심하셔야 되요.

주님의 생명은 내가 알게 오는 법이 거의 없으세요. 어느 샌가 모르게 오세요.

 

마귀는 항상 즉각적이고 굉장히 확실하게 해요.

그런데 주님은 너무나 긴가민가하게 하세요.

 

그래서 어느 날에 우리 몸에 성숙한 변화가 오듯,

청년이면 청년의 변화가, 우리 몸에 자기도 모르게 오듯이,

그런 예수님 닮은 성품의 변화가, 나도 모르게 와져있는 것을 보게 되요.

 

‘옛날에는 나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분명 화가 나고 할 텐데. 이상하다. 왜 짜증이 안 나지?’

그럴 때 알게 되는 것이죠.

 

‘아, 주님이시구나.’

세상에 이 행복, 그렇게 변화되어져 있는 그 생명의 모습.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존에서

늘 예수님의 나사렛에서 사신 그 생애를, 항상 묵상하기를 좋아했어요.

 

제가 그 주님의 나사렛의 삶을 깊이 묵상하지 않았다면, 아마존에서 살 수 없었죠.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서, 다 기적적으로 하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얼마나 이 땅에서 가난하게 오셨는지요.. 가난하게 사셨는지요..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는 너무나 가난한 자리로 오셔서

그 누구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아무도 예수님이 될 수 없었다.)

 

얼마나 가난하셨던지.. 주님보다 가난했던 이가 이 땅에 없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시고.. 그 가난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을 이루신 분이잖아요.

 

똑같은 우리의 몸을 가지시고, 굶주리시고, 고통 받으시면서

그 분은 십자가의 어리석은 미련함으로, 산상수훈의 그 말씀,

그게 ‘십자가의 어리석은’, ‘미련한’ 말씀이잖아요.

 

이것이 생명의 길이에요. 좁은 길이고. 부활로 가는 길이에요.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조금 바보 되면 될 것을..

우리는 늘 내 잘난 척 하다가, 한대 얻어맞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변명하고, 아는 척 하려고 하면, 주님이 그냥 때리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목수가 되셔서,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잃으시고

그 홀어머니에다가 동생들도 많고,

그들을 먹여 살리려고, 얼마나 고생하고, 모멸을 받으셨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절망하셨다’는 말이 성경에 써 있나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였도다.’ 이런 말이 써 있나요?

 

여러분,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세요.

‘금 나와라 뚝딱!’ 하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단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왜요?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복종으로 올리시는 그 희생의 아름다움.

이보다 더 큰 충성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하나도 쓰지 않으시고,

온전히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잖아요.

 

그 소년 가장, 어린 손으로 대패질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얼굴도 못 생기시고.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그랬어요.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다고.

 

주님은 이 세상에서 못난 것은 다 가지고 계신 거예요.

그래야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아무렴 우리 형편이, 예수님보다는 조금 더 낫지 않겠어요? 

 

나는 주님이 잘생겼다고 하면, 기분 나빠서 핑계 댈 거예요.

주님은 얼굴이 잘 났으니까 그 일을 하셨죠. 그런데 제 얼굴로는 힘듭니다.

 

이해하시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찌질이는 다 가지고 태어나신 거예요.

 

여러분들 이거 비밀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충족과 기쁨이

그 가난 속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얼마나 그 분이 모멸을 받고, 낮아짐을 받고, 멸시를 받았는지

우리들은 상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고 하잖아요. 사53:3

 

그 모습이 얼마나 상했는지. 상상을 해보세요.

그 가운데에서 주님은

모든 환경에 침몰당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뜻에 순종하시고, 마귀에게서 승리했다는 거예요.

 

마귀가 주는 그 어마어마한 시험과 고통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그가 승리하신 것을 알아요.

 

▶우리가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어요.

주님이 우리보다 나은 형편으로 생활했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할 말은 있는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우리가 뭐 할 말이 있겠어요?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변명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죠.

 

내가 받는 핍박과 이 어려움이

뭘 그걸, 예수님 앞에서, 어려움이라고 내놓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이 받은 그 멸시와 핍박,

우리는 지나가는 멸시를 받는 사람을 봐도 마음이 아픈데, 그렇죠?

 

대패질해서 겨우 벌어먹고 사시겠다고 하시던 그 분.

어머니 봉양하시고 동생들 데리고 사시던 그 분.

그랬을 때 그렇게 모욕을 하고, 돈이나 제대로 줬겠어요? 과부의 자식한테.

 

거기에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말씀이,

단 한 구절이라도 기록이 되어있느냐는 말이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그 삶 속에서 그 충성스러우신 주님의 마음.

하나님만이 당신의 양식이고 사랑이기에

그 모진 고통을 기쁨 가운데 이겨내신 그 분.

시험 안 드셨겠어요? 아직 젊은 청년 때인데.

 

그런데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30년 동안 가만히 계셨잖아요.

우리 같으면 인기몰이를 하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했어요? 단 한 번도 당신의 얼굴을 세워달라고 하신 적도 없어요.

우리가 그 분의 삶을 보세요.

그 십자가의 삶. 자신을 처절하리만큼 부인하시고

그저 그 멍에를 메시고, 하나님께 충성하셨던 그 분을 묵상해 보시라고요.

 

▶그래서 주님은 모든 일에 자기를 세우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약함으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최대의 모욕과 모멸 앞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본적인 권리도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워요.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우리의 기본적인,

마땅히 받아야 될 대우도, 우리는 포기해야 하는 거예요.

 

그게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모습이에요.

무슨 기본적인 대접을 받으려고요?

 

그것까지 포기해야,

내가 주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게 비밀이죠. 할렐루야.

 

▶여러분들이 회사에서, 기본적인 대우를 안 해 준다고 여러분들이 섭섭하면

여러분들은 왕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잖아요.

주님을 재끼는 것이잖아요.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도 아주 당당하게 살려하지만, 

성도는 다시 살기 위하여, 끝없이 무릎을 꿇는 그 복종을,

주님을 얻기 위해서, 나는 이 기본적인 대우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이 당당함, 이 관대함, 이것이 얼마나 얼굴에 광채를 먹이겠어요.

이 의로움 속에, 어느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보세요. 우리는 이런 십자가의 심지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이 부족해서 돌아가셨겠어요?

약해서? 아니죠. 당신의 권리를 쓰지 않으신 것뿐이죠.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권한을 버리신 모습. 그 모습으로 주님이 돌아가신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 분명 당신을 부활시킬 것을 믿음으로,

우리도 주께서 분명히 나로 하여금

주변의 상품과 참여할 나를 만들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에서

우리는 얼마나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는가. 이것이에요.

 

이럴 때에 우리는 ‘형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예요.

 

 

◑이사야서 50장 한 번 읽어봅시다.

 

십자가의 그 어리석은 모습, 약한 모습이 과연 무엇인지,

이사야서 50:4~11절까지 읽어 봅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학자의 귀와, 학자 같은 혀’를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해하시고 계시는 이 십자가의 메시지.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런 긍정의 메시지가 아니라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고 장사되었다.. 라는

그 신령한 말씀은,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께서 학자(배우는 자. 학습자)같이 이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미련한 길이요, 어리석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고 그 누구도 싫어하는 길입니다.

 

사50: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그러나 하나님께 선택되고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만이

이 말씀을,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말씀을,

생명처럼 알아듣는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부활의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얻는다는 거예요.

 

사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여기에 보니까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긴다.

얼마나 약하고 미련한 모습이에요.  고후13:4

 

그러나 이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주님과 연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절대로.

 

그래서 우리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느냐,

내 속에서 주님, 예 그렇습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분하다고 해도

‘하나님, 맞습니다. 이 사람이 말 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 속에서는 ‘예, 주님, 맞습니다.’ 그럴 때 통과가 되는 거예요.

 

죽음의 사자가 나를 통과를 해버립니다.

자기 죽음을 합당하다고, 받아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야 이놈아, 네가 뭔데 내 인생에 말이 많은 거야?’

이러면 이제 끝장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길이 아니에요.

마귀가 한 것이잖아요. 자기를 내세우는 방법이잖아요.

 

우리는 주의 십자가로 가야, 죽음으로 가야, 연약함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부활을 위하여서, 예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어떠한 일을 당할 때 

최고로 마지막 테스트는 뭐냐 하면 오해받는 것입니다. 50:6↑

 

아주 내가 행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합동 하여서 몰아세우는 그런 축복(?)이 와요. 반드시.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모든 사람들이 합동 했잖아요.

예수님 죽이는데, 그 날 모두가 친구가 되어버렸잖아요. 그런 날이 와요.

 

그럴 때 기뻐하세요. 그 때에 하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진짜 그게 이무기가 용이 되는. 놀라운, 승천을 할 수 있는.

이 어리석은 미련한 방법이 글쎄 그게 기도하는 방법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그것을 알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 때에 사람들이 오해하고 ‘나를 미치광이다, 나를 강도다.’

모든 사람이 구설수에 올릴 때

‘아이고, 내가 이제 승천할 때가 왔구나. 이렇게 부활할 날이 가까이 왔구나.’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캄캄한 가운데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나와야 해요.

 

예수님이 하신 기도는, 우리가 일생 동안 해야 할 기도에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기도도,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도.. 다 내가 할 기도의 말인데

주님이 앞서 다 해놓았어요.

 

왜냐하면 내 일생 가운데에서

그 아픈 순간 순간이, 내게도 똑같이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이 버림받으시고, 고난 당하셨던 그 고통들을

내가 다 맛보면서 지나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부활의 그 영광스러운 찬란한 빛을 우리가 알 수 없어요.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6

내 체면을 아주 죽사발을 만들어 놓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그랬어요?

 

우리 자식들이 그랬잖아요. 아내하고 남편이 그렇죠.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그러면서.

 

자식들은 어떻게 해요? 부모를 부모로 인정도 안하잖아요.

돌보지도 않고. 함부로 대하고. 인격적으로 아주 모독을 하잖아요, 자식들이.

 

그럴 때 어쩌란 말이에요?

‘주여 내가 무엇을 심었길래, 이것이 30배 60배 성장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하나님, 그럴지라도 사랑으로 받게 하셔서

하나님, 저 아이도 구원받고 나도 이 사슬에서 풀어주시옵소서.'

 

그 기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녀를 오히려 대적하게 되잖아요.

그럼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며 맞대응하면.. 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집안은 콩가루가 되고 다 망해버리는 거예요.

악으로 대항하잖아요? 그러면 집안은 콩가루가 되요.

 

한 사람이라도 희생하고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의 길로 가야

마침내 구원이 그 가정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희생 없이는 아무도 주님 앞에 돌아올 길이 없어요.

그것을 부모가 만들어 줘야 하는 거예요.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50:6b

자녀로부터, 배우자로부터

모욕과 침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받는 이 모욕과 이 슬픔과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하여서 나는 주께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 비밀을 저에게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와요. '자기 의'가 죽는 자리에서요.

 

이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입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경험할 수 없어요. 맛볼 수 없어요.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입혀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아요.

 

이것을 체험하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의롭게 된 것을 몰라요. 확신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 보니까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심으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 단계까지 간 것이에요.

 

그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아요. 평안이 있어요.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을 아노라. 50:7b

그 사람은 나에게 수치를 주지만 나는 아직도 훤한 달덩이 같은 얼굴로

그들을 사모하고 섬기게 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사망의 줄에서 끊어서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이죠.

 

▶50: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찌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찌어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이 의가 입혀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십자가의 삶에 나를 드리지 않으면

절대로 주님의 의를 덧입을 수 없어요. 의가 안 와요. 아시겠습니까?

 

▶50: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그래서 끝 절. 이게 뭐냐 하면

은혜 가운데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기도 많이 하면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않고, 복음으로 가지 않고,

기도 안에서 날고 기고 설치고 율법 가운데에서 집안에서 폭군노릇이나 하고

용서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할 줄 모르는,

 

그래서 자기 횃불이나 맨날 밝혀서 이상한 짓 하고..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우리가 스스로 하는 이것이에요. 나는 너에게 준 것은 네 십자가의 길인데,

‘그 의’인데 그렇지 않는다는 거예요.

 

선생 짓 하고, 왕 노릇 하면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주님의 십자가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마치는 말.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처음과 나중, 끝까지 오로지 나는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 흘리신 보혈과 그 보혈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고

정말로 주께서 죽으신 그 죽음이,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의 사망인 것을 깨닫고

그 믿는 믿음 가운데에서 그 삶을 살아낼 때

 

주의 의와 그 크신 능력이 내 영혼 속에,

생명 속에 드리워져서

주님처럼 생명의 도구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제 생명을 베풀 수 있는 한 존재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아멘. 이해 하셨어요?

 

보세요. 마귀가 얼마나 우리를 속였는가. 기가 막히게 속였잖아요.

‘축복 받는 것이 하나님 승리하는 것이다. 그게 복 받는 것이다.’

어디 성경에 그런 말들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을 모셔오면 건강, 그런 것 아무것도 아니에요. 건강 안 오면 어때요.

나처럼 잘만 사는 구만. 얼굴이 찌그러졌나요?.

걷기가 조금 불편하고 살기가 조금 불편한 거지요.

병드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더 커지는 것이잖아요. 얼마나 놀라워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있어요. 보세요. 이게 산 증인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 지금 기뻐하세요.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

그렇게 마귀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우리들이었잖아요.

쓸데없이, 인정(회개)만 하면 될 것을.

 

‘예, 주님 저는 그런 인격이었음을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아무 의가 없음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주님의 의로 다니겠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렇게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헤매다가 가나안으로 못 들어가고,

복만 바라다가. 세상에, 아니 원한이 지긴 졌죠.

 

우리가 복을 못 받아서. 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세상에 그 생을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문제해결이나 바라는데..

문제 해결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내가 즉시 나를 부인하는 순간에

그 문제 해결이 와요.

 

그런데 항상 십자가가 먼저 와야 되는데, 자기 복을 먼저 챙겨요.

그러니 복이 오겠어요?

언제나 그래서 여러분들이 축복도, 십자가가 먼저 와야 복이 오는 거예요.

 

과부도, 그 여인이 십자가를 지었기 때문에 복 받잖아요.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면 병이 낫잖아요. 다 십자가가 먼저 와야 하는 거예요.

순종을 보여야만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에요.

 

십자가는 안 지고, 자기 잘난 것만 뻐기고

자기 무식한 것 모르고.. 그렇게 행하다가는 결국 천국에서 짤리는 것이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