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기도하라1 시122:6~9, 사2:1~3 인터넷설교 스크랩,
시122:6.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기도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9.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신약교회는 반쪽입니다. 만약 유대인 교회가 없으면..
▶제가 가장 흥분해 하는 주제.. 여러분 아시죠?
<교회 그리고 교회의 회복>
이것은 성경전체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와 있는 주제입니다.
교회 회복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저는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고, 또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교회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사도행전 3:21절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 까지는
반드시 하늘이 예수님을 마땅히 받아두리라.’ 행3:2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없는 이유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유가 회복되어야만, 예수님이 오실 수 있다고 말씀드렸고,
그 만유의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교회가 회복될 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회복시키신다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말씀드렸는지 몰라요. 기억나시죠?
▶그러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사야 2:2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위에 굳게 설 것이다.
모든 작은 산위에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것이다.’
그러면서 그 ‘여호와의 전의 산’ 그것이 바로 교회라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고, 그리고 그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보니까,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한 말씀일 뿐 아니라,
신약 교회를 향한 말씀임과 아울러
이 말씀은 결국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제.
※문자적으로는, 지금의 이스라엘, 예루살렘이며
상징적으로는, 신약교회를 가리키는데,
그걸 둘 다 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맞다고 봅니다.
<상징적 신약교회>가 맞지만, <문자적 예루살렘>도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분명한데, 저는 그것을 보지 못 하였던 거예요.
바로 그 앞 절에 사2: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이라”
분명히 거기에 써져 있잖아요. 이 말씀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이다.
저는 그런데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어요. 그냥 건너 뛰어 버렸어요.
2절, “말일에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전의 산” the mountain of the LORD's
‘교회’라고 하는 이 산이
모든 산 일곱 가지 영역에서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미디어 / 교육 등, 그 모든 산위에 뛰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본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게 주시기 전에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사2:3절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되 오라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 ‘여호와의 산’은 교회요,
‘야곱의 하나님의 전’은 교회라고 저는 설교했고 가르쳤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은 그것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예루살렘이 문자적으로 회복되어지고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는, 이 말씀을, 문자적 예루살렘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상징적 신약교회만 생각했었을까요?
▶제가 지난 5년 동안 생명과 같이 여기며 여러분에게 전했던 말씀,
그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이사야 40장 말씀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기억나시죠.
그 말씀도 다시 보니까
그 말씀이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거기에 쓰여 있었는데, 왜 못 보았을 까요.
40: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지금 어디에게 말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에게 말하는 것인데
저는 그것을 빼고 말씀을 전한 거예요.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 예루살렘이 마땅히 받아야 될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
예루살렘이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
예루살렘이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그 대가를 배나 받았다.’ 40:2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가 되었고, 풀어 주실 때가 되었고, 위로할 때가 됐다.
그러므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40:3
그럴 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되리라’ 40:5
이 이사야 40장 말씀은,
1)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될 이스라엘의 영광을 가리킴과 동시에
2) 신약교회, 예수님의 오심으로 얻게 될 이스라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와 아울러, 말일에 나타날
3) 육신적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 벤자민 오 목사는, 왜 내가 이것을 못 보았을까요?
3)의 해석을 못 했을까요? 여기 분명히 기록되어있는데..
왜냐하면 저는 신약교회밖에 몰랐기 때문에,
그 신학의 영향으로
문자적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교회로만 본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놓쳤던 거예요.
▶그리고 이사야 60장 말씀 기억하세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 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 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말씀이 물론 마지막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교회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말일의 예루살렘을 향한 말씀이라는 거예요.
위 1), 2), 3)의 관점을 다 가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1), 2)는 전통적인 해석이라서.. 아무 문제가 없지만
3)의 해석, 즉 ‘말세에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세우신 그 목적, 그 비전 에 대한 말씀 기억나시죠?
이사야서 66장 1절 말씀
“Where will my resting place,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 있느냐”
‘너희가, 나의 안식할 처소를 어디에다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고 우리 교회가 생겨났잖아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는 그분의 안식처를 마련해드리자’
▶그런 다음에 에베소서 2장에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예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2:20~22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서,
우리는 연결되어야 되고, 하나 되어야 되고 함께 지어져가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부르신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 말씀을 보니까,
이 말씀은, 신약교회를 향한 말씀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돌아오게 될
바로 그들을 향한 말씀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왜 나는, 이제까지 그것을 보지 못했는가요?
신약교회에 너무 눈이 가린 것입니다.
그 교회라는 주제에, 제가 너무 많이, 제 모든 관심을 다 쏟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 말씀을 보니까 엡2:11~12절에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 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 이방인교회를 얘기하는 거예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여기서 둘이 무엇인가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이 둘이 무엇인가요?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이죠.)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거예요.)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3~16
이 둘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너무나 명백하게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인거예요.
결국 이 말씀은 이방인의 교회와, 유대인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유대인은 싹 빼먹어 버리고
오직 이방인 우리 교회만 생각하고
우리 이방인 교회로서만이, 그 하나님의 처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시 성경 말씀을 보니까, 그것(이방인의 신약교회)은 반쪽에 불과하고
반쪽으로는 도저히 하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를 이룰 수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저는 못 본거예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제가 충격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저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찌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요. 어떻게 이것을 못 볼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시편 122:6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 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과거에, 이성경 말씀을, 죄송합니다만, 건너뛰었습니다.
제가 왜 건너뛰었냐 하면요,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할 시간 있으면 나는 다른 것 기도 하겠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위해 기도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북한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내가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내가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 하겠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과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뜻이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이 말씀이 계속해서 제 마음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다.” 시122:6
‘주님, 예루살렘이 무엇이길래,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최근에 제게 일련에 만남들을 주시고,
그러면서 일련의 책들을 읽게 하셨는데,
저는 요즘에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저 나름대로 성경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완전히 새롭게 보입니다. 정말 성경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까지 이것을 놓치고 살았을까요?
예루살렘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예루살렘이 무엇이기에 제가 이렇게 말합니까?
여러분 들어 보세요.
하버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원래 유대인이요, 유대인으로서 아주 대표적인 지위에 있었고요.
그러다가 이분이 예수님을 만나서, 유대인으로서 ‘메시아닉 쥬’가 되어서
현제는 예루살렘에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도록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들을 세우고 훈련 시켜서 <메시아닉 쥬 교회>를 세우는
아주 중요한 인물 중에 Keith Intrater 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을 제가 현지에서 직접만나서, 교제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요,
이분이 본인이 유대인으로 있을 때 볼 수 없었던 것을
그분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나서,
다시 성경을 보고, 너무나 귀한 것을 깨닫게 되고,
요즘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다시 신약을 보면서,
그분이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유대인이 절반 가지고 있고, 신약교회가 절반 가지고 있는데
신약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 없고,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약교회가 없습니다.”
이 둘(유대인 교회+이방인 교회)을 하나로 합치기만 하면,
완전한 교회가 된다는 것이지요.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하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엡2;14
▶그것이 그분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서,
이분이 몇 권의 책을 쓰셨습니다.
그중에 한 책이 있습니다. ‘From Iraq to Armageddon 이라크에서 아마겟돈 까지’ 라는 영어제목인데,
우리말 번역은 <속히 오시리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제가 그 책을 소개합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모든 것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예루살렘에서 끝난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세계에서 중심이다.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예루살렘은 세계에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대륙들은 예전에도 지금처럼 나누어 있지는 않았다.
본래는 거대한 한 덩어리의 땅이었는데,
바벨탑시대의 그 거대한 땅이 나누어졌던 것이다.
만약 대륙을 다시 연결시켜 아메리카를
다시 유럽과 아프리카로 호주를 남동아시아로 연결시켜보면
육지는 다시 한 덩어리의 거대한 땅으로 만난다.
그 땅의 한가운데 중동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동에 중앙이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에덴의 회복이다.
성경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천국은 에덴동산의 회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어떻게 새로이 회복된 에덴에는 원래처럼 생명나무가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생명 강이 있다.
이 천국은 에덴에 새로운 회복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새로운 회복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날 완전하고 새로운 세계는
에덴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함께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에덴에 회복과 동일 한 것이다.
성경적인 용어로, 에덴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회복은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은,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동일하다면 실제로도 동일한가?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원래의 동산과 예루살렘이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곳으로부터 출발하여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 가보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못 박히신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한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인가? 예루살렘은 희생제물을 드리던 성전이 자리한 곳이었고,
예수께서는 그 희생제물의 의미를 완성하여 성취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생제물을 드리는 성전이 왜 거기에 위치해 있어야만 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이삭을 첫 번째 희생재물로 받치려 했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희생재물을 드렸던 그곳에서 재물로 드려졌는데
그것은 바로 이삭을 재물로 드리기 위하여 결박하였던 자리였다.
하지만 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곳이, 그곳이었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한 장소를 지시하셨는데
그곳은 하나님이 이전부터 그분의 마음에 두고 계셨던 곳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 성전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것,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
이 모든 것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던 원죄를 회복하기 위한
속죄의 전형들이었다.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그 속죄의 행위도 범죄의 현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이는 원죄로 인한 손상을 되돌려 놓기 위함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는 장소가 되어야만 했는데
이는 그곳이 성전이 있던 자리였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치려 했던 바로 그곳이며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했던 바로 그 동일한 장소 에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골고다/예루살렘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앞서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것을
원래 에덴 상태로 되돌리기 위함이라는 말인데..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논리라서, 생소하네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부인할 수가 없었어요.
이 말이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이분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과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나라와 낙원을 이 땅위에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표현 되는 곳이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은, 에덴을 이 땅에 회복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표현이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예루살렘이 아름다운도시 여서가 아니라
인간을 에덴동산으로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예루살렘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에 세기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며,
예루살렘이 그 구속계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범죄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에덴동산에 함께 계셨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은 회복된 에덴동산
즉, 새 예루살렘에서 또다시 인간과 함께 거하시려 하신 것이다.
현세대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언젠가는 인간과 함께 다시 거하실거라는 소망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소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항상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어야하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우리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금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예루살렘이 왜 중요한가하면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중요 하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을 왜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하는가?
하나님에 마음에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이분은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고 나면 끝이 올 것이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끝이 난다.
그리고 마지막 부흥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두 번째 오실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 슥14장.
그리고 예루살렘을 그분에 나라의 수도이자 예배의 중심지로 삼을 것이다. 슥14:6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실장소가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그토록 중요한 곳입니다.
예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은 더욱 심화 되어 갈 것이고,
마침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하게 될 것입니다. 슥14장.
그것이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들이 공격하는 그때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전쟁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세계평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2장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회복된 낙원에서 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중심이 될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결국은 이 말씀들은 교회 회복을 위한 말씀일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말씀이요. 예루살렘에 회복에 대한 말씀이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준비하는 이야기요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기도하고 사모하고 소망하였던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 것이에요.
저는요 오늘 시편 122편 말씀을 읽으면서
예루살렘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 이 말씀이
저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들리는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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