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눅11:5~13 14.06.01.설교스크랩, 녹취, 출처
◑서론
우리 성도들의 불신앙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통해서입니다.
기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불신앙이고
기도를 하면서조차 그 기도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의심과 불안 속에 기도를 포기하게 되는 것 또한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우리 안에는 기도를 막는 육신이 있습니다.
육신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악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가지고 우리 영혼 속에 있는 그 육신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를 가로막습니다.
아침에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준비하기 때문에 바빠서 기도를 못하고
점심에는 사람들을 만나서 일하느라 기도를 못하고
저녁에는 피곤해서, 지쳐서 기도하지 못하고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기도를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고 기도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그런 육신이 우리 영혼과 육체 속에 들어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면서조차 쉽게 기도를 포기하고
기도의 제목을 잃어버리는 저희들의 육신이, 육체 속에, 영혼 속에 들어있습니다.
기도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나의 인생의 미래가 기도한다고 해서 변화 될까?
나의 자녀가 변화 될까? 북한이 변화되고 통일이 이루어질까?
나의 질병이 나아질 수 있을까?
이렇게 기도하면서조차 우리는 쉽게 포기하고 단념하고 절망하는 우리들의 모습,
이것이 우리들의 불신앙의 모습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가운데, 우리가 왜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눅11:9~10,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오늘 본문 눅11:5~13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 중간에 있는 9절, 10절 말씀이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요한 1서에도 ‘우리가 가진 담대함은 이것이니 주의 뜻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들으심이라.’
이렇게 구하는 대로 얻고, 찾는 대로 찾아지고, 두드리는 대로 열려지고
이 놀라운 기도 응답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이 말씀을 믿고 체험하는 이는 극히 적습니다.
이 기도 응답의 놀라운 축복된 삶과, 우리의 삶은.. 너무나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도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시는데
제한이 없으신 분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함에 구해주심으로 일하시고
우리의 찾음에 찾아주심으로 일하시고
우리의 두드림에 열어주심으로써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하지 않습니다. 구하되 찾지 않습니다. 찾되 두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하고, 우리는 쉽게 단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끈질기게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쉽게 포기하고
왜 우리가 이 놀라운 기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그 원인을 우리가 함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의 영역이 점점 확대 되어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미국의 헤이먼드 교회의 잭 케일즈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저는 그 분이 이 본문을 해석한 것을, 오랫동안 참 맞다고 생각하며, 참 좋아했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는 어떤 세 가지 영역, 단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구하라..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에 관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령의 임재하심.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오직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거예요.
또한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일. 이것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100%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해야 하는 것이죠.
찾으라.. 는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이루어가야 될 영역>에 관한 것들의 기도입니다.
비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농부는 하나님께 '구합니다'. ask
그런데 만약에 농부가 밭을 갈러 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과연 진실 되게 구한 기도일까요.
진실 되게 기도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게' 되어있습니다. find
하나님+사람이 함께 이루어갈 영역입니다.
두드리라.. <하나님과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영역>의 내용들입니다.
예를 들어, 한 영혼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ask
그다음에 우리가 그 영혼을 ‘찾습니다’.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합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며 ‘찾아야’ 합니다. find
실제로도 찾지만, 먼저는 기도 가운데 찾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응답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 마음의 문을 열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도 두드리지만, 기도로 '두드리는' 것입니다. knock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이지요.
-우리는 모든 기도 응답이 하나님께로 달린 줄 알고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또 나에게 있는 책임,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우리는 찾고 또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상대편이라면, 우리는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한 학생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좋은 성적을 받게 해달라고 열심히 구합니다.
부르짖어 구하고, 금식 하며 구하고, 밤을 새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경건한 신앙으로 낙제하는 것이죠.
성령 충만한 꼴찌가 되는 것이죠.
왜요? 찾지 않았기 때문에.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진실 되게 구한다면, 진실 되게 찾게 되어있고, 진실 되게 두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리고
찾게 되고 그리고 받게 되는 것.
기도 응답의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바꿔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눅11:5~8, 한 밤 중에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
우리는 기도를 하지만, 중간 중간에 너무 쉽게 포기하고, 절망하거나,
혹은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기도는 꾸준히 계속해야 되는데,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9~10절 전후의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왜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눅11:9~10절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메인 메시지이고,
그 전과 후가 샌드위치처럼, 주제를 감싸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전은, 11:5~8절 ‘한 밤 중에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의 비유이고,
그 후는, 11:11~13절,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비유입니다.
▶먼저 <한 밤 중에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여행 중에 밤늦게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기 이웃집 친구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늦은 밤, 모두가 잠들었을 때입니다. 실례죠.
어떻게 보면 이웃이지만 무례한 부탁이죠.
모두가 곤히 잠들었을 때, 이웃 집의 잠을 깨워서
내 친구가 방금 왔는데, 여행 중에 먹을 것이 없는데
떡 세 덩이만 달라. 그런 부탁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웃이 어떻게 응답하는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8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 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 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이웃 집 친구’와 ‘하나님 아버지’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어떤 시간이든지, 가서 부탁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때로는 그 친구가 흔쾌히 받아주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친구니까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친구라도 짜증내지 않겠느냐.
그 친구가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아무리 친구지만 이것은 너무하지 않냐.
지금 몇 시냐. 잠자는 시간 아니냐.
가까운 친구라도 부탁해야 될 때가 있고, 부탁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도 주기 싫어하는 상황이고, 무례한 부탁이지만
끈질기게 졸라대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라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우정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끈질기게 졸라대야 주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사람이란 그런 법이죠.
사람이란 아무리 가까워도, 그 상황과 예의와 그 마음을 살피면서 달라고 해야지
이웃이요, 친구기 때문에, 잠자고 있는데 무조건 전화해서
‘돈 빌려줘, 이 부탁 들어 줘’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끈질기게 졸라대면 귀찮아서 주겠지만 그게 우정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는 결코 무례함이 없습니다.
왜, 친구는 잠을 자지만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기 때문이고요,
친구는 피곤하면 불쾌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불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생명은 절대 쇠하지 않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느 때건 어느 상황이건 우리 하나님은 절대 불쾌히 여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어떤 기도에도 하나님은 ‘무례하다 라며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거리낌 없이 기도로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 할 수 없을 듯이 좋으신 친구 같은 분이시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겠는가.
그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친한 이웃과 하나님을 대조법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친구에게 끈질기게 졸라대서 얻어내듯이
우리 하나님께도 끈질기게 졸라대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정 반대인 것이에요.
아무리 친해도, 친구의 우정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기도를 통한 요청에는 결코 한계가 없으시다.
마음 놓고 구할 수 있다. 거리낌 없이 구할 수 있다!
이것을 가르쳐주시는 거예요.
◑눅11:11~13 두 번째 비유는, 육신의 부모와 하나님 아버지를 대조합니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13절에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육신의 부모와 하나님 아버지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 전에는, 육신의 친구와 하나님 아버지를 대조했습니다.)
육신의 부모도 좋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더욱 더 좋으신 분이십니다.
악한 부모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랬어요. 그게 뭡니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
또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 중에서 최고로 좋은 것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다..
그 성령님이 왜 최고의 좋은 선물(응답)입니까?
모든 문제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해결이요, 해답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이기 때문이죠.
◑끈질기게 기도하라
본문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사실 같은 내용(기도하라)을
세 번 반복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끈질기게 중단없이 기도하라..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 비유를 읽으면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친구의 우정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우정에는 한계가 없으시고,
육신의 부모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신 분이에요.
그걸 인정하더라도, 우리는 끈질기게 기도해야 되요.
왜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만 응답하시는 것 같이 보이죠?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되느냐. 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인색하시기 때문입니까? 우리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응답하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왜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된다는 말일까요.
잘 들으십시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인색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능력이 없거나 또는 응답하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거나
아니면 그것을 구하는 대로 주시면 큰일 나거나
아니면 우리의 마음속에 참 된 것을 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고집을 꺾는데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실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응답하도록 설득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는데, 필요한 시간이 있어요.
하나님과 거리가 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필요한 시간.
우리의 육신의 고집을 꺾는데,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구하는 대로 응답되고, 찾는 대로 찾아지고, 두드리는 대로 열려지는
그런 기도 응답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의 소욕,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육신의 고집을 꺾고
자아를 포기하고 내려놓고 변화 되는데 필요한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예전에 저희 교회 교역자들이 <교역자 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강목사님(지금 북경에 계심)이 이런 제안을 했어요.
‘우리가 목회자들인데 가서 다른 것, 운동이나 그런 것 하지 말고
수련회 기간 동안, 온전히 기도하고 말씀보고 그렇게만 하자.’
그래서 모두가 목회자들이고, 기도하자는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다들 동의했어요.
그래서 수련회 프로그램이, 설교하고 기도하고 그런 순서로만 꽉 채워서 했던 적이 있어요.
참 열심히 예배보고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행복해하는 목사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저 또한 ‘아, 언제까지 이렇게 하나.’
그래서 사실은 겉으로는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별로 기도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수련회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진짜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수련회의 앞 시간에는 어떤 시간이 필요했던 거예요?
워밍업 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게 지나자.. 모두 기도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수련회가 끝날 즈음이었던 것이죠.
육신에 속했던 것들을 다 제하는 시간이 먼저 필요했던 거예요.
(그렇다고 저희 목회자들을 너무 무시하지는 마십시오.)
한 며칠을 예배를 해야, 우리의 육신의 소욕이 다 제거되는 거예요.
진짜 기도가 그 때부터 되더라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순간 육신 속에 있으면서, 잠깐 기도했다가
바로 응답받고.. 그런 삶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주제가 ‘끈질기게 기도하라’입니다.
왜요? 우리가 너무 하나님께 떨어져있고, 육신의 소욕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의 고집 속에 있기 때문에, 끈질기게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것은
내 육신/자아를 포기할 때까지 기도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때문에 필요한 시간이 아니더라는 것이죠.
▶또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기 힘든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키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즉시로 응답하고
또 찾는 대로 다 찾아지고 두드리는 대로 그대로 열려보세요.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사실 끔찍할 것이에요.
모든 성도들의 기도대로 다 된다고 한다면, 그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 기도 속에 얼마나 이기심이 숨어있고
그 안에 얼마나 우리 자신의 소욕이 숨어있습니까.
▶C. S. 루이스가 영적 스승으로 여겼던
조지 맥도날드라는 분이 쓴 문장 가운데, 이런 끔찍한 충격적인 문장이 있어서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주 미미하고 시시해 보이는 기도제목 한 토막까지 들어주고 용납하고
주의하는 신이 아니라면 믿음을 줄 수 없는 신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요구를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듣는 족족 다 받아주는 신이라면
그건 악신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다.”
무서운 말이죠. 우리가 구하는 대로 다 듣는 족족 그것을 필터링 하지 않고
검증하지 않고 기다리게 하지 않고, 우리의 육신에서 나오는 기도대로 다 응답한다면
세상은 지옥이 될 거예요.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포기하는 것을 기다리는 거예요.
정말 우리가 구해야 될 것, 찾아야 될 것, 두드려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주실 것이고 찾는 것이 찾아지고 두드리는 대로 열려지는
그런 놀라운 기도의 응답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죠.
▶때로는 우리에게 긴급한 중보 기도제목이 요청 옵니다.
밤늦게 잠자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긴급히 기도해 달라고 요청이 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요.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긴급하게 전화가 오고 문자가 왔다. 그럴 때
우리의 육신의 소욕은 지금 잠자고 있거나, 자야 되요.
그러면 7절에 있는 대로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다 잠겼고 나는 아이들과 벌써 잠자리에 들었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무엇을 줄 수가 없네.’
긴급한 중보 기도의 제목 앞에서도 우리는 육체의 소욕에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는,
지금 나는 자야 돼.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고집이 세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서
두 가지의 그림을 도형으로 그려서
기도에 관해서 교훈을 준 참 아주 정확하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기도에 관한 많은 대중적인 첫 번째 생각은 이런 그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도의 출발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한다는 거예요.
이게 맞는 것 같죠. 대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기도의 출발이 나고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한다. 이게 맞는 생각인 것 같지만 굉장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출발이 우리기 때문에.
▶또 하나의 그림을 보시면 기도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고 자신의 뜻을 나타내주시는 가운데 우리가 기도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것을
찾고 두드리면 열리게 되고 얻게 되고 찾게 된다..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기도의 출발이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 시각의 전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란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우리가 기도하려고 했던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되요. 우리의 소원이 바뀌게 되요.
▶제가 자라나면서 청소년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를 찾아뵙고 용돈을 받아야 되었어요.
언젠가 제가 이런 질문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꼭 이렇게 일주일마다 용돈을 받아가야 됩니까.
한 번에 한 달 치를 주시면 안 됩니까?
은행을 통해 보내주면 될 텐데 꼭 이렇게 먼 몇 시간을 가서
일주일마다 용돈을 조금씩 받아야 되겠습니까?
바쁜데 한 달 치 씩 주시고 그러면 안 됩니까?’
그랬더니 제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내가 한 번에 많이 주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네가 안 오잖아.
조금씩 주는 이유는, 아버지는 아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야.’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 얼굴이 아니라 용돈이 중요한 거예요.
한 번에 많이 주면 몇 달 안 봐도 되요.
하나님 우리에게 큰 것을 한 번에 왕창 주시면 몇 십 년 안 찾아요. 우리가.
그래서 하나님이 찔끔찔끔 나눠서 주시는 거예요. 자주 와서 보도록.
그리고 오더라도 오래 머물러야 조금 주시는 거예요.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얼굴을 더 보려고.
잠깐 왔다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래 오래 아버지 얼굴을 구하며 보기를 원하는 거예요.
주시는 것은 다 준비되어 있어요. 언제든지 주고 싶으세요.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우리 얼굴을 오래 보시기 원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이사야30:18절 말씀을 다같이 봉독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더 적극적인 기다림의 표현)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특별히 끈질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니,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의 약속을, 다 체험하시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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