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와 음녀 마7:24~27, 계21:10~11, 창11:3~4 출처보기, 편역
Living as Jesus Lived by Zac Poonen 9장. THE BRIDE OF CHRIST
▶신부와 음녀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성령의 사역의 결과, 그 완성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사탄의 모조품, 사탄의 결과와 완성작이 나타납니다.
‘음녀’라고 나오는데요,
그리스도-적그리스도가 대비되듯이
신부(교회) - 음녀(교회)가 대비됩니다. 음녀는 다름 아닌 ‘음녀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외쳤습니다.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신부처럼 아름다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구나.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고, 고귀한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데,
푸른 옥처럼 투명하구나.” 계21:2, 10, 11
사도요한은 ‘음녀’도 보았습니다.
음녀 Harlot란, 구약에서 보듯이, ‘영적인 음녀’(우상숭배자)를 뜻합니다.
이 음녀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약4:4
※구약부터 신약까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100%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음녀와 신부가 갈라지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예 안 믿는 세상 불신자 - 신자 이렇게 나눠지는 게 아니라요.
이 음녀는, 제 푸닌의 생각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교리는 정확하게 알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 (경건한 삶은 없는) 오늘날의 가짜 신자들이라고 봅니다. 딤후3:5
이 음녀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위의 ‘신부’와 대조해서 보세요.
“내가 보니, 여자라, 큰 바벨론이며, 음녀들의 어머니라.
보는 중에 한 음성이 들렸는데
‘큰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불타는 연기를 보라.’
그 타는 연기가 영원히 계속해서 올라가는도다.” 계17:3, 5, 18:2, 9, 19:3
여러분, 그런데 신부도 불을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환란의 불, 연단의 불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불을 통과하고, 불순불이 제거되고 정화되어,
‘고귀한 보석처럼 빛나게’ 되지만,
그러나 음녀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받아서, 결국에는 재와 연기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에 ‘나무와 풀’로 지은 집이 나오듯이
믿음의 불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그저 쉽게, 또한 크게 지은 집(신앙인)은,
결국 나중에 남는 것은, 재와 연기밖에 없고, 그 정체성은 ‘음녀(창녀)’라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
그러나 신부인 예루살렘과 바벨론은
지금 세상에 있는, 두 시스템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원리로 운영되는 시스템이고,
바벨론은, 세상 원리, 혼Soul적인 원리, 마귀의 원리로 운영되는 세상 시스템입니다. 약3:15
※음녀는 '교회' 즉 신자 였고, 바벨론은 세상 시스템입니다. 바벨론이 음녀를 포함하죠.
먼저 바벨론을 살펴보실까요.
바벨론의 기원은, 아시다시피 바벨탑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머리와 계획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 자기의 힘을 모아서 세워졌습니다.
창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러다가 나중에 또 비슷하게,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 성이 세워집니다.
당시의 세계 최고로 큰 도시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도시를 둘러보고는, 스스로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단4: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것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과, 같은 감탄이었고, 같은 목적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목적 말입니다.
그래서 바벨탑이 심판을 받았듯이,
바벨론 성을 건설했던 느부갓네살의 교만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단4:31-33
여러분, 이것은 세상 불신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사역을 하면서도, 그 목적과 본질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자기 중심적이 되어, 이렇게 ‘바벨론’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렘51:58.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의 넓은 성벽은 온전히 무너지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신자도 포함될 수 있음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히12:22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즉 새 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뜻합니다.
구약에는 그 모형으로서, 모세가 지은 장막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즉 장막(성막)이, 성전을 거쳐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
▶그런데 그 장막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획대로, 정확하게 지었습니다.
출40:16. 모세가 그 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정확하게 성막을 지었습니다. 출31:1~5참조.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출40: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이렇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막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에 의해 설계되어졌고 not 사람,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이, 짓는 사람들 위에 부어졌고, not 사람의 힘과 지혜로
이렇게 지어진 성막/성전/새예루살렘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불시험’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불시험을 통과하면, 불순물이 제거되어, 더욱 반짝반짝 빛날 것입니다.
사람이 지은 것 ‘큰 성 바벨론’처럼,
심판의 불을 통과하여, 재와 연기만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서두에도, 비슷한 비교가 나옵니다.
그것은 선악과와 생명나무입니다.
그 비교와 대비가 성경 내내 계속되다가,
계시록에 와서는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대비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마태복음에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입니다.
둘 다, 하나는 굳건히 서 있지만,
하나는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날 우리는 ‘창세기와 계시록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든지 말든지,
우리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든지
또는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 둘 중 하나에 포함되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고,
하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고, 스스로 높아지는 길입니다.
하나는 옛 아담을 따르는 삶이고,
하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는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삶이고,
하나는 자기 혼 (육신 포함)을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아담과 둘째 아담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안 들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첫째 아담은 불순종 했고, 둘째 아담은 그 음성에 순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안 듣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순종해서, 그 집(성)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이 있고,
듣기는 하지만 불순종해서, 그 집(성)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7:24-27
마7장에 나오는 두 집도,
계시록의 예루살렘과 바벨론, 두 성의 예표인 셈입니다.
▶오늘날, 정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자기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주신 성령의 감동으로 의롭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갑니다. 언약, 계명이 없어진 게 아닙니다.
그것은 겉 행위로서가 아니라, 자기 중심의 마음 내면으로부터, 그 동기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그런 ‘새 언약적 삶’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은,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보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계시록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새 예루살렘’입니다. 불타서 없어질 바벨론(모래 위에 세운 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읽으시면서
내가 반석 위에 세운 집인지, 모래 위에 세운 집인지.. 구별해 보십시오.
그게 바로, 계시록 식의 표현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가, 오늘날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그저 ‘지식’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지식으로 의롭게 되는’줄 알고, 그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구원 받은 줄 알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그건 마귀가 주는 미혹이요, 거짓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삶,
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는 삶으로 성숙/변화되지 않는 삶,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삶은.. 자기 인생이 ‘바벨론’ 성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결국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 ‘행함’ 이란, 인간의 자기 공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뜻합니다. 아래 말씀과 연결되는 ‘행함’입니다.
마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러나 이런 ‘행함’이 없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짓는 집’입니다.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여러분, ‘모래 위에 짓는 집’이 세상 불신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만 (즉 신자이지만)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집에서 성경을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하지 않은, 순종하지 않은’ 신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만,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히5:9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뭘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눈 여겨 볼 것은, 마7장 마지막에 나오는 두 집,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이.. 짓자 마자 당장 무너지는 게 아니라,
둘 다 한 동안 굳건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굳건한 집인지.. 육안으로 분별이 불가능합니다.
기초는 땅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잖아요.
말세에도, 바벨론과 예루살렘은.. 똑같이 그대로 서 있을 것입니다.
(이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똑 같은 표현입니다.
상징적으로 말세에 나눠질 두 신자 그룹을 뜻합니다.)
환란의 비바람, 또는 최후 심판이 닥칠 때 까지는, 구분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모에 더욱 신경을 쓰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신앙적 내면에 더욱 신경을 쓰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오늘, 내면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자기 내면의 정결함과, 계명에 순종, 하나님과 내면적 관계에 치심하고 있지 않다면,
그저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이는 집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요, 계시록 표현에 의하면 ‘무너질 바벨론’입니다.
벧전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가 있다는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지금도 심판하시고, 마지막 종말에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때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도 주의하십시오.
And if the righteous person is saved with difficulty,
의인도 환란을 통과하며, 어렵게 어렵게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마지막 심판 때도 그렇고,
비바람과 홍수의 심판, 또는 불로 태우는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 심판으로 정화되어.. 영생에 이르고,
구원 못 받는 마귀의 자녀는, 그 심판으로 완전히 망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여기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란,
영어로 you who practise lawlessness (disobey God) 인데 NASB
즉 ‘계명 없이 행하는 자들’ 즉 예수를 믿지만, 계명에는 관심 없는 자들입니다.
*헬라어로 ‘하노미아’인데, no law 라는 뜻이죠. (노모스가 율법)
그러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는 오역입니다.
'법 없이 믿는 자들아' 원래는,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수많은 신자들이, 이 말씀에 적용될 것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만,
자기들의 삶을 ‘주 Lord’님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해야 되는 줄도 모릅니다.
그들이 바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법 없이 행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다시 이 부분은, 계시록과 연결해 봅니다.
예루살렘의 뚜렷한 특징은 ‘거룩함/구별됨’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으로 불립니다. 계21:2
그러나 바벨론은, 그 특징이 ‘크지만’
‘큰 성 바벨론이여!’ 라는 표현이 계시록에 11번이나 나옵니다.
음녀들의 어미인 것입니다. 계17:5
오늘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자기 거룩함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 하는 신자는
‘예루살렘’ 성을 짓는 사람이요,
그렇지 못하고 그저 ‘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벨론’ 성을 짓는 신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큰 것은 다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야망과 자기 영광을 위해, 크게 된 것을 뜻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잘 섬겨서, 크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겨서 크게 되었다가, 나중에 ‘큰 성 바벨론’처럼 타락하기도 합니다.
일차적으로 이건, 우리 각자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 부르심은 오늘날 더욱 급박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세상 종말을 향해서, 급하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세에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처럼, 살후2:3
오늘날 세상의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라는 사람들이
바벨론과 혼합되어, 지금은 어쩌면 조금 잘 될지 모르나,
결국은 그 멸망에 동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구약의 롯의 가족들처럼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매우 명확합니다.
정확한 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번 영접한다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는 것,
자기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영광을 희생하는 사람,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
그들 남은 자들 만이 온전한 신부로 예비/준비될 것입니다.
▶창세기 애초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드러낼 자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성공할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공하든지/말든지..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이 드러나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그 창조가, 아담의 타락으로 깨어졌지만,
둘째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숙하고 변화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 마음의 강렬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그 목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를 보내서 다시 회복시키셨고,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그 길을 반드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길이 아닙니다. 천로역정의 길입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모든 부요와, 그 모든 영광에, 참예하는 자/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원리를 깡그리 모르거나 무시해 버리고
‘예수 영접했으니 구원은 따 놓은 당상, 이제부터는 복 받아 성공!’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배도입니다.
구약시대의 바알우상숭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믿으면서, 산당에 가서 바알우상도 섬겼다니까요.
▶이 구속하는 일,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서,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드는 일을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삼위일체로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불순종와 거부로 인하여
그러나 ‘남은 자’가 있어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식으로 말하자면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이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본으로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며,
예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여졌듯이,
또한 새 예루살렘 성이 그러하듯이,
그들 남은 자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스며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남은 자’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성도는,
영원한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새 예루살렘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고귀한 보석처럼 빛나며, 하나님의 영광(주로 성품적 영광)을 드러낼 성도들은,
지금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소금과 빛’으로서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기독교 신앙을, 교리와 지식적으로만 알며,
일생을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음녀)들은,
예루살렘에 속하지 않고, 바벨론에 포함될 것입니다. 결국은 연기와 재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신부들은, 영원히 천국에서, 그 무한대의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성도는, 그 아들 예수님과 함께 공동상속자로서, 그 모든 부요를 다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그렇게 누릴 성도는,
지금 현재 현실에서도, 그 맛을 조금 보고 있습니다.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천국의 삶을
지금부터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지어다. 지금부터 영원히!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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