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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기 / 잭 푸닌 中文

LNCK 2014. 8. 8. 11:55

◈2장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기 마11;29, 벧전2:20~23, 마26:38    출처, 영어 편역

 

Living As Jesus Lived by Zac Poonen  2장 Living In Humility              中文

 

◑예수님의 겸손, 마귀의 교만

 

 

 

하나님의 위대하심 greatness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습니다.

 

우주를 보시고, 세상을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라는 말씀처럼,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우리 인간의 머리로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은하계 galaxy 하나만 해도, 정말 너무나 큰데, 그게 수없이 많이 온 우주에 늘려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만 해도, 빛의 속도로 달려도, 수 십 억년을 가야할 거리입니다.

 

 

 

그와 반대로 ‘마이크로 세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솜씨가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작은 물체 속에도, 원자, 전자 세계로 들어가 보면..

 

거의 한 우주가 통째로 들어있다고 할 만큼,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정말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우주의 위대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위대함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나타나 보여집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비워서,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자신을 이 타락한 인간들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요1;14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겸손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그 영광은,

 

정말 우주의 위대함보다, 피조세계의 그 어떤 영광보다,

 

더 찬란한 영광임을.. 볼 줄 알고, 아는, 그런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왕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마지 못해 억지로 자기를 낮추거나, 이 세상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거만하게 돌봐주는 식의 행차가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겸손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영광’이라 생각하는데,

 

거기에도 물론 영광이 나타났지만,

 

그 보다 더 큰 영광은,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예수님의 기적보다 더 큰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참된 영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신 그 겸손의 영광, 그것이 더 큰 영광임을

 

보는 눈을 만약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그런 영광스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예수님께 나타난 진정한 영광을

 

보는 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실 때, 정말 순수하고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벌써, 자신을 낮추어, 연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겸손이 - 예수님의 첫 번째 발걸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첫 번째 발걸음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수 만 년 전에,

 

하늘에서 떨어져서 세상에 온, 소위 루시퍼라 불리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지혜에 있어서나, 외모에 있어서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루시퍼는 원래 천사장(천사들 중의 우두머리)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해서 자신을 높였고,

 

천사장이란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높였다고, 성경에 말씀합니다. 겔28:11~17, 사14:12~15

 

 

 

그렇게 높아지려고 하고, 스스로 교만했던 그 피조물은 (천사도 피조물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천국에서 내던져졌는데.. 바로 사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만의 죄는,

 

이 우주에서, 모든 죄의 뿌리요, 그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근원은 아담이지만,

 

이 우주에서 죄의 근원은 사탄입니다.

 

 

 

아담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도,

 

앞서 그러했던,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문제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도,

 

그런 교만의 죄의 뿌리/유전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 교만의 독소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대표로서, 자신을 스스로 겸손케 하신 것입니다.

 

 

 

모든 죄가, 근본적으로 루시퍼의 교만으로부터 기원한다면,

 

그 죄의 구속도,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겸손으로부터 기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에게서, 영적인 성장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거나 높아지게 되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 성숙의 척도는, 그의 외모가 아니라, 겸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심도,

 

교만한 마귀에게, 그 겸손의 시위가 되는 셈이지요.

 

 

 

그렇게 오실 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계실 때도, 내내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셨습니다’ 히2:17 KJV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들과 똑같은 존재로,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지내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높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신 선택

 

 

 

세상 영광과 위대함은, 그 사람의 지위, 재산, 업적, 가정 배경 등으로 매겨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다른지요!

 

 

 

▶1. 산골마을 나사렛을 선택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실 것인지.. 아마 조금은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결정권이 없지만, 예수님은 누구 가정을 빌려서 태어나실지, 결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하신 가정이, 누구의 가정이었습니까?

 

정말 저 산골 마을 나사렛에, 그 때도 대도시가 있었거든요

 

그것도 랍비나 군인이나 관리의 집안이 아닌 목수(석수 포함 당시 노동자의 통칭)의 가정에

 

정말 겸손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출생배경부터가 겸손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그 동네는, 별 볼일 없는 산간마을이었습니다. 요1:46

 

 

 

요셉과 마리아는, 너무 가난해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8일 만에 번제를 드릴 때,

 

그 예물로 양을 드릴 경제력이 안 되어서,

 

대신에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비둘기를 드리셨습니다. 눅2:22~24, 레12:8

 

 

 

▶2.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도, 예수님은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짐승들이 먹는 마굿간 여물통(말구유)에, 자기 요람을 만드셨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자기의 낮은 처지를 비관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처지가 낮아도, 적어도 예수님보다는 높게 태어났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의 혈통, 족보를 살펴보더라도,

 

그걸 아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 조상 중에, 네 여인이 나오는데, 마1:3~6

 

-다말은, 자기 시부 유다와 관계해서 자녀를 낳은 사람,

 

-라합은, 여리고 성의 몸 파는 사람,

 

-룻은, 모압 자손. 이방인

 

-밧세바, 다윗과 간음한 여인.

 

 

 

왜 예수님은, 하필 이런 수치스런 족보를 가진 가정을 선택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정말,

 

죄의 본성을 유전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저 멀리 떨어진 천국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

 

이 타락한 죄인들의 세계 한 가운데, 그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말입니다.

 

(그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예수님은 순종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신, 겸손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면에서도, 교만과 자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하는 소원도 다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최악의 가정에서 태어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위/재물/가정배경을 자기 위대함(교만)으로 삼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 하나도 가지지 않으시고도, ‘겸손의 위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위/재물/가정배경이 좋아서, 자기 자화상이 건강한 것은 좋지만,

 

그것이 교만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지위/재물/가정배경이 없어서, 고민인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시면서 ‘약할 때 강한 은혜’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아무리 가난하고, 가정배경이 나빠도, 예수님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높이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고, 낮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되, ‘왕’이 되어서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이 되셔서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그 '겸손의 영광'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겸손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롬12:2

 

 

 

우리의 내면속에, 우리가 구원 받을 때, ‘그리스도를 닮는 씨’가 심겨졌습니다.

 

‘예수 믿고 속사람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자마자 하루아침에, 완전히 성자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실제 삶과 행동의 열매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우리 내면에 ‘씨’가 뿌려졌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그 씨가 자라서 싹이 트고, 나중에는 결국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결국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빌2:3

 

그리고 자신을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엡3:8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아버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광이 충만하게,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는데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이 ‘아무것도 아님’을 취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시키신 그 어떤 사명도, 군말 없이, 진심으로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2:8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은, 진정 겸손한 표입니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테스트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보십시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불평 없이 순종하지 못합니다.

 

불만이 많고, 군소리가 많습니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게 다 아직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잔소리/군소리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30년간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께도, 군소리 없이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육신의 부모들보다, 더 죄가 없으시고,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모를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질서도, 존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보면,

 

   자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영적인 믿음도 떨어지는 사람에게

 

   그가 나의 선임자라고 해서, 그에게 복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은 사람은,

 

   그를, 하나님이 내 윗 권위자로 세우셨다고 할 때,

 

   내가 그에게 복종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4. 그리고 예수님이 ‘목수’란 직업을 선택하신 것도 보십시오.

 

정말 아무도 눈여겨 봐 주지 않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사실 때에도, 예수님의 명함에 붙는,

 

무슨 직함이 없으셨습니다. 박사/ 교수/ 장군/ 회장 .. 이런 타이틀 말입니다.

 

 

 

오늘날 목사를, ‘목사’호칭을 떼고 부르면,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예수님은 ‘예수 목사’, ‘존경하는 목사님 예수’, ‘예수 신학박사’

 

이렇게 불리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긴 했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호칭을, 스스로 단 한 번도 만드신 적이 없으시고,

 

사용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 세상 영광을 원하신 적도 없습니다.

 

철저히 ‘겸손의 영광’만 일평생 추구하신 것입니다. 귀 있는 분들은, 들으십시오!

 

 

 

예수님이, 무리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했을 때, 산으로 물러가신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저 ‘인자 son of man'로서 충실히 사셨습니다.

 

 

 

※관련글/ 나를 그냥 ‘예수’라고 불러 다오

 

 

 

 

 

◑예수님의 평소 삶의 겸손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으시고, 관심조차도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그렇게 사실 수 있었을까요?

 

 

 

그건 예수님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대면하고 있으셨기 때문이라 봅니다.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칭찬, 성령의 감동.. 이런 만족이 늘 있으셨으니까,

 

사람의 무관심, 사람의 경멸..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실 수 있었던 거지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나,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은, 그 기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종종 주의 시키셨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그를 고쳐주었지만,

 

그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 자신이 높아지시고, 소문이 날까봐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방해되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셨을 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막5:43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도,

 

그건 예수님의 전 공생애의 겸손하신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니까, 제자들이 발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 즉시로 예수님은 대야로 물을 떠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할까?’ 하며, 예수님은 두리번거리거나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필요가 눈에 보일 때는, 그냥 즉각적으로 그 섬김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그들과 동등됨으로 여겨지는 낮은 일 행함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시고, 정말 도덕적으로 완전한 분이셨지만,

 

그런 사회의 낮은 죄인들을 대하실 때,

 

그들이 조금도 자신의 추함으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그렇게 편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도우실 때,

 

뭔가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는 후견인이다’라는 식의, 교만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권위가 없었던지 (잘 섬기셨던지)

 

한 번은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충고한다면서, 예수님을 꾸짖을 정도였습니다. 마16:22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것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정말 겸손하십니다. 마26:38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이라고, 제자들 위에 언제나 군림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연약하실 때는, 겸손히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급적 자기 연약함, 무능함을 나타내 보이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시 받기 싫다는 얘긴데.. 사실은 그게 다 교만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겸손히 기도를 요청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늘 겸손히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물 위에 높이셨습니다. 빌2;9

 

 

 

지금 자신을 그렇게 낮춘 사람도, 장차 그렇게 높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춘 사람은,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좌우편에 앉을 것입니다.

 

 

 

지금 이 현실 세상에는,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계속 높아지고, 또 높아지고,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것인데,

 

이것은 사탄에게서 나온 생각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각은, 자기를 낮춥니다.

 

계속 낮아지고, 또 더 낮아지고, 죽을 때까지 낮은 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높입니다.

 

오늘 나는, 누구의 편에 섰습니까?

 

 

 

 

 

◑예수님의 겸손의 극치.. 십자가를 수용하심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부당한 재판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부당함, 그 모욕, 그 不정의, 그 모욕과 조롱을

 

다 감당해 내셨습니다. 바로 겸손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당한 일을 당하실 때, 그들을 향하여 저주 한 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은 보복 당하리라고, 그들을 겁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천사들을 동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모든 권리를, 다 기권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대신에 자기 주먹을 꽉 쥐지요.

 

자기도 힘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가해자인 너희들을, 응징하고 보복하겠다는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먹을 꽉 쥐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손바닥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손바닥을 힘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주먹 대신에, 손바닥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엔, 자기 목숨까지도 다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를 본받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본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 형상을 우리 속에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성품을, 자신도 나타낸다는 것이며,

 

이것은 특별히, 부당한 대우와 불의 injustice한 일을 당할 때,

 

예수님처럼, 불평하거나 불만하지 않으시고, 꿋꿋이 참는 일입니다.

 

 

 

 

벧전 2:20-23절을 읽어보십시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그 부당하고 수치스런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뜻이라며,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음모로 자신을 죽이는 것임을, 뻔히 다 아셨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감춰져 있음을 아시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잔을 기꺼이 마시신 것입니다. 요18:11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8

 

 

 

예수님의 겸손은,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아무도, 판단치 않으셨습니다.

 

모든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재판장이신 아버지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이 됩니다.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노라’ 요8:15

 

 

 

하나님은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마치는 말/ 오늘날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배우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름이 나게 되면,

 

마치 세상의 유명인사, 혹은 연예인처럼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잘못 배운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시며, 싫어버린바 되셨습니다.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거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큼은 아니지만, 그 제자들도 비슷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기독교는, 점점 더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그래서 세상의 인기를 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처럼요.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모조품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태어나실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통 털어서 다 보더라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기를 받으시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니라’ 눅16:15

 

라는 말씀에 합당하게 사셨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서 배우라’ 마11;29

 

예수님은, 제자들이 많은 것을 배우기 원하셨지만,

 

특별히 자신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가 유명해지고, 높아지는 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은근히 또 그렇게 가르쳐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니고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기 원하셨던 겸손을, 그 겸손의 영광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들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