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자로서의 사명자 눅10:33~35 스크랩, 정리, 출처
하나님께 소명(부르심)과 사명(임무)을 받은 성도의 직무 중에
한 가지, ‘위로자’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예레미야, 선한 사마리아인, 엠마오 도상의 예수님의 예를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최근 세월호 사고로, 슬픔을 당한 분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기에 부족했다면,
그건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1. 위로자 예레미야
성도와 목회자는, 성경을 통해 현실의 상황을 보고,
동시에 현실의 상황 속에서 성경을 보는 사람입니다.
성경만 보고, 현실 상황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범죄를 고발하고,
거기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연이은 회복을 예언/선포했지만,
그것만 한 게 아닙니다.
그는, 예견된 민족의 고통(바벨론 포로) 앞에서
자기 백성의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슬퍼하며, 위로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로 기억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영에 붙잡힌 그는
정치/종교지도자들의 무사안일주의와 위선을 갈아엎는
강력한 비판과 고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당시 관료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제거 대상 1순위였습니다.
(렘38:4,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러나 사람들은, 공의를 선포하지 않고 사회 정의의 문제를 덮어둔 채
‘위로’에만 매여 있던 거짓 선지자들(렘28-29, 하나냐와 스마야를 위시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죄에 대한 심판을 강력히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위로자로서,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렘8: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상한 심령을 대변한 것이지만, 동시에 선지자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안고 슬퍼했던, 번뇌와 공감의 선지자였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공감능력의 부재’라는 무감각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건 성령의 기름이 말라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빨리, 다시 채워야죠.
▶사람은 대접한 대로, 자기도 대접받게 되어 있습니다.
‘공감능력의 부재’로, 자기 주변에서 슬픔을 당하는 사람을, 잊고 지낸다면,
장차 자기도, 슬픔과 번뇌를 당하게 될 때가 되면,
아무도 자기를 위로해 주는 이가 없고, 혼자 철저한 고독 속에서 괴로워하며,
타인에게는 망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평소에 대접한 대로, 결국 대접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빈집에서 ‘고독사’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죽은 것마저도, 주위에서 아무도 모르는 경우, 말입니다.
렘16:7, 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위 말씀은, 예레미야의 예언인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가 되면,
그 재앙이 얼마나 큰지,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을 치러도,
너무 상황이 다급하고 경황이 없어서, 위로하지도/ 위로받지도 못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위에 누가 죽어나가도, ‘위로, 애도의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독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닌지요?
위로가 메말라 버린 사회는.. 마치 바벨론 포로 시대와 같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예레미야는 심판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회복도 함께 선포했습니다.
렘30~33장, 4장에 걸쳐, 회복의 말씀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만 인용해 봅니다.
30: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이러한 위로의 능력, 공감의 능력이
오늘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2. 위로자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대답에
당시 청중들은
아마도 자기들 가운데 뒤섞여있던 제사장과 레위인을 의식해서 머뭇거렸을 것입니다.
다들 거룩한 척은 합니다만 정작
‘네 곁에서 네 이웃이 될 사람’은 과연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무리들과 함께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사마리아 인처럼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눅10:37
자기 마음이 불편한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정작 그렇게 살지는 못했으니까요.
누가 세월호, 저 참사 만난 자들의 이웃인가요?
낚싯배를 급히 몰아, 바다로 뛰어든 28명의 귀한 생명을 건지는 어부,
소방호스와 커튼을 이어 학생들을 구조했던 승객,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 옆에 있는 학생에게 입혀줬던 승무원과 교사.
친구를 구하겠다고 구조되기 직전 선실로 돌아간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한 사마리아인의 인명 구조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특징과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 긍휼과 공감 입니다.
눅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고 지나치지 않았으며,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긍휼과 공감 없는 선행은,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책임과 정성 이었습니다.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살폈고, 곧장 응급조치에 들어갔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었습니다(소독과 지혈).
책임 앞에서 정성을 다하는 사람에게, 감당하고 짊어져야할 대가가 따랐습니다.
자기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려야했습니다.
애태우며 발 구르는 실종자 가족을 태우고
안산에서 진도까지 404킬로미터, 왕복 10시간 거리를 오갔던
택시 운전기사의 마음입니다.
▶셋째, 후속 조치와 무한 책임 입니다.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가버린 현장에서
‘누구 책임인가?’를 따지는 사람은 있었지만,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의 책임과 정성은, 한순간 타오른 연민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자신이 가야할 길을 계속가면서
또 다른 사람(여관 주인)들을 이 책임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책임 떠넘기기’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위기를 당한 사람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대중없이 치러야할 비용이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감수하고 있는 사마리아인의 무한 책임을 발견합니다.
위기의 순간 꽃피운 희생과 사랑은 숭고하지만
살아남은 우리가 내내 안타까워하며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처절한 사고현장을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웃이 아니었음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은
예배당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숱한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고도
주일성수, 예배엄수, 교회 봉사만 강조하는, 지금 우리네의 거룩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눈 떠야 할 것이고,
나는 과연 누구의 이웃이었는가를 반성할 때입니다.
◑3. 위로자 예수님 -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요 구원자로 믿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무기력한 예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충격을 넘어 허탈감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슬픈 얼굴 빛을 띤 두 사람의 낙향(눅 24:17)은
십자가 사건 이후, 방향을 잃은 모든 제자들의 모습을 잘 대변합니다.
현대 정신의학으로 진단을 내리자면
그들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세상 어떤 것보다
큰 위로를 제자들에게 선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위로 목회의 전범(典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같이 걸음
눅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2. 같이 머무름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 같이 먹음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위기와 상실 앞에서 크리스천의 직무
의사와 간호사가 응급실 제한구역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듯이
고통과 죽음의 상황에서 목회자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찬 성도에게, 누구도 말 붙이지 못할 때,
다가가서 옆에 서거나 앉아있을 수 있고,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은
고통의 당사자 입장에서 볼 때 ‘불가침 영역에 대한 과감한 허용’입니다.
이 같은 권한을 이용하려 들거나, 건성으로 대할 때,
목회자를 향해 일어나는 적대감과 분노는, 돌이킬 수 없기에 더욱 책임이 막중합니다.
▶1. 같이 있어주기
사회 지지망은 치유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회 지지망은 - 지속적인 정기 모임과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응대로
고통당하는 이의 회복을 돕는 관계를 말합니다.
함께 있어줌과 고통 현장에 방문,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기도를 더 하라고 종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 보다 더 많이, 기도해 왔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 나는 그저 침묵하겠습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했지만,
한 사람은 애도의 말을 하거나, 성구를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일어서면 그 사람도 일어섰습니다.
내가 문 으로 걸어가면, 그 사람도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 때만큼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를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와서 울면서
‘주님, 당신이 여기 계셨다면, 나의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었습니다. (여기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으로 신음하고 계셨습니다.
이 순간에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말없이 함께 있어 주는 것은, 기도의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2. 안아주기
안아주고 먹이는 행위는,
가장이 자식에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보호 행위입니다.
체온을 동반한 신체의 접촉과 가벼운 두드림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분노와 우울, 두려움,
혼란, 절망의 감정을 치유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 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문제는 피해자들이 애도곡선의 맨 밑바닥을 치고 있는 시점을 즈음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슬픔을 기억해 주는 일은
목회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목회자로서 사람들에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변화의 토대를 만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무기력한 우리의 두 손이 만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며
기도하는 사람의 책무를 수반합니다.
그 현장에 가서, 가족과 만나서 드리는 기도가.. 터치되려면,
보이지 않는 곳, 즉 자기 집에서, 그 가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선행될 때입니다.
할 수 있는 한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공감하며, 오래 기억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과
때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분별이 필요합니다.
▶주의할 점
크리스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자칫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위기 극복의 사례를 들며, 조급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상대편의 감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도
지금 고난당하는 이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함부로 성경을 인용하거나, 즉각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처럼
상대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표현을 삼가는 것은 상담자의 기본 소양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신앙인들의 ‘상투적’ 반응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일찍 천국으로 데려가셨다.
-우리를 시험하시고 연단하시기 위해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험을 주신다(고전 10:13)
-시간이 해결할 문제다.
이런 말은 진리이며, 어떤 경우에는 소망을 줄 수 있는 말이지만
극한 절망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수 있으며
때에 따라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자기 집에서 '사전 기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위로를 주지, 상처를 안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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