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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대가

LNCK 2014. 8. 10. 16:16

◈제자도의 대가              눅14:25-35                       2014.07.06.스크랩, 녹취

 

 

◑서론, 뒤돌아서서 말씀하시다    14:25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대중의 인기라는 것입니다.

권력욕이라는 것은 대중의 인기를 먹으며 자라나는 무서운 독버섯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끝까지 올바른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의 내내 동안,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열광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여겼고,

빌라도와 헤롯 같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유대를 해방시켜주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예수님은 대중의 인기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한다고 해서, 우쭐해 하지도 않으셨고,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6장, 오병이어 후 등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고, 때로는 가르치셨고, 그들을 고치셨고, 그들을 이끌어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큰 무리를 향해 뒤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눅14:25

 

예수님께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왜 뒤돌아서서 말씀하셨을까요.

뭔가 만족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숫자에 관계 없이,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의 신앙 상태 자체에 만족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단순히 입으로 회개했다고 이야기하며 따라오는 수만 명의 사람들 보다,

예수님은, 진실한 회개하고, 진실로 신앙을 고백하는 한명의 제자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양보다 질을 추구하셨습니다.

겉모양이나 겉치레보다는 본질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짓보다는 진실을 원하셨습니다.

 

그림자 같은 관중이 아니라, 실체 실체가 있는 진실한 고백이 있고,

제자도의 삶이 있는 그런 소수를 갈망하신 것입니다.

 

▶그저 인기에 따라 다니는 수많은 숫자의 군중/무리들에 만족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그들 소수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주신 이 본문의 말씀을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 또한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회가 이 말씀에 귀 기울여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맹목적으로 따라다녔던 “큰 무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모이며 많이 모였다..

그래서 모인 숫자를 바라보며 만족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 교회에

정말 귀하게 귀 기울여 들어야 될, 주님의 음성이라고 믿습니다.

 

◑본론1. 제자란..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         14:26~27

 

눅14:26~27절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단순한 팬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우상처럼 여기는 군중으로 남아있기를 원치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제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주님을 환영하며 또 외쳤던 그 군중들이 한순간에 돌변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으로 돌변한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여 어디로가시던지 저희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잡히셨던 그 밤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많은 무리 자체를 정죄하신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무리 자체를 따라오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적 권능, 교훈. 신비함 앞에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무리들이 변하여 제자가 될 것을 원하셨다는 것이죠.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본문 말씀은  :27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의 최우선 대상으로 넣는 것입니다.

 

가족과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도, 자기가 사랑한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첫 번째 자리에 놓아드리는 것,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다 두 번째 자리에 놓는 것 - 그것이 제자도의 대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부모,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이렇게 번역되어있습니다.

예전에 쓰던 개역개정에서는 ‘미워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돼 있죠.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도의 대가로,

‘하나님을 가족과 처자보다 더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십계명 제5계명에는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계명을 어기라는 뜻입니까?

또한 가족의 대한 사랑(인륜)을 깨뜨리는 분이겠습니까?

그런데 왜 ‘(가족을) 미워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셈족 계통 언어의 과장법입니다. 논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중하고, 온전해야 될지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마치 그 밖의 사람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실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사랑을 요구하신 것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밖의 모든 사람은 상대적으로 미워하는 것인가? .. 그것은 또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을 이렇게 깊이 최우선적으로 사랑하면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무관심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하여 온전한 사랑을 드리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 주변의 모든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은,

실제로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배타적인 사람은

예수님이 그 사랑을 홀로 받고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돌려주시고, 나누어주셔서, 더 풍성하게 해 주십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누군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제자의 삶을 보시면

그 사람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돌보며 헌신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제자의, 신비로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역사 가운데, 이렇게 누구보다도,

정말 자기 가족보다도, 자기 자신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했던 귀한 믿음의 선배들이 계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오정모 사모님!

주목사님이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주목사님이 많이 안타까워하셨죠.

 

그 모습을 본 일본 형사가, 주목사님에게 제안을 합니다.

‘당신이 만일 위독한 어머님을 뵈러 나가기 원한다면, 허락하겠소.

그러나 당신이 사회에 나가서, 신사참배를 죄로 정죄하지만 마시오.

당신이 신사참배를 하든 말든 그것은 상관 않겠소.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로,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지만 마시오.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yes, no 아무 대답이 없이

어머님을 뵙고 싶었단 마음으로, 일단 감옥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집으로 막 돌아왔는데,

그 얘기를 들은 오정모 사모님이, 즉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지금 즉시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세요.’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돌려

감옥으로 제 발로 다시 들어갔다는 겁니다.

 

왜요? 나올 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을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서 ‘침묵적 동의’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감옥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다시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죠.

 

남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여인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목사님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사랑하는 가족을 미워할 정도로,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 모습이죠.

 

▶손양원 목사님의 아내 정양순 사모님도 이에 못지 않으셨습니다.

손목사님도 신사참배거부 문제로, 처음에 1년7개월 형을 받으셨죠.

 

이 기간 동안에 정양순 사모님이 금식 철야기도 하면서 늘 기도를 했죠.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보통 아내 같으면,

이렇게 억울한 남편을 위해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빨리 나오게 해주세요. 억울함을 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을 텐데,

 

손 목사님의 사모님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손 목사님의 신앙이 꺾이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다가 1년7개월이 지났습니다. 만기가 되면 출옥해야 하는데,

출옥하는 날, ‘이제 밖에 나가서는 신사참배를 하겠지요?’ 라는 질문에,

손목사님은 전혀 뜻을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출옥이 그 자리에서 금지되고, 다시 종신형을 선고받았죠.

그때 감옥 바깥에서 출소를 기다리던 가족들의 상처가 너무 컸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다렸는데, 결국 못 뵈었으니까요.

 

그래서 전남 순천에서,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되던 도중에

길에서 사모님을 만나신 거에요.

 

보통 부인 같으면 슬퍼서 울고불고 매달리며 그렇게 했을 텐데,

사모님은 성경책을 펴고, 길에서, 요한계시록 2:10절의 말씀을 펴서 읽어드렸다고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고 한 말씀을 더 보태셨다고 합니다.

‘당신이 만일 우상에게 절하면,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이 말씀으로, 남편을 객지로, 그것도 형무소로 떠나보냈습니다.

남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 아내죠.

 

▶다른 나라 이야기인데, 어느 순교자가 화형 장에 끌려갈 때,

당국자들이, 길에서 가족들을 만나게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을 만나게 한 것은, 이 사람의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는 전략이었죠.

 

그때 아내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과 정 반대로,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여보, 그렇게 고집스럽게 굴지 말고, 목숨이라도 건져야 할 것 아니요.’

그렇게 회유했다는 겁니다.

 

자식들도 옆에서 울부짖으면서,

‘아버지, 저희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죽지 말고, 그냥 온 가족이 함께 사십시다’

 

그때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당신과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다.

하지만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한다면,

나는 당신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가야만 하오. 내 몸을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불에 태워지도록 올려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과 자기 생명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한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죠.

 

▶비록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이 정도의 순교의 길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도,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신앙적 순결을 요구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예전에 김사무엘 목사님을 통해,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죠.

 

지금도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세례문답을 할 때, 한 가지를 묻는다고 하죠.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간단한 서약 동의로 세례를 주지만,

지금도 지구상 어디에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자기 처자와 자식을 다 버리고, 떠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대가 지불’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그렇다면, 진정한 영생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또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번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눅14:28~33↓

‘대가 지불’의 값과,

‘장차 얻게 될 영생’의 값을!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이기에, 우리는 ‘제자의 대가 지불’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살아갈 때,

때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포기해야 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붙들고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에는 언제나 대가지불이 요구됩니다.

그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데 대가가 요구된다는 것은 아니죠.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을 값없이 받은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그때부터 증거가 요구되는 거예요. 어떤 대가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짓된 신앙은, 예수님을 따라왔다가.. 그냥 가버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나갈 때, 다 떠났던 것처럼..

 

교회 역사를 보면, 고난은 중요한 시금석 이였습니다.

인생 개인적 고난이던, 교회에 대한 핍박이던 간에,

고난이 바로 나의 믿음이 진실한 고백인가/아닌가를 결정짓는 시금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군중심리, 모방심리,

또 많은 사람들이 따르니까, 유행 같으니까.. 이런 신앙이 아니라

 

‘제자도의 대가를 지불하는 그러한 신앙이 돼야 할 것을

2가지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2. 먼저는 건축의 비유입니다.      14:28~30

 

탑을 세울 때 탑을 세우는 건축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눅14:28-30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만일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기초만 놓고, 위에 아무것도 쌓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볼 때 비웃지 않겠느냐, ‘기초만 놓고, 탑을 쌓지도 못한 저 자를 보라!’

 

우리의 신앙이 그런 모양일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은, 땅을 사기로 결정한 기초인 것입니다.

그 위에 벽돌을 쌓고, 탑을 쌓아, 원하는 집을 지어가는 것

우리의 신앙은, 집을 지어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나는 믿고 또 믿었고 구원받았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순간에 결단하는 믿음이 아니라,

매일 매일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가는.. 그런 믿음으로 집을 지어져 가야되는 것입니다.

 

이런 ‘건축자의 개념’이 우리 각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건 오랜 세월 동안 짓는 것이며, 많은 인격적 재료가 정성스레 들어가야 하는 작업입니다.

 

어떤 집을 짓는 것입니까? 심판 날에 견딜 수 있는 성품, 인격!

그런 믿음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벧후1:5~7절에, 우리 믿음의 기초위에 쌓아가야 할 여러 요소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여기 보면 우리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죠.

믿음위에 무엇을 쌓아야합니까? 덕이라는 기둥을 쌓아야 되요.

믿음이라는 기초 위에, 덕이라는 기둥을 세워야 되요.

 

그 덕에 무엇을 세웁니까? 지식이라는 지붕을 세워야 되요.

지식위에 무엇을 세웁니까? 절제라는 기와를 올려야 되요.

또 인내라는 문을 달아야합니다.

 

경건이라는 커튼을 달고, 형제우애 라는 소파를 들어놓아 야하고,

사랑이라는 식탁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믿음의 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점점점 쌓아져 갈 때, 덕을 더할 때,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게 있어요.

우리의 감정/ 분노/ 절제하지 못하는 것 .. 그걸 내려놓는 대가를 지불해야죠.

그래야 ‘덕’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절제라는 것은 더 올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지불해야합니까.

우리의 믿음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 집을 완성할 수가 없는 거예요.

 

◑3. 다음은 전쟁의 비유죠.         14:31~33

 

눅14:31~33절의 말씀을 우리가 같이 읽겠습니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만 명의 군사를 가진 왕이, 2만 명의 군사를 이끈 왕이 쳐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승산이 없죠. 그 판단을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전쟁입니다 싸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가운데 올 때

그것은 때로는 반대에 부딪히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이런 말씀하셨죠.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세계관에 있는 어떤 가족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 한 거에요.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물리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죠.

그러므로 우리는 덕을 세우고, 인내를 세우고, 사랑을 세움으로써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나 자신을 볼 때, 영적인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안 돼요.

우리를 공격하는 사단은, 내 개인의 능력으로는 부딪혀서 이길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사단의 방식이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즉, 불순종하는 습관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린 어쩌면 1만 명의 군사로, 2만 명의군사를 대항해 싸우는 왕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인정하라는 겁니다. 그걸 정확하게 받아들이라는 거에요.

‘나는 약하다, 능력이 부족하다’ 정직하게 자신의 영적상태를 평가하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화친을 청하라는 겁니다.

나보다 더 힘센 나라에 도움을 청하라는 거 아닙니까. 영적 전쟁의 비결이죠.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가 더 세다고 생각해요.

내가 상대보다 몇 만 명 더 군사를 가진 그러한 것으로 착각한 거죠.

그래서 싸움에서 실패하는 거죠.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화친을 청해야 해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화친을 청해야 해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라는 거에요.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이죠.

 

믿음은 싸움입니다. 참된 믿음으로 들어갈 때 일어나는 제자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것을 깨달으라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지원만 의존하면 안 되죠. 우리가 버려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대적의 공격에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있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유가, 영적전쟁에서 무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소유가 영적전쟁에서 무기가 되지 않고

적의 공격의 채널(통로)이 될 수 있어요. 적이 심은 폭탄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때로는 영적전쟁에서, 내 소유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자도가 제자도의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

때로는 자기의 소유까지도 내려놓고 싸워야 한다는 거에요.

 

◑4. 안그러면, 밟히는 소금 됩니다.               14:34~35

 

만일 이렇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비용도 계산하지 않고

세워 올리다가만 탑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상태를,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34-35절의 말씀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우리의 신앙이 짓다만 집이 되고,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신앙이 된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 쓸모없이 내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대의 우리의 신앙이, 제자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에,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버려져지진 않았는지,

 

또 지역교회가, 제자의 삶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았기에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되고 있진 않았는지,

우리 한국 교회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을 되어있진 않았는지..

 

오늘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을 보시며

뒤돌아서서 주신 이 말씀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며

우리 모든 삶에 예수님을 최고의 사랑에 위치에 올려드리고

 

날마다 우리가 지불해야할 것, 포기해야할 것, 버려야 될 것들,

그리고 자신의 영적상태를 정직하게 주님 앞에 고백함으로써,

주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