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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모음 2

LNCK 2014. 9. 9. 15:27

묵상글 모음 2                          가톨릭 펀 글, 출처

 

 

 

 

1. 감정노동

 

요즘 많이 들리는 말이 감정노동이라는 단어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고객님, 사랑합니다!”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일부 고객들은 그들이 조금만 잘못하더라도 모욕적인 말과 행동들을 해 댑니다.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친절함과 공손함으로 손님들을 대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속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겉의 와 속의 가 완전히 달라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감정 노동자들은, 다른 곳에 가서 자신들이 당한 것을 똑 같이

다른 감정노동자들에게 풀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서비스업비율은 2010년 기준으로 58.2%라고 합니다.

그들이 대부분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27%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징계 해직자 중 우울증 환자비율(28.5%)과 비슷하고

버스기사보다 2배나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비스업 종사자가 70%에 달하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우리나라 감정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노동 스트레스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평상시에 두 얼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괴물이 있고, 외면에는 착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꾸며진 착한 외면에 속아서, 내면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모습이 된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자신에게 못 되게 구는, 세상 사람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안에 그 화를 일으키는 자존심이라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라고 하시며 모욕적인 언사를 하셨을 때도,

그 여인은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며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즉 자아를 죽여서 멸시를 받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참으로 크다라고 칭찬해주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자아가 성령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감정 노동자라 하더라도 다 우울증에 다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가 나는 것이 자신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런 기회를, 자신들의 자존심을 버리는 기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들이 일어날 때, 매번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자아를 버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오나 분노, 미움이나 긴장, 혹은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는데도

그것이 내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 자아는 계속 내 안에서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이런 감정들에서 우리를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무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노예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은,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도 우리 주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자아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평화입니다.

 

참 평화가 와서 감정의 변화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면

자아를 많이 버렸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잘 살펴야합니다.

평화를 깨는 안 좋은 감정들이 나타날 때, 바로 그것이 자아 때문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가 (베드로의 경우처럼) ‘사탄이라 불려도 무방한 놈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자신을 버리는 연습,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평화로움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은 매일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으려고 해야 하는, 수련의 장입니다.

 

 

2.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             눅5:4

 

사람이 무슨 일을 도모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회사나 단체들,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을 움직이고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이든 사장이든 가장이든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이든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는 외적인 제도나 법에만 의존하게 되고,

사람을 압박하는 사람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요?

 

성경에 깊은 곳에 그물을 친다는 것과 사람 낚는 어부라는

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의 아주 깊은 곳을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 인간관계만이 내가 맺는 관계의 전부일 때,

다른 사람을,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거나,

내 삶의 들러리 정도로만 여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합니다.

 

내가 상대방과 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느끼는 슬픔, 그가 느끼는 한계,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가 느끼는 기쁨을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그의 존재를 들어올리고, 진정으로 그를 만나고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는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때 내 삶을 함께하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십을 갖게 될 것이고, 사람을 얻을 것입니다.

 

 

3. 가장 값비싼 포도주

 

제가 얼마 전 경험한 일입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 한 양로원을 방문합니다.

그 날도 몇 명의 신자와 함께 약속된 시간에 양로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한 할머니께서 매달 찾아와 줘서 고맙다하시며 조그마한 선물이라며

포도주 한 병을 내놓으셨습니다.

 

저는 대수롭지 않게 포도주를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자세히 포도주를 보니,

그 포도주는 국산으로 지하철 티켓 두 장 값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참 싼 포도주도 있다구나 했는데

사제관 식사를 도와주시는 자매님께서 옆에서 듣고 계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포도주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네요."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좋은 선물, 값비싼 선물에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저는

그 한마디 말씀에, 큰 방망이로 머리를 맞는 듯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동안의 삶을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큰 것, 좋은 것,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가지도 보니

작지만 소중한 진실을 보는 눈과 귀가 멀었나 봅니다.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 포도주는

지금 제 방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4. '문제'가 아니라 '신비'

 

얼마 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목회자의 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자신의 60회 생일을 맞아

잔치 대신에 지인들과 함께 저명한 역사학자를 초대해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살펴보는 강의를 듣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십 년 가까이 독일을 이끌면서,

유연성과 포용력 있는 태도와 균형 잡힌 정책으로

자국과 국제 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젊은 물리학자로서 정치에 입문했을 때

그녀가 이처럼 탁월한 정치력의 지도자로 성장하리라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지도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도 겸허한 마음과 깨어 있는 정신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늘 배우려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겠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을 통해 넓고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신앙의 위인들의 삶에서, 성숙한 신앙인의 참모습을 배웁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얻는 중요한 통찰은, 인생에 대한 전체적 태도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인생을 무의식중에 문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다가 지쳐 갑니다.

 

신앙과 영적 여정 또한 단지 지속적인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여기며

성공과 실패, 업적과 좌절의 관점으로 판단합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자신의 삶을 무엇보다 하나님의 신비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신비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집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도 그 신비 안에 머물 때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의문과 아픈 상처도 함께 끌어안고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5. 붙잡는 사람, 길 떠나시는 주님          1:37~38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1:37~38

 

붙잡는 우리 인간, 그러나 길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뭐든 붙잡는데 이력이 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대상이 재물이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꼭 붙들어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앞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고,

꼭 붙들어 새장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시도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자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동물,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새끼를

30, 40, 50년 동안 붙들고 있습니까?

사실 18년 세월이면 붙들어놓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긴 세월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놓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자녀들을 어른 아이로 전락될 때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부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교, 학과까지 부모가 나서서 다 결정해줍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군부대 앞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닭똥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 직장 상사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려 듭니다.

자녀 대신 사직서까지 대신 써줍니다.

더한 것은 그런 치맛바람을 보면서도, 당연한 듯 바라보는 자녀들입니다.

 

더 한 것은 이런 붙듦이.. 피조물을 넘어, 하나님에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나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나의/우리의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나님을 나/내 교파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 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나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사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 내 틀 안의 하나님,

내 방식대로의 하나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6. 사랑과 소유

 

참으로 많은 사랑이 깨지는모습을 바라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향기로움으로,

아름다움으로, 풍성한 결실로 열매 맺지 못하고.. 참담하게 끝나고 마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사랑과 소유를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소유를 혼동합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억압하기보다는, 성장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편하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을 속박하기보다는, 해방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본성상 얽매이기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속박되고 싶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근원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인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마치 수족관에 들어있는 열대어처럼 생각합니다.

아니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애완견처럼 여깁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은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깊은 상처요, 괴로움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군중의 태도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바람 같으신 하나님,

좁디좁은 인간 세상에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갈릴리 지방에만 머물기에는 너무나 아까우신

인류 전체의 하나님이셨기에, 이런 말씀을 내려놓고 또 다른 길을 떠나십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인간적인 사랑이 무너질 때,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한 차원 높은 사랑, 보다 영속적인 사랑을 추구하길 바랍니다.

 

 

7. 떠남의 미련마저도...

 

예수님께는 단호하고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

부드럽고 따듯한 어머니의 모습이 같이 있습니다.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하시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부드럽고 따듯하신 것이고

두 모습이지만 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 사랑의 두 모습입니다.

 

저는 이런 두 가지 태도를 자유로이 취하실 수 있는 주님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엄함과 인자함에서 자유로운 주님은

이제 머묾과 떠남에서도 자유로움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시몬의 장모를 비롯해서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옆에 계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엄마 손은 약손처럼 손을 얹어 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자하심이 넘치시기에 그렇게 엄하심에도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스스로 있을 곳을 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으면 더 있고 싫으면 떠나고,

누가 붙잡으며 더 있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는,

그런 자기중심적이고 인간 정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입니다.

파견되는 대로 가시는 분이십니다.

 

저도 이런 것을 흉내는 내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어디에 있겠다,

이제 그만 하고 떠나겠다고 제 의견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늘 윗 권세자가 가라는 대로 기꺼이 갔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군소리 없이 가고, 가는 곳마다 열심히 했지만

속으로 보면 떠남의 미련같은 것이 늘 있었습니다.

새로 가는 곳의 싫음은 없었지만, ‘떠남의 미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래도 따듯해졌지만

전에는 떠나고 나면, 아주 매정하게 딱 끊어버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실 때, 주님은 어떠하셨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8. 내 기준이 틀릴 수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펜실베이니아 로 가는 중앙 보도에 층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층계는 실력과 성실성이 널리 알려진 옴스테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라는데,

글쎄 이상하게도 그 층계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입니다.

 

한번은 그 층계에서 넘어져 부상한 한 시민이 그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했지요.

그러자 옴스테드가 말합니다.

 

나는 그 층계를 건축하기 위하여 내 집에 나무층계를 만들어놓고 오르내리며

오랫동안 실험한 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하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좀 조심해 걸으시지, 제 책임이 아니라니까요.”

 

옴스테드의 말에 부상당한 사람은 화가 치밀었으나 할 말이 없었지요.

수십 차례를 실험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니까요.

 

그런데 그 시민이 걸어가는 옴스테드를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그는 다리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 옴스테드는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짧은 것입니다.

 

스스로 실험을 했지만, 자기 다리에 맞는 이 층계가

정상인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을 테고,

사람들이 가끔씩 넘어져 부상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납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제 판단이 맞다고 박박 우길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되돌아보면 내 판단이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신학생 때 좀 못살게 갈구었던 후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후배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하는 유행을 다 따라하는 이 후배의 모습이, 신학생으로서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많이 혼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후배의 따른 유행을 훗날에는 저도 똑같이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삐삐라고 불리던 호출기가 그랬고, 휴대전화가 그랬으며,

머리에 무쓰나 젤을 바르던 모습 역시 나중에는 저의 모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