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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이유를, 미래에서 찾아야

LNCK 2014. 9. 6. 08:18

 

고난의 이유를, 미래에서 찾아야                     9:1~7                    14/07/20 설교녹취

 

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고난의 이유를, 과거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미래에서 찾으십시오!

 

제자들이 '그가 소경된 것은 뉘 죄 때문입니까?' - 과거적 시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가 소경된 것은 아버지의 하실 일 때문이다.' - 미래적 시각이었습니다.

  

 

◑꼭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고대 희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1)

 

본문 요9장에, 고난당하는 사람의 이야기. 불쌍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장애인이 다 불행하지만, 시각장애인이 특별히 불행합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하늘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부모님 모습이 어떠한지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름답다, 장엄하다, 훌륭하다, 빛난다이런 말들이 이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평생을 그런 캄캄한 어둠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점자책이 있어서 시각장애인 공부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박사도 될 수 있습니다.

 

전자감응식 지팡이. 편리한 지팡이도 있습니다.

잘 훈련된 안내견,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로부터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각장애인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2

 

이 질문,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 고난의 원인을 지금 묻고 있는 겁니다.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느냐. 그 시각장애인 된 원인.

조금 넓게 생각하면 이것은 인간 고난의 원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이 질문을 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이 사람이 왜 맹인 되었는지 이유를 물으려면 어떻게 물어야 합니까.

선생님, 이 사람이 왜 맹인 되었습니까. 이 사람은 왜 고난당합니까?’

그렇게 묻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일단, 시각장애인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단정해놓고

그 전제하에서 누구 죄 때문입니까?’ 그렇게 묻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는 단정이, 이 질문 속에 깔려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인간의 고난, 고통, 슬픔, 눈물이, 죄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은 인간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기원이

죄에 있다는 것이지, (일반적 논리이지)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어떤 구체적인 고난이, 구체적인 죄의 결과다..(구체적은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점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든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뭔가 하면,

병 걸린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될 대상이 아니라, 비난 받을 대상이 됩니다.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한센 병자를 보면, 저주하고 돌멩이 집어던진 것도

저 사람은 저렇게 죄가 많다.’ 이런 사고가 그 밑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영생을 물은 사건을 기억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켰느냐?’

그때 율법사는 내가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당당하게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젊었고 젊었는데도 부자일 뿐만 아니라, 건강했기 때문입니다.

 

젊었는데도 부자고 건강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종교적인 배경에 의하면

그만큼 죄 안 지었다는 거예요. 그만큼 율법을 잘 지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당당하게, 율법을 다 지켰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시각장애인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물었습니다.

소경,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고 나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인데, 자기가 죄 지어서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에 붙인 말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참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나 부모가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가 있을 수 있어요. 당연히 죄가 있죠.

 

그러나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 된 것은, 그나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은 아니다.

죄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위에서, 일반적/구체적..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남의 불행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어떤 불행을 두고 저것이 어떤 죄 때문이다.’

이런 판단이나,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됩니다.

 

어느 교회에 어떤 분이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다른 집사님들이 모여서 그 분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어렵겠지요.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기도합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나이 많은 집사님이 옆에서 듣고 한다는 말이

죄가 많은가보지?’ 이랬습니다.

 

이 말이 돌고 돌아서 본인 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사자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길을 가다가 시각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선생님, 저 사람 불쌍합니다. 선생님 능력 있잖아요. 저 사람을 고쳐주시겠습니까?’

이런 말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선생님,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시각장애인을 불쌍히 여겨야죠. 그게 예수님 마음 아닙니까!

 

당시 병든 자들을 무시하고, 장애인들을 천대하던 종교적 문화 속에서

처음으로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고,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신 분은, 우리 예수님입니다.

 

인류 역사에, 병든 자와 장애인에 관한 관심과 사랑은,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죠.

어려움 당한 사람 보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얼마나 힘들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하고.

누구의 죄 때문이냐?’ 하며, 쓸데없는 시비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고난을 당할 때,

혹시 내 죄 때문은 아닌가?’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살펴보면서, 혹시 기억나는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끊어야 할 것은 끊고, 고쳐야 할 것은 고치는 것은.. 내게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개했으면, 그 다음에는 죄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하고도 계속해서 하나님 이건 내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는데, 나는 계속 죄를 끄집어내서 계속 죄 때문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때문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이 시각장애인, 죄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에게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시각장애인 된 이유가,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시각장애인 되었다는 겁니다.

엄청난 이야기죠.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났어요. 평생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그 고난의 이유가, 언젠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진리는

고난의 성경적 원인은 미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항상 고난을 두고, 그 원인을 과거에서 찾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은 고난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진정한 원인, 참된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하나님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진리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보세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고.. 분명히 모세에게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광야 40년 모세의 고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일반적으로 보면, 애굽 사람 때려죽인 것이 원인이지요.

때려죽이고 도망갔으니까 원인은 과거에 있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 위대한 영도자로 세우기 위해서

미디안 광야 40년을 주셨습니다.

 

미디안 광야 40년을 통하여, 모세는

이스라엘 200만 대군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나가는

위대한 이스라엘 지도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고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진정한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고난의 원인이 과거에 있을 때, 그 고난은 괴로운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후회스러운 것입니다.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고난의 원인이 미래에 있을 때,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소망적인 것입니다.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태릉선수촌에 가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들에게 훈련은 고난입니다.

중노동 이상으로 힘들고, 체중에 관계되는 선수들은 마음대로 먹지도 못합니다.

엄청난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난을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태릉선수촌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고난의 원인이 미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다는..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에 고난의 원인이 있을 때 고난은 필요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망 찬 것입니다. 희망찬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하세요.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의 진정한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미래에 고난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믿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내 고난의 원인이 미래에 있다면 그 미래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뜻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통해서도, 하나님 이루실 뜻이 있다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뜻이, 왜 없겠습니까.

 

내가 누군데요? 나를 바로 아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초점은,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운행에, 내가 초점입니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을 통해서도, 하나님 하실 일이 있다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 하실 일이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하실 일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일일 수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적인 일은 아니더라도,

조용하게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나의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박사 1호가 혹시 누군지 아세요?

강영우 박사입니다. 2002년도에 췌장암으로 천국에 가셨습니다.

 

이 분은 14살 때, 동네에서 축구하다가, 공에 눈을 맞아가지고, 두 눈을 실명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공에 맞아가지고 망막이 터져서, 두 눈을 다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실명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차별과 편견과 천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연세대학 문과 차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철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우리나라 맹인 박사 1호지요.

 

학위를 받은 다음에

전 세계의 장애인들을 위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합니다.

특별히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미국의 조지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미국 국가장애인 위원회의 정책 자문 차관보,

한국 사람으로서는 미국 정부의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어떤 교과서에서는, 현대의 영웅이라고까지 소개되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실명을 통하여,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눈을 잃는 이 고난을 통해서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는 게, 그 분이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강영우 박사. 그는 진실로 실명이라는 고난을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나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실 뜻이 있습니다.

내가 가난해도 좋습니다. 병들어도 좋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이라도 좋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 고난을 통해 하나님 이루실 역사가 있고, 그 역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래의 역사를 위하여 오늘의 내 고난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과정을 한 번 보도록 합시다.

본문 6, 7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방법은, 조금은 이상하게 보여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냥 앞에 세워놓고 눈을 뜰지어다.’ 그러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뭐 예수님 말씀 한마디면 끝나는 거지.. 복잡한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굳이 예수님이 침을 뱉어가지고. 진흙을 이겨가지고.

그걸 눈에다가 발라가지고, 가서 실로암 못에 씻어라.

 

고대 사회에서는 침이 약효가 있었다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흙도 약효가 있었다는 그런 믿음이 있죠.

저도 어릴 때 무릎 깨지면, 아주 고운 흙을 그 위에 뿌려서 발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그래도, 시각장애인 눈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발랐다..

이건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도대체 예수님 왜 이렇게 하셨겠어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짚고, 눈에는 진흙을 발라가지고 실로암 못까지 걸어갑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어요. 본인은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이게 뭐냐,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나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순종했습니다. 순종했더니 눈을 떴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라는 것이지요. 순종이 중요하다.

순종해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다. 순종이 중요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침이나 흙에 무슨 효용이 있다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확신이라기보다 순종입니다.

우리는 '믿음은 확신이다' 그런 생각을 갖는데, 이 사람은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이 예수님이 자기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발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했을 때에,

아 그러면 내가 낫겠구나.’ 이런 확신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없었을 거예요)

 

만약에 확신이 있었다면 가기 전에 선생님 고맙습니다.’ 인사라도 한 마디 했겠죠.

그런데 인사 안 했습니다. 확신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심했을 것입니다. '이래가지고 뭐가 되겠느냐'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순종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지상에서 사역을 이루실 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특별한 사역을 이룰 때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에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셨잖아요.

그 때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어부인 제자들이 볼 때는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만,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때

   예수님 손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다 앉히라. 식사할 수 있도록 다 앉히라는 겁니다.

   앉게 했더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왔을 때. 예수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했습니다.

무덤 속에는 시체가 썩어서 냄새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을 옮기라는 거예요.

옮겼더니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돌을 옮기는 명령에 순종했더니,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고난 가운데 있느냐.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순종하라는 겁니다.

불합리한 것처럼 보여도 순종하고 답답해도, 순종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해야 되는 겁니다.

끝까지 순종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 순종하기로 결단하세요.

 

그리고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순종하세요.

구체적인 말씀이 보이지 않는다면 순종의 자세로 사세요.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살아가세요

그리할 때 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고난을 두고 더 이상 불평하지 맙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고난의 원인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바라봅시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순종적 자세로 나아갈 때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순종합시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고난을 당하면서 고난의 의미를 몰랐기에 때로 낙망했던 저희들,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여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자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당하는 불행과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 하실 미래적 역사가 있음을 믿게 하시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하나님 영광 높이 드러나는 일이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1)

한 도시 국가의 왕이 학자들을 불러놓고

인생에 관해서 책을 한 권 써와라그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학자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해서, 아주 양이 많은 두꺼운 책을 한 권 써왔습니다.

왕이 보더니 너무 두껍다, 양이 많다. 좀 줄 여와라.’ 그랬습니다.

 

학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책을 줄였습니다.

왕이 보더니, ‘그래도 두껍다. 더 줄여 와라.’

 

또 학자들이 줄였습니다. 줄여오면 두껍다하고 또 줄여오라 그러고.

줄여오면 두껍다고 또 줄여오라 그러고.. 계속해서 반복했습니다.

 

계속 줄이다보니 나중에 딱 한 단어가 남았습니다.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했다는 이야긴데, 여러분, 뭐라고 쓰여 있을 것 같습니까?

 

거기에는 고난그렇게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고난이란 이야긴데 어떻습니까.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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