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주심의 놀라운 특권과 은혜 눅 19:5 출처보기 , 대강번역
Effectual Calling by C. H. Spurgeon 1856.03.30
이 설교의 영어제목인 Effectual Calling 은
한국어로 ‘효과적인 부르심, 효력 있는 부르심, 유효적 소명’등으로 번역하는데요,
용어가 생소해서 괜히 멀게 느껴질 수 었으므로, 그냥 알기 쉽게 '구원의 부르심'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 각자를 <구원으로 부르심>은, 다 <효과적인 부르심>인데. 아래에 그 내용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관련글
▲1. 구원은, 은혜의 부르심 입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 말은,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주님은, 은혜로, 그를 구원으로 초대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
본문의 삭게오를 보십시오. 그는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낙인 찍힌 세리였습니다.
그것도, 그 세리들의 두목 격인 ‘세리장 ’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와 창기 ’를 묶어서,
가장 큰 사회적 죄인으로, 요즘 말로 ‘공공의 적 ’으로서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삭게오가 살던 ‘여리고 ’란 도시도, 여호수아 때부터 저주 받은 도시로서
‘강도 만난 자 ’도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평판이 썩 좋지 못한 도시였습니다.
런던의 가장 우범지대 출신의 사람도.. 주님은 구원으로 부르십니다.
과거의 직업이 ‘도둑, 강도 ’도.. 차별 없이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느 나라, 어느 인종, 어느 지역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구원이, 우리 피부색, 우리 민족만을 위한 것인 줄,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모든 죄인을 다 구원으로 초청하십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구원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부르심 ’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볼 때 / 이웃 형제자매를 볼 때
이 ‘은혜의 부르심 ’을 기억하고, 항상 감사드리며
어떠한 인간적 차별을 가져서도 안 되겠습니다.
혹시 피부색이 달라도, 혹시 나이가 늙어서 외모는 쭈글쭈글해도
주님은 차별 없이 사랑하시며, 혹시 교만한 나보다 더 사랑하실 수도 있습니다.
‘공공의 적 ’ 삭게오를 부르신 것처럼요 !
▲2. 구원의 부르심은, 존귀한 부르심 입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걸터 앉은 삭게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고 부르셨습니다.
영어로 "Zaccheus, make haste and come down." 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 부르심입니다.
단체로, 그룹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삭게오 개인을 부르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와 주시고,
불러주신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요, 존귀함을 입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삭게오의 이름까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사도들이 그를 불렀어도, 꽤 영광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존귀하신 예수님이, 나를 불러주셔서, 내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성도가 된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개인적으로 나를 알아주시고,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존귀한 부르심인지요 !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 나를 부르신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 나를 알아 주십니다. 나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당신은 ‘개인적으로 ’ personally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특권을
놓치지 마십시오 !
오늘 주일 아침, 교회당에, 저 멀리 창턱에 걸터앉으신 분도,
혹은 회중석의 빽빽한 인파 속에 파묻혀 있으신 분도,
‘아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주님이 나를 알기나 하실까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 각자를 개인적으로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 개인적 부르심에, 여러분 각자의 반응도,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참 눈여겨 볼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대하시고,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부활 후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실 때,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실 때,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실 때,
세관의 마태를 부르실 때..
오늘도 주님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특권을 감사하게 여기고, 무한한 영광으로 받아들이게 되시기 바랍니다.
▲3. 구원의 부르심은, 급한 부르심입니다. It is a hastening call.
"삭게오야, 속히 서둘러라 "
보통 목회자가 어떤 분들을 전도하고 초청하면
사람들은 곧잘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음 번에 믿지요 !”
“형편이 좀 펴지면, 나갈게요 !”
심지어는 은혜스런 설교를 듣고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도
그 눈물을 닦으면서 이렇게 스스로 결심합니다.
‘아직은 안 돼, 내가 지금은 믿을 형편이 아니야 !’
마치 아침 안개가,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은혜를 조금 받다가도, 금방 세상 유혹을 따라가 버리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양심이 호소하는 죄악을.. 끊을 듯 말 듯 하면서도.. 끊고 돌아서지 못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Effectual Calling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Effectual Calling(효력 있는 부르심 )은, 예수님의 부르심이고,
사람들은 거기에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습니다.
너무 강력한 부르심이기 때문에, 마치 홀린 듯이 그 부르심에 응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구원의 부르심 / Effectual Calling(효력 있는 부르심 )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꼼짝 마 ’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같은 죄인도,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내가 어떻게 잘 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특별히 불러 주셨기 때문에..
내가 ‘꼼짝 못하고 ’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일 ’은 마귀가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히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today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예수님은, 삭게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고 명하셨습니다.
구원의 부르심은, 급한 것이고, 우리 또한 신속하게 거기에 응해야 합니다.
‘내일 하지 뭐 ’ 하다가.. 내일은 그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지옥에 간 그들은,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내일, 내일 ’ 하면서, 자꾸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 초청을 뒤로 미룬 자들입니다.
그렇게 ‘내일, 내일 ’하며 미루던 사람들은,
그 ‘내일 ’에, 뜨거운 곳에서 고통 중에 부르짖게 될 날이, 결국 찾아올 것입니다.
히 3:7. 오늘 today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러분, 깨어있는 신자의 특징은 ‘긴급성, 급박성 ’을 느끼는 것입니다.
대사명 Great Commandment 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도, 너무 느긋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부르심 ’도 급박하고
‘사명의 부르심 ’도, 주님의 명령은, 그 특징 중 한 가지가 급박합니다.
이제 우리의 반응이 문제입니다.
다행히 삭게오는, 주님의 급박한 부르심에, 급박하게 반응했습니다.
▲4. 겸손 케 만드시는 부르심
"삭게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려오라 ’는 말씀은, 겸손해져라.. 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주님의 부르심,
그게 언제나 사람 /주의 종들을 통해서 나타나지만요,
그 부르심을 받을 때.. 거만하게 굽니다. 그래서 오히려 전도자를 조롱하기까지 하지요.
특히나 전도자 /설교자가 ‘회개 ’에 관한 메시지를 전할 때면
자기 마음속으로 ‘너나 잘 하세요 ’ 하는 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릅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인줄 압니다. 그래서 늘 교만합니다.
‘내가 믿고 싶을 때 믿겠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의 부르심으로 부르실 때,
먼저 그를 겸손케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로 겸손케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겸손해야,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야, 복음을 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삭게오가 겸손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무 위에 걸터앉아서, 예수님을 눈을 아래로 깔고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청에 코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게오야, 속히 내려오라." 는 말씀은,
삭게오를 먼저 겸손케 만드시는, Come Down 하라는,
어떤 능력이 가미된 초청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구원의 부르심 ’ - 그 성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성격 중 한 가지는 ‘죄인을 겸손케 만드시는 부르심 ’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아닙니다.)
진정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그 특징이 겸손케 됩니다.
자기의 공로, 자기의 선행, 자기의 자랑, 물질 자랑 등을
고스란히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인간의 자기 공로를, 모두 내려놓고,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자연인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신비한 변화 가, 그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
교만하던 세리장 삭게오가,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으로 살던 죄인이, 자기에게 구세주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의 타락성, 자기의 사악함, 자기의 더러움을 자각함으로써
그 교만한 자리에서 내려와서.. 그 죄를 씻어주시는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랑 의 부르심입니다. Afectionate Call.
"오늘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어떻게 그 죄인의 집에 머무시다니요 !
생각하기에 따라, 그건 사자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삭게오는, 지금 변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게오를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실에 제일 불편해했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측근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신중하지 못하신 결정을 내리신 것처럼.. 그들은 수근 댔을 것입니다.
득보다 실이 많은 결정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해, 실족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만약 삭게오의 집을 방문하시더라도,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밤 중에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방문하시지..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사랑 ’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른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삭게오에게
‘내가 너희 집 마당 에 가서 잠시 머물겠다.’
‘너희 집 창문 밖 에서, 한 번 안을 기웃거리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집 안으로, 기꺼이 방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삭게오 집의 창문은, 아마 세금을 무겁게 징세 당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 번 봐 달라고.. 창밖에서 애타게 두드리던.. 그런 창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장 삭게오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가난한 고아들이, 그의 집 현관 앞을 기웃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게오는, 그들을 귀찮게만 여겼습니다.
삭게오의 집은, 정말 여리고 사람들에게, 악의 소굴로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집을, 정결케 해 주기 원하셨습니다.
이제 평화의 집으로, 사랑의 집으로, 만들어주기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부르심 ’입니다.
그저 사무적으로 구원만 나눠주시는 게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과 애정으로 품어주시는.. 그런 부르심입니다.
우리 각자가, 과거에 다, 그런 ‘사랑의 부르심 ’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가정을 찾아오기 원하십니다.
다만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사랑의 방문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 밖에 세워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정 방문.. 그 얼마나 영광입니까 ! 그 얼마나 특권입니까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를..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알아주시고,
개인적으로 방문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의 집이 오막살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의 집이, 각종 더러운 오물이 굴러다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문을 여시고, 여러분의 집 문을 여시고,
방문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을, 오늘 환영하시고,
그 놀라운 특권 /은혜 /사랑을.. 감사하십시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 하실 때,
손사래를 치지 마십시오. 그 부르심과 초청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진정 주님으로서 우리 가정에 좌정하실 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우애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존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집 안에, 기도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성경 낭독하는 소리가, 들리게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여러분의 가정을 다스리시는, 작은 증거가 됩니다.
성경이라도, 거실 중앙에 펼쳐 놓아 보십시오. 물론 읽으시면 더 좋지만요.
여러분의 집 중앙에,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차지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각, 그림, 그 외 다른 것이.. 그 집의 주인 되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분, 실제로 예수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좋지 못한 그림이나 책들은, 다 폐기해서 내다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먼지나 쓰레기도, 다 치울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실제로 자기 영혼을 깨끗이 청소하는 마음으로
집안정리를 종종 한다고 합니다.
더러운 환경에는, 혹시 주님이 방문하시더라도, 오래 머무실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영혼의 청소가 더 본질적이지만,
집안 청소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의 부르심 ’을 받고, ‘사랑의 방문 ’을 받은 삭게오는,
그 사자굴 같았던 그의 집이, 천사들이 깃드는 천국 가정으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6. 예수님은, 사랑으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동거 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의 육신은, 하루 방문하고 떠나셨지만,
예수님의 영은, 성령님은, 계속 그 집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강력한 설교, 강력한 부르심, 그걸 한 번 받은 사람은,
그 부르심이, 하루 만에 떠나버리지 않습니다.
그의 남은 생애 내내, 그에게 머무르고, 그와 동거 /동행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보통 ‘구원 ’이라 말하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 영원한 처소 ’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의 신부를 부르시고, 온전케 하셔서,
그와 함께 영원히 동행하시고, 동거하시는 것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근본 목적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는 것 ’,
‘거하실 처소로 준비 /성숙 /완성 되는 것 ’ - 그것이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십니다.
(우리가 축복받아 잘 사는 것이, 구원의 근본 목적이 아닙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 부르심 /구원 사역은, 주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을 영어로 보시면, MUST 가 나옵니다.
"Zaccheus, make haste, and come down; for today I must abide at thy house.“
부르시고, 신부 (거하실 처소 )를 만들어, 그와 영원히 동거하는 그 일을
주님이, 주도적으로, 반드시 MUST 하게 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순종이, 그 주님의 구원사역을 촉진시킬 수 있고,
끝까지 불순종하면, 주님의 그 구원사역이 지연되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부르심 ’이
그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부르심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부르심을, 감사드리며
또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이 그를 불러주셔서, 그를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늘 중보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 일화를 말씀드립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을 대학에 보내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시 아들이 대학에 가서, 세상에 빠지고, 방탕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권 사서, 아들 모르게, 그의 큰 여행가방 밑바닥에 넣었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와서, 성경책을 발견하고는 순간 화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예상처럼,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또한 대학의 분위기가
아들을 점점 더 세상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제 조금 남아있던 신앙마저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그 성경책을, 면도할 때마다, 한 장씩 찢어서,
면도기에 묻은 비누거품을 닦아내는 휴지로 사용했습니다.
면도는 매일 하는 것 아닙니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싫든 좋든 아들은
면도를 하면서, 면도칼의 비누거품을 성경책 종이에 닦으면서
성경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누적되고, 계속되니까, 아들은 점점 진리에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성경책은, 두께의 거의 절반이나 찢겨 나갔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대학 근처 교회에 나가서, 설교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했고, 십자가 아래서 용서를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부르심 ’을 마침내 받았던 것이지요.
삭게오처럼 !
.......................
※‘부르심 ’, 영어로 calling 인데, ‘소명 ’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1. 구원의 부르심과
2. 목회사역 / 또는 직업으로의 부르심으로.. 2 가지로 크게 나누기도 하는데요,
위 설교에서는
Effectual Calling 과 General Calling 으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General Calling 은,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기 원하시는 ‘일반적 부르심 ’이고,
Effectual Calling 은, 그 중에 특별히, 구원하기로 작정해서, 찍어서 부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삭게오 같은 이들 말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그 부르심에 저항할 수 없지요.
이 설교의 제목이기도 한 Effectual Calling 은
한국어로 ‘효력 있는 부르심 ’, ‘유효적 소명 ’이라 부르는 군요.
이런 신학용어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위 설교에서는 Effectual Calling 을
그저 ‘구원의 부르심 ’으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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