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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LNCK 2014. 10. 10. 13:17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15:31                  2014/07/13설교스크랩, 편집

 

전략

 

서론/ 큰 아들도, 동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이 분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생이 돌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고 그에게도 양심이 있고 그 동생인데,

그 동생이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돌아왔는데

그 동생이 돌아왔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이 분노한 정확한 이유는, 저렇게 방탕하게 살다가 아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잔치까지 베풀며 음악과 춤이 있는 잔치까지 베풀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죠.

그의 마음 속에도, 동생이 평생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을 거예요.

 

아무리 원수진 그 가족 관계라도 잘 되기를 바라지,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지, 안 되고 망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양심적으로!

 

이 맏아들도 동생이 나가서 잘못된 인생을 평생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을 거예요.

집에 돌아왔을 때 나름대로 안심을 했을 거예요. 좋게 보자면 말이죠. 또 실제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아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런 아들이 돌아왔는데 잔치를 베풀어? 그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거슬렸던 것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라고 여겨지는 거예요.

 

저렇게 속 썩인 아들이 돌아 왔으면 금식을 시키던지.

'내가 너를 받아주긴 하겠다만 너는 한 달 금식이다. 죽만 먹어라.' 그런다던지..

고생 좀 해 보아라. 왜 살찐 송아지까지 잡냐, 이 것이죠.

 

죄를 뒤집어쓰게 해야지..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만일 당시 세리와 죄인들을 단지 불쌍히 여기기만 했다면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분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자기들에게도 저런 사람들이 회복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너무 악하게만 보시면 안 돼요.

너무 저 사람들은 아주 그냥 새카맣게 악으로 가득한 사람이라고 보시면 안 돼요.

 

   우리도 한 순간에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오류에 늘 빠지고 있고

   또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셨다면

   우리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로, 얼마든지 비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탕자 같은 죄인이 잘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또 회당에서 그렇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회복할 수 있는 어떤 규정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사고에는 그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베풀며 기뻐하는 규정은 없었던 거예요.

 

세리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살찐 송아지를 잡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기뻐하고 잔치를 베푸는 그런 규정은

바리새인들의 규정에 없었던 거예요. 그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죠.

 

잔치까지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온 것에 감사하고 받아준 것에 너희들이 감사해야지

우리가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서 되겠느냐.

그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죠. 종교적 논리였죠.

 

큰아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종교적인 논리에 따른 분노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않은 거예요.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음악 소리가 들리고 춤을 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거예요.

 

여기서 어떤 큰 <반전>이 비유해서 일어나죠.

집을 나갔던 동생은 돌아와서 기쁨의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있고

집 안에 있던 큰 아들은, 집 밖으로 나가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큰 아들의 잘못은

1. ‘은혜의 법칙을 몰랐습니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요? 아버지의 은혜 때문이죠.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자 기쁨의 잔치를 베푸는

그 아버지의 은혜 베푸는 모습을 보고 맏아들은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 은혜를 잘못 베풀고 있는 것이다. 라며

아버지의 은혜를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은혜가 잘못 되었다는 거예요.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논리로 볼 때, 아버지의 은혜는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인과응보적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지금 아버지가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분노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깨닫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 하고 또 열심히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정말 깨닫기가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반전>되어 신앙생활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 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 큰 아들처럼 분노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거예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알았습니까.

그런데 한 순간 예수님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 논리였어요.

어쩌면 우리도 신앙생활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못하고

종교의 논리로 우리가 행한 대로 받는,

우리가 신을 감격시켜서 더 많은 것을 얻은 그러한 종교의 논리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주의, 공로주의, 보상주의,

내가 행한 대로 보험을 들 듯, 내가 신을 감동시킨 대로 신이 나를 축복할 것이다.

라는 종교적 논리로 우리가 살아갈 때

 

이렇게 방탕하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기쁨의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를 보고 '저 은혜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아버지의 기쁨이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에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그러한 종교적 분노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을지 몰라요.

 

큰 아들의 잘못은

2. ‘보상 심리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 보상 심리를 가진 신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예수를 그만큼 열심히 믿었는데, 왜 나는 새끼염소 한 마리도 주지 않느냐

시험에 드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 큰아들의 분노에는 또 다른 이유가 들어있었죠.

아버지의 은혜가 잘못 되었다는 그 생각 이면에 어떠한 문제가 있습니까.

본문 29~30의 말씀을 우리 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자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 노릇 하고 무슨 말씀이든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녀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은혜 베푼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생각 보다는

자기 자신을 종이라는 생각이 더 가득했어요.

 

또 아버지를 사랑함으로, 기쁨으로 지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마음이 가득한 마음으로, 종처럼 노예처럼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보다

아버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로 가득 찬 보상심리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지금 나는 받고 있지 못하다..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건 아들의 심리가 아니라, 그 집 종의 심리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한 만큼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주시지 않고 있다. 라는 생각이 가득하다면

바로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왜 나는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주시지 않는가?'

오늘 우리 주위에, 그런 생각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예배드린 것이 얼만데. 내가 새벽기도 나간 것이 얼만데.

하나님이 왜 나를 축복해주시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 아버지와의 교제,

아버지와 나누는 자녀로써의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종으로서 종이 행한 대로 주인이 보상해주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일본의 성서학자인 마파 미치오 라는 분이

이 큰 아들의 반응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아주 예리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큰 아들의 반응은, 자기 안에 가지고 있었던 억압된 부분이 표출된 것이다.”

자기 인격의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거예요.

가만히 말을 들어보면, 굉장히 억울해 하고 있죠.

 

저 동생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고 돌아왔는데.. 환영해 주는데..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못 살았다는 거예요.

 

뒤집어보면, 자기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참고

이 집안에서 열심히 일 했는데.. 나에 대한 보상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 안에서 일했던 것을, 억울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 잘못된 자화상으로 가득해 있습니다.

 

이 큰 아들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 생각 속에 갇혀있는 언어들이 많이 나와요.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죠.

아버지가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다.’

 

이 말만 들으면 참 굉장히 인색한 아버지죠.

그런데 만약에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친구들과 즐길테니

염소 새끼 한 마리만 주십시오.’ 그랬다고 하면 안 주실 아버지였을까요?

 

자기가 구하지도 않고, 친구들이랑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다고

아버지를 비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 아들을 굶겼을까요?

이 맏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서 식사한 것만 해도

염소 수 십 마리는 될 거예요.

 

지금까지 매일 식사하면서 먹었던 수 십 마리의 염소는 생각도 안하고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던져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왜 갑자기 아들에게 던져줍니까.

그렇게 자기 생각 속에 가득해 있어요.

 

큰 아들의 잘못은

3.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31,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너는 종이 아니라 나의 자녀다. 너는 나와 항상 함께 내 식탁에서 식사하지 않느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너는 일을 잘 할 때만 인정받는 내 종이 아니라

상관없이 나의 인정과 축복을 받는 보장 된 자녀다.

-그 기쁨과 특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불평불만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큰 아들의 반면교사 2. 아버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신앙 click- 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