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워셔 2013년 한국 사경회 1강 2/2 딤후3:13~17 인터넷에서 스크랩, 편역. 영어로 듣기
18분 36초~
◑딤후3:15절 *한글 녹음은 안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위 말씀을 보니,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성경 공부하기에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십니까? (디모데보다는 나이가 많습니다.)
자녀들이 성경공부하기에 어리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어린아이들은 무엇을 배웁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그저 교리문답식으로 배우고 있지 않나요?
회심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가르침 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노아의 방주에 관해 동화를 듣고 있습니까? 동물들을 색칠하면서 말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말씀을,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수년 전에 제가, 어느 날 페루 리마의 어느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페루의 선교사이고, 지금도 페루에 저희 선교센터(Heart-Cry)가 있습니다.
남미의 주류는 가톨릭인데, 그 중 일부는, 저희 같은 개신교 설교자를 곱지 않게 봅니다.
제가 걸어가는 길옆에, 가톨릭 전도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제가 한 장을 집어서, 읽어보았습니다.
그것은 가톨릭 신부가 쓴 것인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침례교도들을 조심하시오, 왜냐면 그들은 광적인 성경 추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신교를 비방하는 말이었지만, 뒤집어보면 꼭 듣기 싫은 말은 아닙니다.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과 달리, 성경을 그만큼 열심히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여러분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 한 번 현실을 적나라하게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매일 하루에, 과연 몇 시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계십니까?
혹시 토요일을 제외하면, 평일에는, 1시간도 채 연구를 안 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나요?
주중에는, 아예 성경책을 펴지도 않는.. 그게 오랜 습관이 된 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나요?
여기 젊은 청년들이 계시네요.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은, 장차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신학생들이지요?
목회자 후보생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 하루에, 과연 몇 시간 동안이나 성경을 연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심각하게, 그 연구한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서 살아내고 있습니까?
심지어 지금이 순간에도, 성경을 떠나서 세속적 잣대로 여러분의 장래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정말 그들이 비난하듯이 광신적인 성경 추종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적인 얘기이지만,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저는 아버지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온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계신 어머니들도, 하나님이 똑같은 명령을, 어머니들에게 주셨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마22:37절 말씀은
신명기 6:5절에서 인용된 것이죠.
그 신명기의 정황은..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자녀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정에서, 어떻게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자녀교육이 어렵고, 자녀의 신앙교육은 더더욱 힘들잖아요.
그렇게 가르치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가정에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그 말씀에 헌신적으로 살면.. 아이들은 저절로 보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7
이 말씀이 우리 자녀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그대로 못 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못 가르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다시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성경을 어느 정도 연구하십니까?’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한국 크리스천 여러분은, 여러분을 지도할 특별한 선지자를 찾지 마십시오.
하다 하다 안 되면, 맨 마지막 카드라면 몰라도, 무슨 예리한 선지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날마다 집에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여러분 가정에서부터
여러분이 직접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선지자가 아니라요.
여러분은 정말로 여러분을 바쁘게 만드는, 그래서 성경을 연구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성경을 못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빠서 시간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개인기도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준비한 말씀으로, 가정과 강단에서 강력하게 선포하십시오.
그걸 놓치고, 다른 데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시 디모데후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딤후3:15b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가장 유일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전체의 목적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본문에선, 성경의 목적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죄인이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는 설교도.. 언제나 구원을 목적으로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칭의 구원’을, ‘구원의 완성’으로 보는 <구원론의 오류>로 인하여,
‘구원 다 받았다’는 가정 하에, 다른 내용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근본 목적과 다른 거지요.
▲어떤 목사님은 ‘전적 타락’에 대해 많이 강조해서 가르칩니다.
이 교리가 왜 그렇게 중대합니까?
빌게이츠가 누군지 잘 아시죠? 돈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느 날 아침에, 빌게이츠에게 약간의 치킨샌드위치를 아침식사로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 샌드위치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빌게이츠가 쳐다볼 것입니다.
‘나는 그게 필요 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나는 그걸 파는 레스토랑을 통째로 살 수도 있어요.’
자기는 큰 부자라서, 제가 주는 그 사소한 치킨샌드위치를, 별로 고맙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가난한 동네에 한번 가봅시다. 정말 가난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치킨샌드위치를 아침식사로 줍니다.
그 사람은 갑자기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격해서 울 것입니다.
그 샌드위치를 받아듭니다. 삼켜봅니다. 그리고 내 손에 키스할 것입니다.
온 동네방네 가서, 내가 한일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입니다.
전적 타락을 인식하는 가난한 사람에게만.. 복음이 감격스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부요한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습니다.
여러분 저 폴 워셔도, 왜 죄에 대해 종종 설교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물질의 축복과 행복한 삶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제가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합니다.
‘나는 그런 물질적 축복이 중요하지 않아! 나는 구원받았고, 내 죄는 사라졌고, 지옥에 가지 않아!
그렇다면, 더 행복하기 위해, 내게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나의 모든 것을 다 빼앗겨도, 나를 감옥에 보내도, 내 혀를 자르고, 매일 나를 때려도,
그래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누구보다 행복한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영원히 구원 받았고, 영원히 지옥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제가 구원에 대해 설교하고 난 다음에, 어떤 목사님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복음에 대한 설교를 마친 다음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용서, 사죄.. 등에 대해 설교한 직후입니다.
아마 페루의 목사님들이 제 앞에 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폴워셔 목사님 너무 실망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정말 엄청난 위대한 설교를 할 줄 알았습니다.
우린 정말 우리들에게 깊은 것을 말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저 우리에게, 우리가 다 아는, 쉬운 복음 같은 것을 설교하고 계십니까.’
나는 심지어, 그 목회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제 삶을 되돌아볼 때에, 나의 삶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더럽고 죄악 스러웠는지 기억하곤 합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성경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에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 사실 fact 하나로 충분합니다! http://blog.daum.net/urmymt/1302
물론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도와주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친절하신 분인지에 대해 감사해야합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에 축복의 요소가 있다는 점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해야 될 보화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해서 점점 더 깊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위대한 목적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
◑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감동(영감)이란, 하나님께서 그 글자에 숨을 불어넣으셨다.. 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고, 다른 어떤 책에서도, 이런 사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설교자에게도, 성경만큼,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진 않았습니다.
매우 실제적으로 한 가지를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이 질문을 해 보십시오.
설교자가 그날 설교할 본문을 읽은 다음에,
얼마나 자주 그 설교자가 읽은 본문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본문을 한 번 읽은 후에, 본문을 벗어나 다른 얘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까?
설교자가 본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가르쳐 주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잡다한 얘기나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가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떠오른 예언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설교시간에, 정말 시시때때로 본문말씀으로 돌아가는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말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유익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잠시 살펴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경배 찬송을 듣는 것도, 유익합니다.
또한 좋은 경건 서적을 읽는 것도,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해서 설명하는, 다른 관련 서적들에 대해 읽는 것도 유익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 유익한 일이지만,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덜 유익합니다.
아주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성경 전체를 읽은 사람이 몇 분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정말로 성경전체를 읽었습니까, 몇 번이나 읽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가장 중대한 한 가지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기위해, 이 자리에 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아마 여러분은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폴 워셔도 그냥 평범한 설교자일 뿐이네, 별거 아니네.’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설교자’가 아니라, 성경책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영감된 말씀인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성경적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를 찾으십시오.
우리에게, 성경을 읽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페루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약 25시간 정도 걸렸을 겁니다.
그 시간 내내, 저는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한 숨도 못 잤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장 첫 번째 했던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설교할 메시지를 준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는, 제가 평소에 읽고 있는 성경을, 또 계속 읽는 것입니다.
2천년 역사에 가장 중대한 신학자 중에 존 칼빈이 있습니다.
신학 정립 뿐 아니라, 주석서 저술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그가 제네바에서 설교할 때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몇 년 동안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의 도시 지도자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이 바로 존 칼빈을 제네바에서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성경 구절구절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칼빈을 내쫓았습니다.
수년 후에,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다시 제네바로 초청했고, 칼빈은 다시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추방당하기 직전에 했던 그 말씀에, 바로 이어서, 다시 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역사를 통해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개혁가 innovator 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메신저 communicator 들이었습니다.
그들 메신저들은 무슨 메시지를 전달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는 메신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어떤 상상이나 꿈에서 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었습니다.
▲본문은 ‘성경은 유익하다 profitable’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의 설교가, 회중들에게 반드시 ‘유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럴만한 지혜를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중생할 때도,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만한 지혜를 동반한 채, 중생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저 새로운 마음 new heart, new nature으로 중생했습니다.
그 새로운 마음은, 성경적 지혜를 갈망하게 됩니다.
중생할 때, 타고나진 않았지만,
변화된 심령은 어떤 갈망, 배고픔을 갖고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찾게 되는데,
그 지혜의 근원이, fountain 샘이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도, 성경에 의해서 계속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 가르침을 받지 않는 다면, 그 결과는 참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건하게 살기위한 모든 교훈들이, 바로 이 성경 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러나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성경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그 유익을 얻을 뿐입니다.
▲이 자리에 미혼청년들은 손들어보십시오.
잠언 31장을 얼마나 읽고 공부하십니까?
남자 형제님들 가운데 대다수는, 한 번도 개인적으로, 잠언 31장을 깊이 연구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혼 자매들 가운데, 잠31장의 현숙한 여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해 본적 있는 분은, 손들어보십시오.
현숙한 여인에 대해 기록한 잠언서 31장은,
대부분 여자들이 관심을 가지며,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젊은 남자들은, 잠31장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잠언31장은 본래, 젊은 남자들을 위해 기록된 성경입니다.
잠언서 전체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물론 딸도 거기에 포함되겠지만요.
여러분 나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성경 안에는, 정말 우리가 공부해야 하지만, 우리가 공부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삶을, 성경에 기초해서 세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 3사람의 유명한 설교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존 칼빈, 찰스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세 분이 다 합쳐도, 여러분을 가르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회중들 “아멘”)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성경은 개인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온 세계를 돌면서, 뭔가 새로운 말씀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설교자의 말씀을, 자기 자신 안으로 축적시키고 있는데요,
그러면서도 정작 성경은 열심히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먼저 성경을 읽는데 헌신하십시오.
▲1. 교훈과 for teaching
그리고 남자들은 성경을 교훈 teaching 하기를 열망하십시오.
비이성적인 설교자들이 어떤 ‘교훈’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경말씀을 티칭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훈하는 것은, 개인적 비전과 환상 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강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든 일에 있어서, 성경은, 가르치기에 for teaching에 유익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가르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책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 책망과 for rebuking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입니다.
왜냐면 성경은 내 생각과 말에, 항상 동의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지적해 줍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책망'해 줍니다.
심지어 우리 목사들도, 잘못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날 때부터, 무슨 지혜를 가지고 태어난 자들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는 옳은 것 같아보여도, 필경은 사망의 길일 수 있습니다.
육신적인 것들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성경말씀을 들으십시오. 성경이 우리를 책망하고, 바르게 해 줍니다.
여기서 ‘책망’이라는 단어는 무슨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나라의 법을 어기는 범죄를 지었을 때
검사는 그가 위법한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는 자기 범행을 부인합니다.
그러면 검사는 이 증거, 저 증거를 계속 제시합니다.
그래서 그의 범죄가 입증될 때까지 계속 증거를 제시합니다.
re-proof (계속 증거를 들이댐), 그게 바로 ‘책망’의 원어적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교만’과 싸우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느 날 여러분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너는 어제 너무 교만 했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교만하지 않았다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경을 읽다가,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구절을 무시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구절이 ‘너는 교만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성경은 계속 나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를,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설교의 목적과 동일한 것입니다.
신자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정말 ‘책망’이 스스로 일어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사악한지 아십니까?
우리 마음은 늘 말씀으로 책망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의 중대성’에 대한 이런 설교를, 2시간도 더 설교할 수 있습니다.
듣는 여러분도 계속 ‘아멘, 아멘, 아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고 나서도 ‘정말 엄청난 설교였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지난 3주 동안,
단 한 번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하루에 단 5분 동안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은 자기가 연구하지 않고
집회만 좇아다니는 것이, 무슨 큰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폴워셔 목사님이 지금 내 얘기를 하고 있네.’
라고 생각할지모릅니다.
맞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게으른 습관을, 이제 당신은 그만둬야 합니다.
앞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3. 바르게 함과 for correcting
성경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성경말씀은 우리를 책망합니다.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성경은 우리를 다시 고쳐줍니다. 교정해 준다는 뜻이죠.
성경은 우리를 검사와 같이, 정죄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의사와 같이, 동시에 우리 영혼의 질병을 고쳐줍니다.
여기서 ‘바르게 하다’의 헬라어는,
어떤 것이 휘어져 있습니다. 그걸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만약에 어떤 군사가 행진하다 넘어졌다고 합시다.
그럼 다른 군사가, 그가 바로 서도록 즉시 도와줍니다.
따라서 성경은 ‘너는 잘못 되었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 길로 행하라. 이 길이 바른 길이다.’
특별히 사도바울의 서신서들이 이것을 잘 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옷 벗듯이 벗어버려라. 예수님을 옷 입듯이 입어라.
세상을 추구하는 것을 멈춰라. 마음의 변화를 받아라.’
‘네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라’ 이게 다 '바르게 하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4. 의로 교육하기에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유익합니다.
성경은 가르침과, 책망과, 바르게 할 뿐만 아니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 성경에 ‘교육하기에’라고 했는데, ‘훈련 training하기에’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훈련입니까? 올림픽 금메달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요
‘의를 위한 훈련’입니다.
성경말씀은, 여러분의 육신적인 꿈을 성취하기 위한, 가이드북 road-map 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주 특별하고도 특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건 당신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의로 교육/훈련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의’라는 것은 헬라어로 ‘곧다, 올바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곧은 표준에 맞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는 법적인 지위를 얻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변화된 심령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갈 때에
우리의 갈망은, 좀 더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의요, 우리 삶의 표준(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쓰임 받을 것인가의 차이는,
여러분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의로운 삶을 사느냐.. 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항상 이러한 말을 하고 다니는, 설교자를 한 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를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걸 못 보여주고 있다니까요.
저는 설교자입니다. 이것은 나의 소명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즉 설교자로서의 내 존재감이, 또는 설교를 잘 하는 것이
나의 강렬한 열망이 아닙니다.
저의 가장 강렬한 열망은, 제가 그리스도를 더 친밀히 알아가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과 그 아름다움을, 더 심도 깊이 탐구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앎으로, 그래서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한 때, 아주 유명하고 중요한 어떤 설교자를 친하게 알고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설교자를 만났을 때, 그가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제 마음은 크게 실망해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권세를 휘둘렀으며, 참 겸손이나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저는 아주 유명한 다른 설교자들을 만났는데요,
그런데 정말로 제게 격려가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친절하고 겸손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제가 황송하게 느낄 정도로 대우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나의 발을 씻겨주려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기뻐 외칠 것입니다.
만들어낸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서 쳐다봐야할 모습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겸손, 진리.. 이런 성품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고, 중요한지도 모르고,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게 경건한 삶을 사는 '능력'이 아니라면..
성령의 열매를 반영하는 '능력'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하게 걸어가는 '능력'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집회 한 주간을 멋지게 사용해 주시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소망하는 것은, 이번주간에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여러분의 열망을 부셔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목사님들을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성령 하나님’이란 주제에 대해 6주 동안 설교했습니다. 저는 설교하고 또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초청 설교자 한 분을 모셨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많은 성도들이, 그 초청받은 설교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오늘 엄청난 설교였습니다. 이전에 이런 설교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거기 옆에 서 있다가,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난 6주 동안 이것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는 한번밖에 설교하지 않았는데, 그런 설교를 들어 본적 없다고요?'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모습입니다.
목회자들은 자기 고향에서, 약간의 존경만 받을 뿐입니다.
제가 소망하기를, 이미 이교회에서 무수히 들었던 설교들을, 제가 다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 일부는, 제가 설교한 이 내용들을, 이미 들어본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이 예배당을 나가면서,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지 않았던 내용을
폴워셔 목사님이 말씀해 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폴워셔도, 그저 우리 목사님과 별다를 거 없는 설교를 하는구나.’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목사님의 평소 설교가, 그렇게 중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폴워셔가 중요하지 않고, 성경이 중요하고, 예수님만이 높임 받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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