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을)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1:3, 살전1;1~10 출처보기
Receiving the Holy Spirit By David Wilkerson Sep. 13, 200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1:3
◑서론
▶수년간, 저는 제가 성령충만에 대해 설교해 왔습니다.
저는 제가 성령으로 세례 받았음을 고백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성령께서 제가 증거하도록 권능을 주시고, 나를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왔고, 성령님과 이야기해 왔으며, 성령 안에서 걸었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일에 민감했었습니다.
저는 진실로 성령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제가 8살 때 성령으로 충만해졌던 장소를, 데려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어릴 때의 나의 눈물과,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의 울부짖음을 기억합니다.
저는 제가 받았던 놀라운, 주님이 주신 환상들을 떠올립니다.
그 환상을 본 경험으로, 저는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한층 더 뜨겁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성령님은 나의 친구가 되셨으며, 친밀한 위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이 성령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오순절에 대해 설교했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할 필요에 대해 가르쳤으며,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에 대해 설교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령께서, 나를 통해,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최근 저는, 제 자신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진실로 당신의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저는 내 안에 사시는 놀라운 권능을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은 저에게 있어서 단지 교리일 뿐입니까?
혹시 제가 요즘 성령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가요?
성령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뜻대로 행하시도록, 제가 기도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즘, 성령님을 무시하고,
내 일을, 내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요?”
사실 여러분은, 무엇인가 매우 가치 있는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것(성령님)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르니까요.
작은 농장에서 자기 일평생 일한, 어느 농부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그는 자갈밭을 경작하며 가난하게 살았고, 결국 불만족 가운데 죽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그 농장은 아들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밭을 갈면서, 마치 금처럼 보이는 어떤 금속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감정하였고 그것은 순금이라고 판정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곧 그 농장이 금으로 가득 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시, 그는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는, 그의 아버지에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일생 동안, 금광이 그의 땅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성령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모르는 채로 살아갑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평생 그들이 성령을 지녔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과 권능으로서의 그분을, 진정으로 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이 땅에 보내진 그 목적을
자기 삶에서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저는 성령의 표적, 현상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어떤 신자들은 오직 그들이 문제에 빠졌을 때에만 성령을 찾으며,
그 결과 성령의 표적, 기적이 나타나, 자기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그분이 내려와, 문제를 확 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문에서, 그것은 성령에 관하여 진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성령님은, 마치 우리 안에 보물을 지닌 것과 같습니다.
“그의 신성의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물로) 주셨으니..” 벧후1:3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은 바리세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 서 계시는데”(요1:26)
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육신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권능과 영광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즉 본문 벧후1:3절 말씀에, 그들은 해당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그처럼 오랜 시간을 있었는데 네가 나를 모르겠느냐”(요14:9)
저도 여러분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음을 증거해 왔습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아마 이렇게 말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빌립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너와 이 모든 세월을 함께 있었는데, 정말 네가 나를 모르느냐?”
◑1. 저는 가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바울 시대의 신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무엇인가가 빠진 듯이 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큰 고통에 맞닥뜨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가혹한 시험과 힘든 시간들, 삶과 죽음이 달린 핍박들을 견뎠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압박/핍박에 울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쉽게 주저앉는다는 뜻이지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그들의 소유한 모든 집과 재산을 잃는 것을
견디고 인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신자들은 그런 압박으로 인하여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힘이, 성령의 능력덕분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너희가 성령의 기쁨으로 많은 환난 가운데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살전1:5~6
Ye having received the word in much affliction, with joy of the Holy Ghost!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참된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압제에 직면하였고, 그 시대의 다른 누구보다도 더욱 고난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제가 가늠할 수도 없는 압박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분명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 어려운 시기 동안 시험 받았을 것입니다.
마귀는 분명히 그 가정들의 가장 약한 것들에 공격하여, 온갖 문제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은, 믿음을/사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험에 의문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신자들의 지체 가운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화젯거리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멀리 또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게 여기며 감동토록 하였습니다.”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이 그리스도인들은 진정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궁금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알았을까요? (기쁨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엇이 빠진 것입니까? (성령의 기쁨이 빠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험과 고통의 시간에 성령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2. 교회 역사상, 지금처럼
이토록 많은 신자들이 낙심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제 모든 사역의 시절에,
저는 이렇게 많은 신자들이 여러 고통 아래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요즘 같은 이러한 때는, 제 생애에 결코 없었습니다.
가정들이 재정적 위기에 처하며, 결혼생활의 고투를 견딥니다,
자녀들의 반항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지금 바로 세계의 도처의 목사님들은, 이제 거의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그 사역에 지쳤고, 거의 열매를 보지 못하고 있기에, 마음이 늘 무겁습니다.
또 그 사모들과 자녀들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모든 나라에서, 목회자들이 매년 수 백~수 천 명씩, 사역을 그만두고 있습니다.
어느 큰 오순절 교파의 지도자가 최근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 주위에 목사님들이 수없이 떠나고, 수십 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 우리가, 사역자들로부터 받는 전형적인 편지가 있습니다.
“저는 괜찮은 크기의 교회의 목사입니다.
그러나 저의 사역들은 너무나도 무슨 성취가 되는 것이 없어서,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돌파구가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저는 제가 왜 이렇게 불안초조 한 건지,
심지어 제가 뭘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제가 지금 마냥 불안해하고만 있다면, 제가 고쳐야할 점이 무엇인가요?”
▶저 윌커슨은, 아들 Gary와 함께, 세계의 목사님과 사모들의 모임에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그 모든 곳에서 만연한 절망을 봅니다.
대부분의 가난한 나라의 목사님들은 그들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세상의 직업을 갖고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가족을 부양하거나, 목회사역에 필요한 비용도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그의 빈곤이 점점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의 선발팀은 매우 가난한 나라의 목사님들과 만났습니다.
그 모임에 여러 교파의 목사님들께서 참석했습니다.
우리가 비디오테이프 프레젠테이션이 시작한지 몇 분도 안 되어
그들은 흐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광경은, 우리 팀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게 하였습니다.
그 낙담한 목회자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낙담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목회에 거의 열매를 보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재정도 없습니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와서 설교한다고 해도,
저와 우리 교회 신자들은, 그 집회에 참석할 시외 교통비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가족의 필수품조차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은 힘들고, 괴롭습니다. 우리는 자살을 많이 목격합니다.
특히 젊은 신자들 가운데서 말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팀은, 이 사역자들이 우리집회에 다닐 수 있도록 전세버스들을 빌렸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 여관에서 숙박할 처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회 장소 바깥의 텐트 속에서 야영하였습니다.
작년에 한 남미 사람은, 우리 집회에 오기 위하여 10시간을 여행하였습니다.
그는 되돌아갈 길의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팀은 기도하였고, 그에게 1천달러를 주도록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 목사가 이것을 들었을 때, 그는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우리 1년 치의 보수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물론 풍요한 나라인 미국에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스트레스입니다.
미국인에게는, 자기 미래와, 현재 직업의 안정성에 관한 불안이 만연합니다.
어떤 가정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이는 직장과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사람들은 이런 절망에 함몰되어 쓰러집니다.
저는 목사로서, 크리스천들이 많은 곤란거리에 직면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아버지들과 남편들은, 실업이나 박봉으로 인해, 사기가 꺾이고 있습니다.
언제나 어깨가 축 쳐져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고, 부동산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빚은 점점 더 늘어갑니다.
다수의 노인들은, 약값 및 의료비를 댈 수 없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공허한 약속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필요를, 이 모든 옥죄는 고통을 바라볼 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주님, 이런 현실에서, 제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고통 받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치유하기 위하여, 어떻게 설교를 해야 됩니까?"
사람들은 몹시 고통을 느끼지만, 단지 상투적인 말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곧 쨍하고 볕들날 올 거에요” 라는
인간적인 동정심의 얄팍한 메시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한 동정이나 격려의 말,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살인적 역경과 고난을 견디는 자들에게, 반드시 힘을 주며 다가오십니다.
◑3. 말세가 될수록, 사탄이 전쟁을 강하게 일으키므로,
성도들이 고통 받는 것입니다.
▶그 고통, 절망 그리고 고난들을 숙고할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탄의 공격 때문이야.”
곧, 저는 “(사탄의) 성도들에 대한 전쟁 War on the Saints”이라는 메시지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계시록에는, 사탄이 ‘짐승’이라 불리는 존재에게, 어떤 권세를 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가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기는 권세를 받았으며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더라.” 계13:7
제가 그 상징적인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거야,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고통 받는 이유야,
그것은 짐승의 권세 때문이야,
그것이 온갖 빈곤, 그리고 모든 가정과 결혼생활의 문제 배후에 있는 거야.
광포한 용이, 사악한 정부에게 권한을 부여해 주었어,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용의 사주를 받은 특정이익단체들과 연합하고,
그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마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우리 사회에 강요하고 있어.”
“이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전격적으로 대적하는 전쟁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안의 신뢰를 잃도록 만들며
그들의 믿음을 압살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신자들의 믿음이 침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은 벌써 정복당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난파선처럼 파선한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낙담하였고 끝내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둘러볼 때, 이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악마는 그의 입에서 부정(더러움)의 홍수를 토해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해, 고통의 범람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들이 그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흑암의 지배자들이 잡을 ‘권세의 때’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뜰에 끌려 나왔을 때, 그는 그를 사로잡은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의 때요, 또 흑암의 권세니라." 눅22:53
희랍어 의미로 여기의 ‘때’란 짧은 시기를 뜻합니다.
그 흑암의 때에, 짐승은 베드로를 잠시 압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사탄이 너를 타작하듯 까부르고, 시험하기 위해 네게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께서 진실로 물으신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 흑암의 때는 올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에게 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 위에 말이다.
나는 그 때에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나, 나의 영은 여기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고난 동안에, 너희를 붙들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는 것이다.
그 분은, 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심령 안에 거할 것이다.
그렇다면, 흑암의 때가 왔을 때에도, 너는 나를 믿겠느냐?”
◑4. 사탄도 자기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탄의 마지막 권세의 때’의 서막(시작)을 보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전 지구를 덮을 마지막 짙은 어둠의 때에 관해, 우리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짧은 시기 동안은,
마치 사탄이 모든 전선에서 승리하는 듯이 보일 것입니다.
(사탄도, ‘자기가 이기는 때/자기 때’가 있다니까요. 잠시 동안에는요!)
지금도, 그러한 어둠의 불길한 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미국은 더욱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듯이 보입니다. *2004년 설교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가정에 음란물들을 쏟아놓습니다.
우리 사회를 뒷받침, 지탱해 주던 제도들은 부숴지고 무너지는 듯합니다.
최근에 결혼제도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이 전선에서, 모든 도덕적 구속을 내동댕이치면서
마치 마귀와 지옥이 승리를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비극적인 것은
사탄이 교회를 패배로 떨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에 ‘죽음의 영’을 던졌고, 수많은 사람들은 울부짖습니다.
“저는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는 모든 곳은, 불도 없고, 회개도 없으며, 영적으로 죽어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이빗, 형제님, 너무 암울하게 말씀하시네요,
그런 언사는, 상황을 더 절망스럽게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사탄은 단지 ‘짧은 때’만을 부여 받았을 뿐입니다.
사탄이 이기는 ‘자기 때’는, 길지 않습니다. 곧 주님의 재림이 닥치니까요!
그래서 그가 지옥으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끌어오고 있는 이유입니다.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보고 있는 어떠한 사악한 것도, 놀랍게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아뇨, 그분께서는 처음부터 그의 모든 백성을 위한, 적재적소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계획을 창조 전에 구상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계획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승리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어둠을 정복하고 몰아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빛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흑암에서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으며’ 사9:2
마찬가지로 요한도 선언하였습니다.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1:5
여기서 ‘빛’은 이해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빛이 보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제 알겠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보십니까?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려고 하십니다.
의기양양한 악마를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계시를 받기 위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힘은 모든 지옥의 귄세보다도 더욱 크십니다.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심이라’ 요일4:4
우리는 빛으로, 눈이 열려서, 그런 승리의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지옥이, 엄청난 권세를 지닌 전갈과 황충들을 내뿜는 것에 대해 읽습니다.
우리는 용, 짐승, 뿔 가진 생물, 그리고 다가오는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피조물들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합니다.
사실 우리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그리스도나 짐승의 표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계십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서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즉, 성령님은 바로 이 순간, 우리 안에 살아 계신 것 입니다.
▶그럼, 우리의 힘겨운 시간의 한 가운데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실까요?
그분의 힘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짐을 부담하시는 자로서 받아들일 때에야 발휘됩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품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짐을 그분께 내어 드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영광 속에 잠겨있으신 것이 아니라,
여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상황, 또 고난까지도 맡아 다스리시기를 열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계속 두려워한다면,
즉 자포자기하거나 의심하며, 더욱 근심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위로자, 돕는 자, 인도자, 구원자
또는 내 힘의 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반박하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할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보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증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성경을 인용하는 것입니까?
단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증거’의 일부분입니다.
즉, ‘증거’가, 성령사역의 전부는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증인은, 그의 모든 짐을 성령님께 던져드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신자는 주변에 압도하는 모든 문제들을 보지만
주님의 기쁨을 지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그의 위로자, 그를 고난 밖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써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는 잃어버린 세계를 향한 강력한 증거를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둠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보고, 세상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빛을 보았어!”
그런 그리스도인이 진정 성령을 지닌 “received”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으로, 그가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단지 풀이 죽은 신자는 ‘증거 testimony’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의 삶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 위대한 사도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1:9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힘에 지나도록 압박 받았고, 괴로움 받았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삶을 포기하기 까지 했습니다.
빠져나갈 길 없어서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바울이 그의 긴박한 상황을 바라 봤을 때
고통, 문제, 배고픔, 핍박, 추위, 헐벗음, 투옥, 육체의 가시, 걱정,
교회에 대한 근심, 그의 삶에 음모와 공격에 대한 그의 반응은
“이것이 끝이야, 빠져나갈 길은 없어.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볼 수 있는 단 한가지 답은, 내 자아의 죽음이야.
이 시험의 유일한 탈출구는, 이런 기회로, 내 자아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거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모든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도로 그 자신을 의지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단지 성령이 그를 구하기를 완전히 신뢰하도록 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엡6:13
본질적으로 이런 말입니다. “너는 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다하였다.
너는 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제는 네 자신의 한계에 와 닿았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하게 하라.
그분께서 너의 구원을 이루시리라. 네 안에 사시는 성령으로!”
바울은 “아, 나는 이것에 하나님을 신뢰하겠어” 라는 소극적인 탄식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도 무력하고, 가망이 없어서,
여러분이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결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이 가망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 나를 구하실 수 있어.
오직 그의 영이 완전히 새로운 구원의 길을 소생시킬 수 있는 거야.”
◑5. 바울은 성령의 권능을 신뢰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환란을 겪는 여러분도, 성령님, 더욱 그분을 알아 가십시오!
▶“그 분께서 우리를 그처럼 극심한 사망에서 구해 내셨으며 또 구해 내고 계시니,
그 분께서 여전히 우리를 구해 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그 분 안에 가지고 있노라.” 고후1:10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가망 없는 상황에서 구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나를 구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모든 내 고통에서 나를 계속 구해주실 것입니다.”
제가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떠한 감정적인 징후로써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성령의 감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히 믿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란 뜻이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잠잠히 계속 자라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성령을 받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을 받는 것이란, 그분의 구원의 권능, 그분의 짐 지심과,
그분의 예비하심에 관한.. 계속해서 늘어가는 빛(이해)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두에 인용한 본문 베드로의 말을 다시 말씀 드립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1:3
베드로에 의하면, 성령의 신령한 권능은 감동으로써 오지 않습니다.
먼저 그분은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써” 오시는 것입니다.
......................... 더 읽으실 분 (길어서 후략) .....................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으니’ 요1:16
더구나, 그분께 완전히 위탁하기 전에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완전한 통치권을 드리지 않았다면
단지 우리는 그분을 받은 게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보살핌 속으로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야만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19장에서, 우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롯과 그의 가족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도시, 소돔에 심판이 떨어지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롯은 이 주님의 메신저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문을 열었고, 그들은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온 가족을 구할 하늘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천사들을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롯의 아내는 그녀의 삶에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그녀의 남편에게 소돔을 떠나야 한다고 강권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내 멋진 집을 떠나기 싫은데, 내 가구들, 내 친구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일 리가 없어, 나는 주님이 심판을 늦추시도록 기도 할거야.
그분은 나를 위해 기적을 베푸셔야만 해.”
결국,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족들을 강제로 소돔 밖으로 끌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도망하는 동안 그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살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롯의 부인은 뒤돌아보다가
죽어 소금기둥으로 변하였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를 원한다면,
그 주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분의 구원을 구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기꺼이 따라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령님은 그분의 권능을 의심꾼들을 구하기 위해서 쓰시지는 않으십니다.
불신은 그분의 사역을 망칩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를 만들어 내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길이라면 말입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은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계획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기꺼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이끌고 인도하시도록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진 모든 짐을 갖고 그분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 강권합니다. 기도하러 가서, 여러분이 직면한 모든 위기를 대십시오.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 저는 이 상황을 당신께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권능이 제 안에 거하심을 신뢰합니다.
나는 이 문제 때문에 잠을 잃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그리고는 믿으십시오!
단지 여러분의 상황에서 눈을 떼십시오. 네, 도처에 어둠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빛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으로 이겨내도록 하실 것을 기꺼이 신뢰하시겠습니까?
여러분께 주어진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 분께서 우리를 그처럼 극심한 사망에서 구해 내셨으며 또 구해 내고 계시니,
그 분께서 여전히 우리를 구해 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그분 안에 가지고 있노라.” 고후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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