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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모음 16

LNCK 2014. 10. 27. 10:55

묵상글 모음 16                                모두 가톨릭 글에서 스크랩

 

 

 

 

1. 성숙한 크리스천           4:13~15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4:13~15

 

저는 한 때 수도자의 양육을 담당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숙한 프란치스칸 수도사로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때 제가 성숙한 사람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뚜렷한 자기 인생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2) 인생의 목표에 따른 가치관 확립이 되어 있는지.

3) 목표와 가치 성취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4) 자유와 책임의 조화

5)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 사이에서 인격적 통합을 이루고 있는지

6) 목표와 가치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있는지

 

더 세분할 수 있지만

이렇게 크게 6가지 기준에서 성숙을 판단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인간의 기준이라면

성숙한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 기준입니다.

 

그것을 오늘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름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가 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우리의 가치가 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그리고 굳건히 지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두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오늘 에베소서가 가르치듯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고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내 삶의 의미

 

삶의 의미는 삶을 견뎌내는 힘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으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0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제 심금을 울립니다.

비단 사도 바울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에게 <그리스도는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제 사제서품 25주년을 맞이해서, 위의 성구를 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는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늪이', '삶의 블랙홀'입니다.

 

내가 문제라면, 그리스도는 답입니다.

바로 자기연민의 내 속에 빠져들 때.. 우울증 및 자살의 지옥이요,

나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를 향할 때.. '참 나'의 의미 충만한 자유로운 삶입니다.

 

삶의 의미는, 참 나의 발견은.. 평생 신앙성장 과정을 통해 부단히 계시됩니다.

끊임없이 찾아야 발견되는 삶의 의미요, 참 나의 발견입니다.

 

바로 여기서 필수적인 것이, 늘 기도생활입니다.

늘 기도할 때, 사도바울의 청원이 나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당신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사시며,

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신비, 인간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깨닫게 되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게 됩니다.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바오로의 기도의 비전이 얼마나 장대하고 웅장한지

우리에겐 좋은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백수를 누린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13:1~9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좀 더 나이 들어서라든지,

언젠가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부터 주님의 날을 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어떤 노력이,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데, 가장 적합한 노력이겠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 진보를 위한, 일상의 꾸준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먹어감과 더불어 더욱 신경 써야할 부분은, 영적인 크리스천이 되려는 노력입니다.

영적인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의 연륜이 쌓여감과 동시에, 점점 세상만사에 보다 초연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분개하지 않고, 결국 다 내려놓고 떠나갈 것들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안녕도 영혼의 건강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영혼이 자리를 잡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지나치게 육신에만 모든 관심과 정신을 투자하는 삶,

영혼과 육신 사이의 조화가 전혀 이루어지는 않는 삶의 최후는.. 비참하기만 합니다.

 

완벽한 건강관리와 적절한 영양섭취로 단 한 번의 큰 병치레하지 않고

90세까지 잘 살았다하더라도

조금도 영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삶이라면

그것보다 서글프고 헛된 삶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백세 시대에, 백수를 누린들

그때까지 오직 제 한 몸 챙기기에 여념 없는 삶,

그저 한목숨 지탱하는데 최선을 다한 삶이라면

그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작은 것에 목숨을 걸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진정으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목숨을 걸지 않았던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진정한 삶을 살기를 결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그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한 영생을 살지 않는다면.. 그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 시대의 징조         12:54-59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12:54-59

 

2014년에 열린 세계 주교 회의에서

교회가 직면하게 되는 유혹 5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첫째는, 완고함에 빠지는 유혹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많이 아는 것으로 남을 심판하고, 비난하려는 유혹입니다.

교회에 있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잘못한 이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여기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상처를 치유하기 전에 붕대부터 감으려는 유혹입니다.

붕대를 감으면 상처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것으로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주와 자유는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묘약은 없습니다. 오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돌을 빵으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물질과 자본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물질과 자본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모두 영적인 형제요 자매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는 유혹입니다.

십자가는 차에 걸어 놓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무겁지만 우리가 묵묵히 지고가야 하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와 함께 지냈습니다. 많은 병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아팠던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째, 교회의 유산을 포기하려는 유혹입니다.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는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버려야 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버리는 사람들은 없듯이,

교회의 전통과 정신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교구에서 섬길 때,

연말이 되면 늘 글라라 봉쇄 수녀원으로 갔습니다.

 

저 개인적인 한 해 돌아봄과 새 해 설계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시대의 징표를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교구 공동체를 이끌고 가야 할 영적 지도자로서

시대 상황과 현상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 시대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무엇을 요청하는지,

그 요청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을 아는 것은 머리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의 영역이요,

믿음의 영역이요,

헌신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만 보이고 알게 되고,

하나님의 가난을 지녀야지만 보이고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녀야지만 요청이 눈에 들어오고,

요청에 응답할 사랑의 의지를 지녀야지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이 앞서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自己愛로만 가득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밖에 안 보이고 욕심내는 것 밖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안 보이고, 사람들의 필요도 안 보입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자, 의로운 자인 냥 하니.. 위선자라고 질책 받습니다.

 

날씨가 꽤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10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함께 살다보니

요즘 제 머리 속에 계속 떠오르는 단어가 "월동준비"란 단어입니다.

 

난방을 위해 한동안 때지 않았던 보일러도 시험 가동해봐야 합니다.

각 방 라디에터에 에어도 빼야하지요. 슬슬 김장 준비도 해야겠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소래 포구에 가서 새우젓이랑 멸치젓도 사와야 하지요.

올해 배추 값이 금값이라고 하는데, 벌써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런 저런 당장 먹고 살 일에 집착하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또 가슴이 철렁합니다. 가슴이 찔리기 시작합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당장 코앞에 들이닥친 일에는 그리도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 성령의 이끄심이 무엇인가를 찾는데는

어찌 그리도 둔하냐?’는 음성이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내일 당장, 이번 달, 올 겨울 당장 먹고 살 걱정은 태산같으면서도

가장 궁극적인 걱정, 영원히 사느냐 못사느냐에 대한 걱정, 영혼을 위한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느냐?"는 그분의 음성에 몹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수시로 벌어지는 세상의 여러 사건들 앞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상의 여러 모습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징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다양한 체험,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표징을 포착해내는 일,

그리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수도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갈등상황이나 상처,

고통들 안에 긷든 하나님의 뜻과 징표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다가오는 상처가 만만치 않을 정도로 크다면,

일단 제 자신을 거두어들이고 침묵으로 몰입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유 없이 오해받는 일이나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제 자신의 내면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여깁니다.

 

나 자신의 비참함이 커져만 갈 때, 바닥으로 빠져 들어감을 느낄 때면

절실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으로 여깁니다.

 

삶의 모든 국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매 순간 사건 안에서 시대의 징표를 찾아나가는 영적인 하루가 되길 빕니다.

 

성직자들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다양한 청소년 문제는

(파행적 입시제도, 피 말리는 경쟁구도로 인한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의 고통,

게임중독, 인터넷 중독, 청소년자살 등등)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게 됩니다.

 

최근 자녀들의 심각한 인터넷 중독 증세나 게임 중독 증세로 인한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닌 몇몇 부모님들의 애타는 마음 앞에

저 역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탈출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 아이와 피시방에 갔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평소에는 잔뜩 주눅이 들어 늘 위축되어 살던 아이였는데,

피시방에 들어가면서 얼굴이 변하더군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환해졌고,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뭘 하는가, 가만히 봤더니, 전투를 하더군요.

현실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꼬이고, 모든 것이 불만족이었는데,

가상전투가 벌어지는 게임세계 안으로 들어가니,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제왕이 되었습니다.

무수한 목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 가상 세계 안에 있는 동안은 정녕 얼굴 빛깔이 고왔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가상세계를 벗어나는 즉시 우리 청소년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암담한 현실입니다. 짜증나는 일과입니다. 부담스럽기만 한 분위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청소년들은 자기만의 세계, 모든 것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암담한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가상세계 안에서

마지막 탈출구를 찾는 청소년들임을 알고 나서

무조건 막는 것도 무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미칠 것입니다.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포도원지기의 기다림

 

13:6~9절에, 포도원지기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하는데,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릴 것을 명하십니다.

 

그때 포도원지기(소작인), 예수님을 비유하는데,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합니다. :8~:9

 

사역자로서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보아도 제대로 자기 역할을 못할 뿐만 아니라, 관계도 원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면 그냥 계속 그렇게 내버려두던가

아니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대신해 포도원을 관리하는 포도원지기는,

이런 주인과는 사뭇 다른 입장입니다.

 

그는 끝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포기하거나 내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포도원지기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살리는 것이 그의 소명이 아닐까요?

 

사역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빈 수확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포기하고 싶고,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이 바로 포도원지기의 소명이라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성공적인 수확을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

죽어가는 쓸모없는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공의 수확자가 아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목적이 아닐는지요.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주인에게

포도원지기가 말미를 청한다.

1년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주시면, 자기가 정성으로 거름을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이 포도원지기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소돔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크리스천의 사명은,

그와 같이 끊임없이 거름을 주는 것입니다.

 

임지가 이동되어 공동체를 떠날 때, 사역자들은

그동안 저를 기다려 준 공동체 지체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을 인사로 건넵니다.

 

사실 이런 기다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곧 엄청난 갈등의 도가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 해를 더 거름을 주며 기다려준, 포도원지기들이 없다면,

중도포기자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언젠가 사순절이 시작되는 무렵에

미사를 집전하던 수도회 신부님이 사순절에 대한 강론을 시작하시며

수녀님들, 사순절이라고, 따로 고행극기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 아닙니까?”

라고 하셔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다양함은 그야말로 십인십색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 생활이 주는 기쁨과 역동이 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로의 약함에서 오는 짐을 함께 져야 하는 책임과 불편도 따릅니다.

가끔 상대방을 바라보며 아니, 저러려면 왜 수도 생활을 하려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상대방은 나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품었을 것입니다.

저녁 성찰 시간에 곰곰이 불편했던 관계를 되돌아보면

이런 생각은 지나친 기대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도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자신도 채우지 못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대는 실망을 낳을 뿐입니다.

 

본문에는 나의 약함을 바라보시며

올 한 해만! 올 한 해만이라고 청을 드리는 포도원지기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나에게 기대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으로 인해 불편했던 내 이웃에게 우리는 서로 이렇게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4.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한 자매님이 자신은 항상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매일 우울하고 세상에 화가 나기도 하며 사는 즐거움이 없고 힘들기만 하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위로가 되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따끔한 말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 생명 때문에

지옥에 갈 영원한 형벌을 면하고 하늘나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하면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겐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럴만한 수준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님의 도우심으로, 즉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뜨겁게 체험하지 못하면

결코 그 지식이 나의 살과 피가 되지 못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교리교육이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적으로는 많이 가르쳐주지만, 그분을 만나는 뜨거운 체험을 주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만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만남의 체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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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역사가 요세푸스

 

예루살렘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 37?-100) 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살쯤에 로마의 통치를 수용하는 바리사이파의 일원이 되었으나,

66년경 유다의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총독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독립정부 건립을 위해

갈릴래아 지휘관으로 싸우다 자신의 요새가 함락되자

로마군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Titus Flavius, 9?-79) 장군에게 투항하여 로마로 압송된다.

 

요셉은 감옥에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자 예언의 공()으로 풀려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는 그를 총애하여 시민권과 연금과 토지를 하사한다.

 

감사의 뜻으로 요셉은 자신의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로 개명하고

역사 저술에 몰두한다. 플라비우스가 남긴 불후의 명작은

유대전쟁사 7, Bellum Judaicum, 유대고대사 20, Antiquitates Judaicae,

아피온 반론 2, Contra Apionem등이다.

이들은 당대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93년경에 완성된 플라비우스의 유대고대사

유대역사를 창조 이후부터 반란(66-70) 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한 책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실었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고대사 제18권을 보면,

이스라엘의 5대 총독(26-36)으로 재임했던 빌라도가

두 번이나 유대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35년경 그리심산

(고대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남쪽 13Km 지점에 위치)으로

제사를 지내러 올라가던 사마리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빌라도 총독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소환되었고 그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대화의 능력

미국의 연구소의 실험 결과인데, 오랜 기간을 함께 살면서

서로의 갈등을 대화로 잘 해결해 온 부부와 면역력이

그렇지 못한 부부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이런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한 임상실험에서 악성 흑색종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고

한 집단의 환자들은 치료를 받은 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도록 하고

그 모임에서 대화법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집단의 환자들은 개별적인 치료만 받도록 하였지요.

 

이 실험은 6주에 걸쳐 진행되었고 5년이 지난 후 실험에 참가했던 환자들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대화법을 배웠던 환자들은 9퍼센트가 사망한 반면,

그냥 치료만 받은 환자들은 무려 30퍼센트나 사망한 것입니다.

 

그저 간단한 대화법을 배우고 자신이 가진 고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살아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이 만큼 우리의 삶 안에서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인간 대 인간의 대화만이 중요할까요?

 

어쩌면 인간 대 하나님 간의 대화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과의 대화 안에서는 때로는 아픔과 상처를 동반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대화 안에서는 믿음이 키워지며

이로써 구원이라는 커다란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