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마22:34~40 스크랩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을 아실 것입니다.
(Maximiliano Kolbe 1894~1941 폴란드인)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서슬퍼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수감자 때문에 10명이 무작위 차출되어
아사감방(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감방)에 끌려가던 중
콜베 신부는,
10명의 수인 중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콜베 성인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되셨습니다. 요15:13
▶그렇다면, 콜베 성인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과 은총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하게 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의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엡1:7)
어떤 고귀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를, 그분 때문에 거저 얻어진 삶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더 잘 살아야 하겠습니까.
실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앞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지만,
미력하나마 우리의 전부인 사랑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전부를 다하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좀 엉뚱한 질문으로 해 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첫째니 둘째니 하는 순서를 두셨을까요?
그냥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사랑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일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빗나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힘든 처지의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은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으며,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불완전성과 오류의 가능성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틀린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엇나간 과정과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결국 자신의 성을 쌓기에 바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이 쌓는 성은,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어떤 사랑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적극적으로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집착이던지, 자기과시던지 자기만족이던지 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한계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조금이라도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마22:34~40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순위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오류의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랑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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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한 이웃 사랑
요즘, 유튜브에서 박보영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혼자 성경을 읽으며 신학공부하며, 아주 작은 집을 얻어 교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말이 어눌하고 그 교회가 있는 곳이 우범지역이라
1년 동안 단 한 명의 신자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비가 오면 우유를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 분인데 약간 정신이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고마운 마음에 비 오는 날만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를 들어줄 사람이, 1년 만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자매님은 설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고 소리만 질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해서 매일 창문을 열고, 그 자매만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자매는 올 때마다 우유와 요구르트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굶은 날이 더 많았던 때여서 정말 잘 받아먹었는데
그때마다 배가 아프고 설사를 했습니다.
유통기간이 지나서, 곽이 부풀어 터지기 일보직전의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받아먹지 않으면, 그 자매가 실망하여 나오지 않을까봐
그 앞에서 마셔보이고는, 그 자매가 떠나면 바로 들어가 손을 넣어 다 토해 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설교를 들어줄 양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 또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생겼고 창립 1주년 행사를 하는데
한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쳐다보는데
그 자매가 그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양이 없는 목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얼마간 혼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아서
누군가 재개발 될 때까지 들어와 살라고 하는, 11평짜리 아파트로 갔습니다.
그 아파트는 이미 사람들이 다 떠나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안방에 불이 켜 있더랍니다.
문을 열고 살짝 보니 본드를 불어 눈이 다 풀려버린 십대 깡패 아이들이
칼로 여기저기 다 찢어놓고, 돈 같은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얼른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너무 기뻤다고 합니다.
자신의 양떼가 될 아이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드를 흡입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아이들은
칼로 목사님을 찌르려고 했는데, 목사님은 '잠시 뒤에 찌르라'고 말하면서
본드에 취한 아이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쌀 한 줌으로 밥을 해 먹이고는
교회에 오라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첫 신자들이 생긴 것이고
그 깡패들과 거지아이들과 함께, 7년 동안을 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먹을 것이 없는데,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은 다시 나가서 도둑질을 했고,
그 때마다 목사님은, 아이들에게 털린 집을 찾아다니며 죄송하다고 빌었습니다.
아이들을 제발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빈 것입니다.
그렇게 온갖 모욕을 당하는 목사님을 보면서도, 아이들은 바뀌지 않더랍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쇠파이프를 하나 준비해 아이들을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또 도둑질을 하고 돌아오자, 한 아이를 엎드려뻗쳐 시켰습니다.
워낙 온순하기만 한 목사님이라, 아이들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가진 온 힘을 다해, 아이를 한 대 때렸습니다.
아이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며
이렇게 세게 자신을 때리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하면서
아이들보고 자신을 차례대로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목사님을 때렸고, 한 아이가 잘못 때려서
목사님은 꼬리뼈를 다쳐서, 지금도 혼자 일어서기 힘들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 때 이후로는, 아이들이 굶으면 굶었지, 나쁜 짓은 안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다 위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잘 대해 주다가도
막상 집에 들어가면 지갑이나 귀중품부터 감추기 일쑤랍니다.
그래서 어른들을 믿지 않았는데, 이 목사님의 사랑을 그제야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사랑은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저는 보통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더 다가오는 부분은 바로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습과 박 목사님의 사랑과는, 분명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속삭임
이탈리아 친구가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Essere buono non è sinonimo di essere idiota,
essere buono è una virtù che gli idioti non comprendono.”
“착하게 된다는 것은, 바보가 된다는 것의 동의어가 아니다.
착함은 바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덕행이다”입니다.
이것은 사랑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현실에서 사랑을 선택하기에 두려워합니다. 망설이고 고민합니다.
사랑하면.. 마치 나 자신이 덜떨어진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또한 남들이 나를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불안한 감정과 편협한 시각은
우리 자신을, 사랑에 투신 못하게 하는, 악한 영의 유혹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인간적인 불안한 감정을 넘어, 굳건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의 선한 영에게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성령의 사랑스런 속삭임에 우리 마음의 귀를 활짝 엽시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우리는 사랑에 자주 실패합니다.
왜 자주 실패할까요?
첫째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혼란이고 가치의 전도입니다.
이는 마치 은이 금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사랑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난이 사랑보다 귀하다고 하는 것이나
정의가 사랑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다 이런 가치의 혼란이고 전도입니다.
둘째는 사랑을 하긴 하지만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힘으로 사랑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냐면 실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일이 내 일에 항상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하나님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적이 많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경우는 더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먹을 때, 다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실지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먹거나 하나님 때문에 먹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정말 대단한 얘기를 합니다.
부스러기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매사에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생각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이렇게 얘기한 다음 “영육의 감각을 다른 데에 허비하지 않고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침으로써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한 부스러기로도 우리를 채우나
우리는 부스러기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아니 되고,
온 마음, 온 정신, 온 힘을 기울여 해도 부족합니다.
셋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 사랑인 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란,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사랑입니다.
이 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은 분리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이웃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기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배터리처럼 몇 번 사랑하고 나면 고갈되는 사랑입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으로 리차지(recharge/refill)이 되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고 곧 고갈되고 말 사랑으로 억지 사랑을 하려 하니
힘은 힘대로 들고, 얼마 안 가서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사랑은.. 작은 관심의 표현부터
한 며칠 출장 같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할 때였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왜 한참동안 안보였냐? 도대체 어디 갔다 왔느냐?
놀러 같이 가기로 해놓고 혼자서만 그렇게 돌아다니기냐?"며 따졌습니다.
또 한 번은 점심식사 시간 무렵, 손님이 와서 아이들과 식사를 못했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간식시간에 만난 한 아이가 "점심식사 때 왜 안 나타났냐?
나이 들수록 식사를 제때 해야 된다"는 등의 일장훈시를 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살 맛 나는 순간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들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지요? 저희 아이들의 모습과 말투, 삶에서
아주 가끔씩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상습적으로 써먹는 단어, 눈만 뜨면 외치는 단어이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단어가 "사랑"이란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유별나거나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란스럽게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바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요즘 어떠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하는 일은 잘 되냐’고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어디 아픈데 없냐’고 신경 써주는 것입니다.
‘도와줄 일은 없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축구시합을 끝내고 들어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응접실에 불이 켜져 있길래 들어갔더니, 기숙생 친구 한 명과 면회 온 형이 앉아있었습니다.
얼마나 다정해 보이던지요.
형은 동생을 위해 없는 용돈을 쪼개 프라이드 치킨이며 피자며
잔뜩 사 가지고 와서 풀어놓았고,
동생은 신이 나서 먹으면서, 저보고도 먹으라고 했습니다.
두 살 차이인데도 형은 참으로 듬직해 보였습니다.
듣자하니 형은 동생을 만나기 위해 오후 4시에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동생은 뮤지컬 젠베르데 공연을 보러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8시나 되서야 돌아왔던 것입니다.
"한참 기다려야 되는데...어쩌나"하는 사무실 직원의 걱정에도
형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동생 얼굴 한번 본다면, 그까짓 몇 시간 기쁘게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 투자는 다름 아닌 상대방을 향한 자기 희생, 상대방을 위한 인내,
상대방을 향한 배려, 상대방을 향한 친절입니다.
이런 사랑의 요소들, 희생, 인내, 배려, 친절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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