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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성령님과 교제하기 / 마이크 비클

LNCK 2014. 12. 2. 09:49

◈성령님과 교제하기                       갈5:16~17                               출처1           출처2 (Full Length)

 

by Mike Bickle

 



 

신자의 죄와 싸움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인데, 사도바울은 본문 갈5:16절을 통해

이에 대한 굉장히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전쟁을 치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war)..  갈5:16~17

 

우리에게 정말 좋은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즉 성령님과 교제, 동행할 때

성령님께서 친히 내 '육체의 욕심'에 대해, 전쟁을 치러 주신다(거스른다)는 것입니다. *lust of the fresh

그래서 우리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약속입니다.

신자 누구나, 죄의 정욕을 이기는 일이 큰 과제인데,

내가 성령님과 교제하며,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그들이 취하는 방법은

자기 이빨을 꽉 깨물거나, 자기 굳센 의지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자기의 단호한 결단으로, 그 유혹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런 죄의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즉시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물론 최종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해 놓고, 하나님의 허락이었다며,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죄와 유혹이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본문 갈5:19~21절에는, 16가지의 육체의 소욕이 나옵니다. 

거기엔 육체적인 죄도 있고, 감정적인 차원의 죄도 있습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보통 성적인 죄, 또는 알코올 중독 등만을 생각하지만,

육체의 소욕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분노, 교만, 시기심, 질투심, 분쟁을 잘 일으키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육체의 소욕'들인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19~21

 

성경은 약속하기를, 우리가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면,

그런 육체의 소욕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런 육체의 소욕에서 자유하는 길은, 그저 '안 돼!'라고 말하며, 이빨을 꽉 깨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육체의 욕심을 이기는 일에, 사전 조치가 되는데

왜냐하면, 위 말씀에, 성령님은, 육체와 전쟁을 일으킨다(거스린다)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우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님과 더욱 가까워질수록, 육체의 소욕/유혹 자체가 힘이 약화되는 것이지요.

나는 육체의 소욕/정욕과 싸울 힘이 없지만, 성령님은 능히 이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한다, 성령님과 교제한다.. 표현만 다를 뿐 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성령님과 동행한다, 교제한다.." 는 말을 쓸 수 있을 만큼,

   실제로 친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저 '성령님이 내 속에 내주하신다'는 느낌.. 이 정도가 아니라요.

 

▲고후13:14절, 축도할 때 인용하는 구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의 교통을, 영어성경에는 communion of the Spirit 또는 fellowship of the Spirit 으로

각각 번역했는데요, 둘 다 호환해서 쓸 수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이 말의 의미는, 성령님이 정말 내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데, 

내 속에 실제로 어떤 인격이 동거해서 사시는 것처럼, 실제적이고 역동성있는 교제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 charismatic 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실제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중시합니다. 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사주의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크리스천은,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을 평소 자기 삶 속에서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일부 신자들은, 예언하는 것이나, 신유사역에 신빙성이 낮다고 보고서,

   성령사역을 배척하는데요..

   예언이나 신유는, 성령 사역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일부 예언사역이나, 일부 신유사역에 문제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 이유 때문에, 성령 사역 전체를 배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에, 외적인 성령의 은사가 안 나타나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렇다 하더라도, 성령님은, 당신 안에서, 내적인 사역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정 거듭난 신자라면, 성령님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 빅클은,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나와 있으니까,

   저는 예언하기도 원하며, 병든 자들을 고치기도 원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를 원하며,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의 기도를 드리며, 사람들을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제가 원하는 것은, 성령님이 내 속에서, 나와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외적 능력이 나타남과 동시에, 내적으로 성령님이 내 속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것을

   그래서 제가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는, 경건한 성도가 되기를..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먼저, <성령님과 내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신자는, 그게 다 '성령님과 교제? 네 마음속 상상이 아니냐?' 하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일각에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성령님과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추구하는 일을, 일단 인정을 해야.. 이게 이루어질 것 아닙니까.

 

이성적인 사람은, 이런 '성령님과의 교제'를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성령님과 더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에서, 성령님과 역동적인,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행 관계를 갖는 것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신자의 삶의 근본 목표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성령님을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IHOP 국제기도센터에 온 모든 사람이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스테프로 조인해서, 전임 중보기도 사역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런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간절히 성령님을 간구하고 있으며,

   또 그런 성령님과 내적 교제가, 점점 깊어져 가는 것처럼, 제 눈에 보여집니다.

 

   그렇게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간절히 추구하시는 분들은,

   물론 여기 IHOP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도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힘과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반대하시는 분이 있다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나요?"

성경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오는데, 고전13;14

성령님과 교제하는 일을, 이렇게 내적 교제를 통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있나요?

 

무슨 성령집회에 참석하거나, 무슨 안수를 받는다고.. 내가 성령님과 교제가 되나요?

아닙니다. 내가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갖는 방식은, 이 방식 말고는 없습니다.

내가, 내 속에 계신 성령님과 늘 대화를 추구하는 것!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나, 성령의 은사에 깊어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만약 무시하고서, 다른 어떤 외적인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가 무슨 '영적인 귀족 흉내'를 내는 것이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성령님과 내적 교제>를 운운할 때, 그게 무슨 모호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상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비록 그들이 신실한 크리스천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성령님과 내적 교제>에 대해서는, 모호하거나 어렴풋하게 알고 있고,

그렇게 성령과 교제 없이 살아가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며,

그들은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으며, 그래서 성령의 내적 역사가 노크해도, 자기가 알아 채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뭔가 도움되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제법 잘 믿는 사람들은 지금 성령님의 '특별 관심 그룹'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적 음성으로 계속 그들을 노크하시지만, 그들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우연한 마음의 감동' 정도로..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전도/양육하거나, 치유사역을 하는 일에.. 그들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식욕이 현저히 없어지는 것은, 육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병은 주로 내적으로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그 증세가 나타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식욕이 현저히 감퇴하는 현상을 보고서는, 내적인 병에 걸린 것을,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영적인 식욕이 거의 없는 신자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성경말씀을 먹는 것을.. 지루해 합니다. 기도로 대화하는 것도.. 지루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겨우 한다는 것은, 그저 찬양예배에 참석해서 (그건 지루하지 않으니까),

   쬐끔 찬양에 동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전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오늘날 신자들이 원하는 것이란, 그저 이런 수준 정도입니다.

'믿음으로 죄용서 받았으니 그건 됐고, 천국은 그래도 가야 되겠으니, 

지금 기도, 찬양, 말씀.. 이런 게 지루해도, 천국 가는 날까지는, 꾹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게지..' 

 

'주여, 지금 제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게, 뭔가 더 하실 일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만약 이렇게 기도하신다면, 주님은 금방 Yes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 너를 향한 나의 목적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나는 원한다!'

 

   그래서 그런 육신적 신자들, 성령에 무딘 신자들을 도전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제 빅클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또 신자들은 이렇게 나옵니다. '저도 제가 이 상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더 이상 가르치려 들지 마세요. 벌써 여러 번 들었거든요!'

 

   그렇지만 그들은, 성령님과 내적으로 교제하고, 실제 삶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그런 역동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령님과 교제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도록, 여러분을 손짓하며 오라고 부르십니다."

   라고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가, 점점 더 자라가는/깊어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 그게 왈칵 왈칵 솟는 '분노'일 수 있고,

또한 그게 절제 되지 않는 '식욕'일수도 있고,

아주 강한 '정욕'일수도 있고, 어떤 '공포증'일수도 있습니다.

 

나의 육체의 약한 점(소욕)에, 거기에 또한 마귀가 쉽게 틈을 타서,

여러 다양한 형태로, 나를 시험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런 여러 가지 육체의 소욕들을,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길은,

평소 삶에, 성령님과 역동적인 교제관계를 갖는 것임을, 저와 여러분이 꼭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바울이 가르치는 바는, 이때 우리는 '육체의 지배 아래,

즉 각종 정욕, 여러 종류의 두려움, 여러 종류의 중독, 변화무쌍한 내 감정적 연약함 등의 지배 아래에

내가 처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지배가 아니라, 내가 성령의 지배 아래에 거하니까요. 

 

그래서 내가 내면적으로/정신적으로/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푸근한 사람이 되고, 정신이 여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역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