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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글 모음 26

LNCK 2014. 12. 29. 16:53

 

묵상글 모음 26                  14.11.01. 가톨릭 묵상글에서 스크랩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사랑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먼저 당신 자신의 집에서 일을 실천하세요.

당신의 자녀와 편을 사랑하세요.

어떤 사람이든 당신을 만나고 나면 아지고 행복해지게 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표현되도록 하세요.

당신의 얼굴에, 당신의 눈에, 당신 미소 속에,

그리고 당신의 따뜻한 한마디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세요.

과연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까? 나는 어디에서 행복을 있습니까?

 

◑평생을 행복하게 산 비결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소녀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비를 구해 주었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긁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와, 자기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는 알았다며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 사라졌습니다.

소녀에겐 늘 행복이 떠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나비천사가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지금 나를 구해 준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꼭 도와주세요.

그럴 때마다 행복 에너지를 많이 보내드릴게요.’ 라고 속삭이고 떠나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행복의 비결은, 누군가에게 사랑이나 물질을 받음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누군가를 위해 베풂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루 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해서 번 피 같은 돈을 한푼도 헛되게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는 최대한 아끼면서, 기쁘게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분들,

   또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 분들, 그들은 진정 첫째가는 행복한 성자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임종환자들,

   쌀쌀한 눈길로 방문을 거부하는 말기암 환자들의 마음을 한번 열어보겠다고

   끊임없이 그들에게 다가서는 호스피스 봉사자들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행복한 성자들입니다.

 

   계속 박대를 당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 선포자들 역시

   행복한 성자들 대열에서 제외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만두 가게의 주인은 매일 세 번, 한 번에 딱 120개의 만두를 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00개는 팔고, 20개는 가난한 노인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손님이 일정한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때에는 손님들이 없어서 만두가 남는 경우도 있겠지만,

 

때로는 손님이 많아서 만두가 모자라는 경우도 종종 생겼습니다.

 

이렇게 손님이 많아서 만두가 모자라도, 주인은 예외 없이 20개의 만두는 절대로 팔지 않았습니다. 



더 팔아서 자신의 수익을 더 올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노인과 아이들을 위한 만두라는 이유로 팔지 않는 이 만두 가게 주인은, 과연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히려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만두 가게에는 불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변함없이 100개의 만두를 선착순으로 사기 위해서 줄을 섰고,

 

가게가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100개의 만두는 모두 팔렸지요.

 

그는 남는 시간에 봉사활동을 했으며, 여가활동을 즐기면서 행복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정화의 시간

 

기도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흙탕물은 흔들면 더 혼탁해 집니다.

흙탕물은 가만히 있으면 조금씩 맑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주한 세상에서 흔들리는 우리들은 기도라는 과정을 통해서 맑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왜 이렇게 흔들렸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통해서, 어떤 분은 묵상을 통해서, 어떤 분은 대화를 통해서,

어떤 분은 그저 조용히 머물면서 정화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하였든지, 정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조명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단풍이 아름다워도 밤에는 단풍구경을 할 수 없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인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빛이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면 미움, 분도, 시기, 질투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 용서, 인내, 평화입니다.

 

 

기도는 일치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양들도 그 음성을 잘 알아듣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내 안에 머무르면 나도 여러분 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포두 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나는 여러분들만 아니라면 오늘이라도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 때문에 흐려진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게 비추면 좋겠습니다.

내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프란치스코 성인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사람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최우선으로 앞세우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장 측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바로 근심과 걱정에 싸여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든간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늘 근심과 걱정에 싸여 살 수밖에 없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가장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이나 가족의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되면

그제야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아마 평생 동안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고 초조해하면서 일생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어려운 세상살이를 살면서도 "가난한 마음(마5:3)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편안히 복을 누리며 일생을 보낼 것인가는

오직 하나님을 믿느냐 마느냐,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살고자 결단을 내릴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결단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모든 성자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신앙인에게 굳은살은 어디에?                  

 

사실 처음에 기타를 많이 치다보면, 코드를 잡는 왼손 손가락 끝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러나 연습의 반복으로 인해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상태가 옵니다. 바로 굳은살이 박이게 될 때입니다.

 

왼손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이게 되었다고 해서 제가 부끄러워했을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래도 노력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스스로 볼 수 있었기에 기뻐했습니다.


 

굳 은살은 어쩌면 그 사람의 신분증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굳은살이 생겨야 그 부분의 아픔도 사라지게 됩니다.

 

언젠가 어떤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발이 인터넷 상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발가락에 엄청난 굳은살이 박여서 너무나 못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따지고 보니 열심히 한 사람치고 굳은살이 없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작가들도 굳은살이 있습니다. 연필을 잡는 손 가운뎃손가락 첫째 마디 옆면에 있지요. 


우리 신앙인에게는 어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어야 할까요?

 

기도할 때 꿇는 무릎?

 

 

 그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솔직히, 죄를 짓는 마음에 굳은살이 박였으면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가 쳐들어와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와 아들

 

여든두 살의 아버지와 쉰두 살 된 아들이 거실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참새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습니다.

노인이 묻습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합니다. “참새예요, 아버지.”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묻습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말합니다. “참새라니까요.”

 

조금 뒤 아버지는 또 묻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을 냅니다.

글쎄, 참새라니깐요.” 한참 있다 아버지는 또 묻습니다. 네 번째입니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를 냅니다. “참새라고요! 왜 자꾸 같은 질문을 반복하세요?”

 

한참 뒤였습니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곤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읽어 보라고 합니다. 아들은 읽습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아기였을 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참새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저게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참새라고 답해 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스무 번을 똑같이 물었다.

아들을 안아 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답해 주었다, 참새라고.

같은 답을 스무 번 해도 즐거웠다. 새로운 것에 관심 갖는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난감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누구나 난감할 것입니다
.

그래서 다시 묻게 됩니다
.
안식일에는 무엇이 합당합니까
?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반대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

안식일은 쉬는 날이니 쉬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
그런데 쉬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으로서의 쉬는 것과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으로서의 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으로서의 쉼이 아니라면

하던 일을 그만 두는 것으로서의 쉼은
빈둥거리거나 노는 것에 불과하고

쉬기를 강제하는 안식일 규정은 쓸데없는 억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며
,
하나님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
그리고 매주일의 안식일은 영원한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갈망하며

지금 여기서 미리 앞당겨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 안에서 진짜 평안을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심 걱정을 쉬고
,
일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압박을 멈추고

일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의 욕심을 줄이고
일을 하지 않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 피에르 바야르의 『나를 고백한다』라는 매우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스 같은 불의한 권력 집단에 저항한

의로운 사람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습니다.

그가 각별히 주목하는 이들 중에는 나치스를 비판하다가 사형된, 뮌헨 대학교의 학생 셋도 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내밀한 느낌’이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보여 준 그들의 모습에 대한 증언을 인용합니다. 

“기소당한 세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아주 바른 자세로, 침착하고 고독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솔직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하고 쓴 것은 사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거예요. 단지 그들은 감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저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그들의 확신에 찬 감정이 단지 동시대인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역사 안에서 그들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확인해 줄 이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재의 폭력과 불의의 권력에서 자유로운 

보편적인 정의와 인간성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이 고립감을 이겨 내고 꿋꿋이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기독교 신앙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