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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과 경배 P1 / 폴 워셔

LNCK 2014. 12. 29. 16:53

www.youtube.com/watch?v=G4ZRqUtHDHY&feature=youtu.be

 

폴 워셔,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과 경배 - YouTube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과 경배 P1       롬12:1~2             한글 출처 (17분58초까지)

 

"True Worship and Devotion to Christ" by Paul Washer                                                   P2

 

로마서 121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권하노니  I urge you                              *urge : 강력히/간절히 설득하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설교는,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 문법적인 설명, 커뮤니케이션 기술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간곡하게 설득하는 것인데 (우리 말에 '권하노니')

죽음, 생명, 천국, 지옥을 다루되, 그것을 간절히 설득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urge입니다.

 

설교는 진리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로 자신을 돌아보고, 그 진리를 받아드리도록 권고하고/ 권유하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너무나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하는 사람이, 잘못된 멍에를 지울 수 있고,

말하는 것 중에 아무리 적은 실수도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에 대한 책임을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청중도 책임이 따릅니다.

들었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책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설교는 또한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할 때, 단지 사람들에게 '이것이 진리다' 라고, 무성의하게 말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설교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곡하게 전달되어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한 것처럼, 성경 말씀을 전심으로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간구하고/ 호소하십시오.

 

▲그러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거기에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썼었죠.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는, 매번 회중들에게,

'그러면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리를 주어야합니다.

 

당신(신학교에서 신학생들 앞에서 설교)이 알고 있는 진리의 양(amount)을 자랑하지 말고,

당신의 삶을 통해, 당신이 먼저 살아낸 말씀으로.. 설교하십시오.

 

때로 저는 장황한 강해설교를 듣는데, 저에겐 단지 <신약 개론>의 책 소개처럼 들릴 뿐입니다.

그들은 신약의 역사와, 도시의 거대함 등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배경 지식보다 더 이상의 것을 말하기 원합니다.

설교에서는,  성령의 내적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설교지요!

그리고 그 설교를 들었을 때, 들은 것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설교를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권고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설교자는, 고상하게 보이나,

설교를 농담처럼 하며,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인 것처럼 횡설수설 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진리를 가볍게 다루지 않고, 무겁고 엄중하게 다룰 설교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에서, '영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출34:29) 

 

엘리아도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겉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왕상19:13)

설교자는, 청중앞에 서기 전에, 이렇게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당신들이 누군가에게 진리를 설교할 때,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그들이 그것을 행하도록 간청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권하노니 I urge you"

 

우리는 지금 너무나 피상적인 (겉껍질 뿐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영원한 삶, 생명의 말씀 등의.. 속 깊은,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기 싫어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강단에 섰을 때는,

영원과, 경건한 삶의 중요성에 대한.. 그런 심각한 진리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저 농담이나, 세상 살아가는 삶의 요령이 아니라요)

 

설교를 좀 심각하게 serious 해야 합니다. (요즘 너무 가벼운 설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설교자가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어떤 사람에겐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어떤 사람에겐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고후2:16

이것(생명에 이르는 향기)이 당신에게 부여된 의무임을 깨닫습니까?

 

당신은 코미디언이나 나레이터가 아닙니다. 줄거리를 이야기 하거나 교수처럼 박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에 여러분은,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지자가 그랬듯이, 당신은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당신들을 조정해서 맞추도록 align,

그들에게 간청하고 부탁하여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롬12:1절에서 말한 '내가 권하노니.. I urge you'의 의미입니다.

 

   때로 만약 우리가 길거리에서 설교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마치 휫 필드가 가졌던 마음처럼, 동일한 심정으로 외쳐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 심령을 위해 울지 않는다면, 저라도 여러분의 심령을 위해서 울어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믿는 로마교회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절히 간청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 주제가 되지 않으면, 그 대화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 말은, 물론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진리를 듣기는 하지만, '들은 말씀을 자기 등 뒤로 던져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모임일지라도

너무나 쉽게 우리는, 세상의 스포츠 이야기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율법학자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이 오래 동안 보기 원했던  (눅10:24, 마13:17)

그 복음이 성취되고, 이루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소중한 말씀을 듣지만, 설교 시간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일상의 날씨에 대한 대화들을 나눕니다.

 

따라서 당신이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이 듣는 이 말씀은

너무나 무거운(중대한) 내용이며, 신자는 반드시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해서 살아야'하는 것임을  강조해만 합니다.

 

 

◑너희 몸을 드리라    Present your bodies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형제들에게 간곡히 권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바울은 무엇을 권고하고 있습니까?

그는  형제들에게 '그들의 육체를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30년간 크리스천으로 사역자로 하나님을 섬겨 왔습니다.

그 동안 제게도 멋진 차, , 음식, 그 외 여러 가지.. 육체를 위한 것에 제 마음을 빼앗길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뺏어갈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일부만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고상한 (외적인) 우리 자신을 요구 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요구하십니다.

즉 우리 마음과 아울러, 몸까지 헌신을 다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롬12:1

 

   경건 훈련의 목적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훈련에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방은 드리고, 어떤 방은 숨기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전체가 그 분께 거하고, 또한 주님이 제 안에 거하시는, 그런  동행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문화 안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문화는, 마음을 드리는 것을 강조하지만, 몸을 드리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마음과 아울러 몸까지 다 헌신해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Present your bodies!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지금 교회에서 설교하는 바,

주일 교회 출석, 교회 봉사.. 이런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그 진의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세세한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 말씀의 의미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진정 당신의 하나님이면 그분께만 헌신하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편으로, 분명하게 '서라, 드리라 present'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왕상18:21

한낱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도 섬기듯이.. 절뚝거리며 왔다 갔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받으실 만하시고, 또한 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로 인해 더렵혀집니다.

 

교회들은 이것을 알아야 하며, 성도들은 깨달아야합니다.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는, 당신을 나타낼 뿐 아니라,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반영합니다.

 

따라서 당신이 만약, 세상을 따라 산다면, 당장 멈추십시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중단하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그렇게 드리십시오.

 

여기 우리 사역자들도 이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젊은 신학생 여러분들은,

지금 이 때는, 젊은 열정으로.. 주님을 뜨겁게 섬길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젊음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이가 들어가고 쇠약해지고, 세월의 흐름 속에 육체가 약해질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에게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우리 젊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일례로, 본문의 말씀을 붙잡고,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그 사람은,

늙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 중에 일부는, 사역에서 큰 성공을 체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성공을 맛본 사람이,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목회적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다윗처럼) 영적전쟁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는데

자신들이 충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야 할 때에 집에서 쉬고 있게 됩니다.

바로 그때 유혹에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소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언제나 드려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사도는 당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자기 생각'과, 겉으로 표현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당신이, 죄인인 누군가에게, 그가 죄에 빠져 있음을 이야기하면

'책 표면으로 책 내용을 판단할 수 없다'고 그는 반박할 것입니다.

 

죄에 빠진 누군가를 지적하면

그는 '당신이 나의 행동을 정죄할 수는 있지만, 나의 마음을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모른다'고,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 구절에서

"(마음 뿐만 아니라) 너희 몸을 드리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체와 마음을 분리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건 우리 몸(육체)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중략)

 

히브리 민족 역사에서 세대를 거치는 동안 계속 강조하는 것은,

주 너희 하나님을 너의 온 존재를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질투하시기까지 원하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것입니다.

당신의 이 모든 것이 그분 것입니다. 이제 더 당신의 삶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호흡이 아닙니다. 더 이상 당신을 위한 심장도 ,손도, 발도, 눈도, 입술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그 분께 속하였으며,

우리의 모든 것이 말씀에 나타낸 그분의 성품과 뜻에 의해 그분에 의해 주관되게 됩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가지고자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인에 대한 종(노예)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너무 많은 크리스천들이, 귀에 구멍을 뚫고 목에 타투를 그리면서 ('나는 종입니다'라는 뜻으로) 

그것으로 자신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봅니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러한 것들이 저에겐 당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영혼의 갈급함, 죄에 대한 애통함, 그 분 안에서의 기뻐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광스러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진정한 그분의 종인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이 당신 마음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어 줍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께 아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아는 누군가가 생각하는 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기(신학교)보다 더 복음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헌신할 수 있다면.. 그곳은 바로 여기 신학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을 드리는 헌신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분께 매료당해 있지 않다면

그 험한 목회지인 선교현장에서 홀로 남겨질 때 당신은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학위를 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이 당신을 취하여 그분께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제물로 그 분께 드리십시오.

 

제물에 대한 것을 언급하려면, 손실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의 비용에 대한 것을 계산해 보았습니까?

당신이 정말 그분과 동행한다면 거기에는 굉장한 손실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에 대한 죽음이 있을 것입니다.

 

위대하고 최고의 것을 당신의 삶에 접목시키고 당신을

그분께 돌이키기 위해, 당신의 삶에서 버려야 할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 어떤 분이 저의 믿음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저는 에스겔 36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그 분의 권능에 반응할 수 없게 하셨고

나의 강퍅한 육신의 마음으로는, 그분의 은혜에 반응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인도하심 속에, 나를 나의 죄 된 지경에서, 그의 은혜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추악함 속에서 모든 나의 우상을 제거하시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당신 자신을 그분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러한 자세를 훈련하십시오.

당신을 그분께 드림으로 그분이 당신을 통해 더욱 드러내십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