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권유 빌3:17~21 2012.06.24 출처보기
◑고전으로 돌아가라 - 조나단 에드워즈
▲여러분은 클래식을 좋아하십니까?
클래식은 우리 말로는 고전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 속에는 일류 또는 최고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전이란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어떤 고급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하지요.
어떤 분야에든 다 있습니다.
음악에도 있고, 문학에도 있고, 미술에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어느 분야든 일류가 되려면 이 고전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위에다 뭔가를 쌓아도 쌓아지지요.
그래서 혹 여러분들이 지금 하시는 일이 발전하는 게 없이 지지부진 하다면
여러분이 하시는 분야의 고전을 다시 한 번 섭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책이든 음반이든 화보든, 아니면 사람이든 간에 상관없이
다시 한 번 고전을 깊이 접해야 한다는 겁니다.
목사들도 고전이 될 만한 설교자나 신학자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분인데, 오늘은 이 분의 얘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요즘 미국이란 나라는, 좋은 면보다 나쁜 면들이 많이 부각되는 바람에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원래 미국은 청교도 정신의 뿌리 위에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고 일으킨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처음의 정신을 많이 잃은 모습이지만
짧은 시간 안에 세계를 움직이는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이런 미국의 역사를 말할 때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이 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 년 전의 인물입니다.
미국 건국의 정신적 기초가 됐던, 청교도 신학을 대변하는 가장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설교가였고 저술가였지요.
또 성령운동을 일으킨 사람으로서 대각성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초창기 때의 총장이었고,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습니다.
그가 졸업한 예일 대학에서는, 그가 남겼던 총 저술을 집대성해서 30권 분량의 책으로 출판했지요.
한 인물에 대해서 대학 당국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일 만큼, 그는 아주 독보적 존재였습니다.
또 이 분은 노스햄턴 교회에서 23년간 목회를 했던 목회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렇게 23년간 열심히 목회를 하다가, 40대 후반에 그만 그 교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 어떻게 쫓겨나게 됐는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당시에 그 에드워즈 목사의 퇴임을 결정하는 투표에서도
그는 230명의 당시 교인들 중에 고작 23명, 그러니까 꼭 1/10 에게만 지지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23명 말고는 모두들 이 에드워즈 목사에게
“목사님! 이제 이 교회를 떠나 주십시오!” 결정에 찬성했던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에드워즈 목사님이 목회를 한 20년쯤 했을 때, 어느 순간 성도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과연 구원 받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교회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지요.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잘들 모입니다.
또 사회에서도 그다지 나쁜 일로 손가락질 받는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참 신앙인인지 아닌지 의심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교인들을 유심히 보면서 성도들을 나름대로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진짜 신앙인도 있었고, 교회는 나오지만 그 중엔 신앙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또 이쪽인지 저쪽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증거가 드러나야 하는데, 그런 표가 안 나는 거예요.
이런 사람한테 “당신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교회가 확신을 시켜주는 것은,
자칫하면 그 영혼을 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에드워즈 목사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드디어 칼을 빼 들지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끔씩 성찬을 하는 게 아니라, 성찬을 자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알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에드워즈 목사님이 성찬에 참여할 요건을 강화한 겁니다.
아무나 참석할 수 없도록 한 거지요.
저 사람이 정말로 예수를 믿고 나서 괄목할 만한 지속적 변화를 체험한 사람인가?
정말 속 사람이 변화돼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통감하는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인가?
그래서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말 절실하게 무릎 꿇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인가?
그런 걸 보면서, 성찬에 참여시켰던 겁니다.
여러분!
만약, 지금 우리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 해 보십시다.
한 사람 한 사람 나오는데 제가 “어! 당신은 안 되겠어! 다음 번에 와요”,
“어! 당신은 충분히 자격이 있지! 어서 받아요!” 이랬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가만 있겠어요?
그 일을 에드워즈 목사가 한 겁니다.
당연히 성도들이 반발하겠지요.
결국 이 문제를 두고 2, 3 년간 갈등하다 그 교회를 사임하게 된 겁니다.
결과적으로 에드워즈 목사가 쫓겨난 사실을 보면,
에드워즈 목사의 의구심은 타당했다는 게 증명된 셈입니다.
▲당시 청교도들은 이‘구원’에 대해서 아주 엄격한 잣대를 댔습니다.
지금이야 무슨 4영리 같은 것 하나 갖고, 겨우 4~5분만에 그것을 한 번 읽어주고,
마지막에 “이 사실을 다 믿으시지요? 그럼 저를 따라 기도하시겠습니까?”, 따라 하게 하고
“아멘!”하면 “이제 형제님은 구원 받았습니다. 축하합니다.
형제님은 지금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그럽니다.
그런데 에드워즈 당시에는, 이렇게 쉽사리 구원을 파는 것은, 하나님 은혜에 대한 모독이라고 봤던 겁니다.
내가 죄인이란 걸 압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을 뼈저리게 느껴서, 정말 누가 나를 제발 이 지옥에서 구원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느껴야 되는데,
그것도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정말 구원 받으려면 예배에 열심히 참석해야 되고, 열심히 성경공부 하고,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내가 전심전력을 다 해야 구원받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내 마음에 한 줄기 빛을 주셔서, 진리를 깨닫는 눈을 주시고,
그 진리를 확연히 깨닫게 되는 날이 오는 겁니다.
“정말 내가 죄인이구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주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구나.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 또 감사합니다”
그런 어떤 체험적인 경지가 온다는 겁니다.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는 그런 경지가 온다는 거지요.
바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후에야 비로소 구원을 받은 거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원을 그렇게 봤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반반이지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은 지 30분 만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합니다.
그런 사람이 계속 예수를 잘 믿을지 어떨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겠지요.
그런데 정말로 단 30분 만에 영원히 변치 않을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 올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은 정말 수십 년 교회를 다녀도, 에드워즈 목사의 잣대처럼
무슨 크고 괄목할 만한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구원관에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요즘 신앙의 풍토를 보면서 그때의 잣대를 갖다 대면,
거의 대부분이 엉터리 신자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죠나단 에드워즈는 1000편이 넘는 설교를 남겼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설교의 제목이 뭐냐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는 죄인들” 이란 설교입니다.
제목부터도 으스스하지요?
이 설교는 영문학적으로도 굉장히 가치가 있기 때문에 웬만한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다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이 설교는 자기 교회에서가 아니라 이웃 교회에 초빙됐을 때 했다고 하는데, 이분은 저처럼 설교 원고를 읽는 분이었습니다.
저녁예배 때 촛불을 켜 놓고, 읽는 데만 90분이 걸리는 그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 분이 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뭐라 그랬냐 하면,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렇게 이곳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보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을 향해 더 진노하신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이래 놓고 설교를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들을 향해 불타고 있습니다. 지옥의 불길은 지금 무섭게 타오르며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칼은 입맛을 다시면서 그들 위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는 그들 아래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난 밤에 지옥으로 가지 아니한 것, 당신이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은 후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뜬 것,
당신이 아침에 일어난 후 지옥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집에 들어 와 앉은 후,
그의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는 죄악되고 사악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지 않은 것, 이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을 거두시면, 떨어지는 바윗돌을 거미줄이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은 즉시 굴러 떨어져 지옥의 끝없는 구덩이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촛불을 켜놓고 90분 동안, 이 설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성령의 강하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앉아있던 사람들이 다 비명을 지르고, 떼굴떼굴 구르는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은 것이지요.
내가 교회를 다녔지만 정말 얼마나 엉터리였던가 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받으니까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에, 꼬꾸라지는 사람에, 까무러치는 사람들이 속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유명한 미국의 영적대각성운동이 시작되지요.
여러분! 요즘 이런 설교를 어디서 들어 보겠습니까?
또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교회를 누가 가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잖아요?
오늘 날의 교회엔 진짜 이런 설교가 필요합니다. 정말 이런 설교가 너무나 절실합니다.
그런데 감히 이런 설교를 하는 목사도 없고요, 이런 설교를 듣고 싶어 하는 성도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만약에 죠나단 에드워즈가 현대 교회에 와서 요즘 목사들이 하는 설교를 들었다면 뭐라 그랬을까요?
아마 장난친다 그랬을 겁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믿음을 의심하고, 또 교인들이 자기 목사로부터 의심받는 것을 보면서
그 비참한 현실 때문에 아마 통곡했을 겁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될 때는 바로 이런 때입니다.
정말 말세에 참 믿음있는 사람을 보겠느냐 통탄하시던 예수님의 그 한탄이 절절하게 다가와서,
가슴을 쥐어 뜯고, 그런 경박한 내 믿음에 대해서 뜨겁게 회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겁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이 그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의 편지를 보내서 그들에게 권유하고, 아울러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이 사도 바울의 눈물의 권유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진짜 믿음 있는 사람들로 거듭나야 될 줄 압니다.
오늘 바울의 권유를 수용해서 참 믿음있는, 칭찬받는 주의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바울의 권유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8절, 19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듣고 읽기만 해도 가슴이 오싹해지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애정을 가지고 가르쳤던 빌립보 교회를 지금 돌아 보니,
거기에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바울은 그들의 신앙고백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생활을 잘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들을 놓고 근심하며 눈물 흘리면서 안타까워 하고 있느냐?
그 이유가 본문에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이요, 온통 생각하는 것들이 죄다 땅의 일들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이 고어로 되어 있어서 잘 안 들어올 텐데,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욕망을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오직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
훨씬 뜻이 잘 다가오지요?
사실, 우리 중에 욕망을 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리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책망에 우리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은 겉만 보고는 판단하기 어렵잖아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을 보실 때는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2000년 전의 빌립보 교회에도 그랬고, 현대 교회도 있고, 심지어는 목사 세계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인 겁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안타까워서 여러 번
“너희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면 망한다” 경고하고 권면했는데 듣지 않았어요.
들어야 되는데 안 들으니까 그때마다 바울은 눈물이 솟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편지도 눈물로 쓴다고 그랬습니다.
너희 중에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결국 그들은 멸망하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안 믿는 사람들 얘기가 아닙니다.
현재 빌립보 교인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은 성경에서 이곳에 딱 한 번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그들을 십자가의 원수로 불렀을까요?
▲첫째, 그들의 신이 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의 배가 신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배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자기 배 채우는 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앞세우고,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를 더 위하는 겁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자기가 우뚝 서 있습니다.
자기의 내면에는 자아가 잔뜩 똬리를 틀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도 모두 자기 뜻과 욕망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인 겁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자기 배가 신이다’ 말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이럴 수 없지요.
고후 5:15절에 보면, 주님이 우리 삶의 목적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었느냐?
죄인된 우리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거예요.
그럼 그분 때문에 중생하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어요?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내가 인생의 목적이예요, 정말로 내 배가 나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내 배를,
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대접할 수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는 것도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인 겁니다.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런 변화를 맛 본 사람에게 자기 배가 신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지 않는 빌립보 교인들은, 그대로 계속 가면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겁니다.
어떻게 되겠어요?
결국은 멸망입니다.
불이 아가리를 벌리고 이글이글 타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둘째로,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느냐?
그 영광이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쉬운 말로 바꿔 말씀 드리면, 수치스러운 것을 오히려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한다는 거지요.
그게 십자가의 원수 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부끄러워 해야 될 것에 오히려 뽐내고,
이생의 잘난 것을 앞세운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훈장처럼 여기는 것들 있지요?
권력, 재물, 성공한 것, 인물 잘난 것, 명예, 자식….. 그런 것들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 안 믿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이지,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약4:4 에 보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의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 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만약에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이런 세상의 영광에 목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세계관이 바뀌었기 때문인 겁니다.
만약 세상 사람이 크게 성공했다면, 자랑하고 요란 떨지만, 그 성공을 거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어요?
“하나님! 나의 이 성공을 통해서 주님이 제게 무슨 일 하시기를 바라시는지 알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이
우리의 태도입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를 주신다면, 거기에 부들부들 떨면서
“주님 저에게 왜 이런 감당할 수 없는 물질을 주십니까?
이 돈을 어떻게 써야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가르쳐 주옵소서!”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 인물이 다른 여자보다 빼어나게 잘 낫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어쩌자고 이렇게 예쁘게 만드셔서 저를 괴롭게 하십니까? 프로포즈 받는 것도 지겨워 죽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 저를 이렇게 잘 나게 만드신 데는 이유가 있을 줄 압니다.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사용해 주옵소서!” 이래야 된다는 겁니다.
매사가 이런 모습이어야 우리는 주님 앞에 제대로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생의 것을 자랑하면서 거기에 영광을 둔다면, 그것은 수치를 수치로 모르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아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셋째로,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느냐?
온통 땅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혹 혼란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살면서 땅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정말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공부하고 레슨 받는데,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겁니다.
정말 내 일에 골몰하고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할 판인데 어떻게 내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면 세상 천지에 예수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세상 일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닙니다.
세상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정말 우리가 우리 하는 일에 골똘히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얘기하는 내용이 뭐냐?
생각의 기울기, 생각의 경향, 생각의 습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 생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걸 놓고 얘기하는 거예요.
가만히 있을 때 내 생각이 어디를 향해 기우느냐? 어느 쪽으로 자연스럽게 가느냐?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침반은 가만 놔두면 그 바늘이 항상 북극성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각의 경향은 어떻습니까?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위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고요.
가만히 있으면 항상 거룩한 것을 좋아하고 그리로 향하는 겁니다.
생각이란 사물을 의식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은 감정을 유발하고 그 감정은 행동의 동기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생각은 바로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가면 생각이 가는 거예요.
생각 있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한 영혼의 탁월성은 그 영혼이 뭘 사랑하는지 그 대상을 알아보면 된다” 말한 것은
정말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은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신령한 것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빌립보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항상 땅에 것들로 생각이 기운다는 겁니다.
말도 맨날 땅의 얘기만 하고 땅의 것을 걱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받으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꿔 놓으십니다.
아시는 로마서 8장의 말씀대로,“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은 뭐라 그랬습니까? 사망이라 그랬습니다.
영의 생각은 뭡니까? ‘생명과 평안’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결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육신의 생각, 이생의 생각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상태로 우리가 "주여 주여!" 하도록 성령은 놔 두시질 않습니다.
우리를 바꿔 놓으십니다.
이래야 정상인데, 빌립보 교인들은 어떻다구요?
가만히 놔두면 그 바늘이 자연히 세상을 향하는 겁니다.
가만히 놔 두면 생각이 온통 땅의 것들로만 푹 기운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단지 빌립보 교인들만의 이야기입니까?
더욱이 사도 바울이 이런 모습을 보고 가슴을 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될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다같이 20절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아멘!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다고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 나라에 있습니다.
시민권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그리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지리의 시민권을 딴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이 이 나라로 향하는 것이고,
대한민국 시민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이 아직도 한국을 향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의 일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잠깐 있다가 사라질 안개 같은 이생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거기에 미련을 두느냐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게 안타까워서 제발 제발 땅에다가 마음 두지 말고
천국 시민권자로서 긍지를 갖고 살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겁니다.
그래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땅의 일에 죽자 사자 매달립니다.
그럴 수 있어요.
어디 바라고 기댈 데가 없으니까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지요.
그렇지요? 여러분! 그게 옳지요?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바로 잡는다면 우리는 걱정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나이 먹어서 늙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21절 보니까 주님은 우리의 몸까지 바꿔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얘긴데 자매 여러분! 너무 얼굴이나 다이어트에 신경쓰지 마세요.
물론 여성들 가운데 68%가 자기 외모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한다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영혼이 병이 드니까 인격은 제쳐 두고,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병든 사회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니쟎아요?
우리의 몸과 영혼 전체를 바꿔주실 그날이 올 텐데 땅의 것에 몰두한다?
그것은 정말 천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땅의 일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다짐을 하십시다.
우리 중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게 마십시다!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영광을 부끄러운데 두지도 마십시다.
아울러 땅의 것만 골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시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의 잘못된 것을 고쳐 주셔서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 몸체로 바뀌게 해 주옵소서.
천국 시민권자로서 이생에서도 그 특권을 누리며 살게 해 주옵소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의 생각이 온통 영광의 십자가로만 향하게 하옵소서!”
▲요 며칠 동안 저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이 하도 여러 갈래라서 도대체 그 고민의 실체가 뭔지 알기조차도 어려웠습니다.
교회문제이기도 한 것 같고, 제 자신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가족의 문제, 목회의 문제 같기도 한 것 같고,
나아가서 나를 둘러 싸고 있는 거대한 굴레 전체에 대한 문제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뭐냐에 착안해서
생각해 보니까 바로 오늘 제가 말씀 드린 설교의 내용이었습니다.
가장 든든해야 할 기초가 전체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거였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공동체나 다시 한 번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에 봉착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린 겁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없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기 십상입니다.
현대 교회의 큰 고민거리도, 목회자의 가장 큰 고민도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 인플레이션이 만연화 되고 있습니다.
너무 돈을 많이 찍어내면 인플레가 돼서 돈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교회에서 구원을 너무나 손쉽게 얘기를 해 놓으니까 구원의 감격도 없고, 거기에 대한 감사도 모르고,
결국엔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도 모호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조차 “당신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당신 믿음은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을 강요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성령께서 확신을 주셔야 믿어지는 것이지 아무리 주입시킨다고 해서 믿어질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먼저 할 입니다.
교회만 오래 다녔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죠나단 에드워즈나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 오셨다면,
과연 우리를 어떻게 부르실까를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구원받은 진실한 크리스챤이야 “ 그러겠습니까?
아니면 “ 당신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야!” 그러겠습니까?
사실 제가 정말 제대로 되 먹은 목사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에 그런, 구원받지 못하고
십자가의 원수된 성도로 추정되는 사람이 몇 사람만 있어도 바울처럼 울면서 설교할 거예요.
가슴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할 겁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눈물이 없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 시간 다짐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모를까 기왕에 예수 믿을 바에는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중에는 믿음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단 한 분도, “오늘 말씀은 나와는 관계없는 말씀이야!” 라고 생각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교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조용한 시간에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날 구원하신 주께 정말 감격하고 있는지, 감사의 찬송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나의 실존이, 내 주님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십자가의 연인인지 아니면
내 배가 신인, 땅의 것만 생각하는 십자가의 원수인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묻습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의 원수입니까? 아니면 연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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