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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바울과 야고보의 신학적 입장 차이

LNCK 2014. 12. 29. 17:02

바울과 야고보의 신학적 입장 차이              갈2:1-10                     2012.09.30 설교스크랩, 출처

                                                                                                   *원제목 : 기독교의 대외 이미지

 

https://www.youtube.com/watch?v=aXdATOVnJe0

 

※아래 내용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기 때문에 스크랩했습니다./편.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정치권

 

헨리 키신저가 미국의 국무장관이었을 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헌법에 대통령은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만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키신저는 독일태생의 유태인인데

15살에 미국에 이민해서 국무장관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키신저가 대답하기를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있지만 왕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농담입니다마는 왕은 사람들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그런 뜻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서 여론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왕실이 다이애나 왕비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엄청난 비판적인 여론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군주론제도를 폐지하자는 그런 주장까지 표면화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왕실은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에

최근에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 60년을 기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나라의 왕실이 폐지됐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왕실이 1912년에 폐지됐지요.

그래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제목이 마지막 황제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왕실도 폐지되고 러시아의 왕실도 폐지되고, 캄보디아의 왕실이 폐지됐습니다.

모두 사회적인 격변에 의해서 몰락했습니다. 왕도 국민의 여론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가 여론에 의한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여론에 민감한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여론은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한쪽에서는 서구화를 하라, 민주화를 하라는 요구가 빗발치지만

반대쪽에서는 과거 순수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주 신중해야 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여론을 봐 가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우디 왕조를 지탱하는 것은 와하비 파, 아주 보수적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는 부족이

킹 사우드를 도와서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했기 때문에

그들의 협조 없이는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치를 보시지 않지만, '교회'는 여론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지만, 교회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독교인과 교회는 세상의 눈치를 봐야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눈치를 보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세상의 눈치를 안 보시기 때문에

교회도 세상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 앞에 하나님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둔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시고 신임투표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론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기든 예수님의 인기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는 들으시지만,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미지를 관리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초대교회는 이미지의 문제를 염려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초대교회가 완벽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한편으로는 존경을 많이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방에 날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핍박에 의하여 다 흩어졌습니다. 그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흩어진 다음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강한 적대감에 시달린 적이 많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로 구성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바울이 쓴 편지가 전부 다 초대교회 여러 교회에 쓴 편지들인데

만약 그 교회들에 문제가 없었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같은 것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 분열의 문제,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칭찬받는 교회는 두 곳 밖에 없고

나머지 다섯 교회는 꾸지람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단맞는 교회가 그 당시에도 더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 말씀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열한 사도보다 이후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열한 사도와 같이 신앙생활을 한 적이 없고, 같이 신앙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별도로 예수님을 만나서 별도로 사도의 부르심을 받고 별도의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야고보 · 베드로 · 요한을 만나는 이 자리는

그가 뉴커머(newcomer)로서 최초로 이들을 만나서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그들이 점검하고 그리고 인정하는

그런 아주 중요한 만남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검증을 받는 시간이에요.

 

여기에 세 명의 사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야고보, 사실 야고보는 열 두 사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야고보 · 베드로 · 요한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이 순서로 등장하는데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말한 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었기 때문이고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만 실제로 대표격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야고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바울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절에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다’ 이건 의미심장한 성경구절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의 염려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복음을 승인하는데

바울의 복음을 승인하면서 야고보가 노파심으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 달라고 추가의 부탁을 하고 있는데

이 노파심이 신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이미지 문제 때문이었을까요?

바울의 이 신학이 갖고 있는 내재적인 유혹 때문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이 부탁에 대해서 평소에 하는 바라고 한 말로 일축했지만, 야고보의 염려는 일리가 있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행함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이냐/ 행함이냐? .. 이것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이건 복음의 진리에요. 오직 믿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육체는 없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한 복음의 진리에요.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행함이 자연히 소홀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해도 되는 것과 해야 되는 것의 차이는 천지차이에요.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자원봉사가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자원봉사 안 할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 같은 동기부여는 없습니다.

 

이슬람에 라마단이라는 게 있지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식사를 합니다. 수억 명의 이슬람 성도들이 라마단 기간 중에 금식을 합니다.

예외가 없어요. 이것은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라마단이 해야 되는 게 아니고 선택사항이 되면 하루아침에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라마단처럼 강요되는 금식이 없습니다. 선택사항입니다.

금식이든 구제든 봉사든 다 선택사항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본문에서 염려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바울의 복음이 맞는데 게을러질까, 행실이 나빠질까, 도덕적으로 나태해질까,

소위 모럴 해저드, 도덕적인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마음의 뒤편에 갖고 있을만한 염려는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세상이 기독교인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까, 기독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충분히 했을 수가 있습니다. (아래에 계속 설명 나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신학적 입장 차이

 

여기에서 두 명의 인물을 비교하자면 야고보는 폭 넓게 생각하는 인물이고

바울은 본질에 집중하는 인물입니다. 두 종류가 다 필요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바울이 옳습니다.

그러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야고보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만약 오늘날 야고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한경직 목사님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누구를 닮았을지 알 수가 없지만, 욕을 엄청 먹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욕을 엄청 먹고 오해를 엄청 받지만, 굉장히 용감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야고보는 지혜로운 사람이요 어른이고, 바울은 신학적으로 옳은 사람이에요.

이 두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사람의 눈치도 안 봐도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올바른 진리를 갖고 있다면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이고,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말은

우리가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가 추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가 선행을 추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착함을 추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제를 추가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거룩함을 추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족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떳떳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함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자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도 자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우리가, 사람의 눈치로부터도 자유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바울과 야고보는 약간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 눈치 안 봐도 된다.’ 야고보는 ‘그래도 사람 눈치 안 볼 수 없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지론은 이랬을 것입니다. ‘남에게 시험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내 자유함을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함을 누려라.’ 이렇게 말했을 것이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라.’

이런 지론을 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쓴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쓴 이유가 그는 바울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게 아니고

그는 바울보다도 폭 넓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이 그 자유함을 누리려고 하는 그 위험에 대해서,

오해에 대해서.. 노파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늘 염려했습니다. 사실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니까 그 사랑이라는 말은 ‘믿음의 행함’ 이런 말로 바꿔도 똑같은 뜻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치는 안 봐도 되지만, 사람의 눈치는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사람들이 더 엄합니다. 하나님보다도 사람들이 더 힘든 상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는 일을 사람들이 상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든 기독교인이든.. 여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세습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큰 문제에요. 그렇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떳떳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 만큼 사람들 앞에서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위선 아니냐?’ 이렇게 물어볼지 모르는데 위선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만큼 이해심이 많지 않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을 읽지만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기독교인이 무슨 죄냐. 기독교인인 한은 죄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기독교인이 된 게 무슨 죄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죄에요.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에요.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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