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공동체의 탄생 막3:7-19 2012.02.12.설교스크랩, 출처
교회에서는 흔히 예배드리고 믿기만 하는 ‘신자’와
좀 더 헌신적이며 사역과 봉사를 하는 ‘제자’로 구분합니다.
여러분은 신자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보면, 오늘날처럼 ‘단순히 구원받고 천국 가라’는 식의
‘신자’로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몰려들던 무리들에게는 ‘믿음’이 중요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름’이 중요하였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무리들이나 기적을 맛보았던 자들에게는 대부분, 성경에 그들의 이름이 없습니다.
믿음에서 따름으로 나아간 제자들만이 이름을 가지고 있고, 영원토록 빛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단순히 기적을 맛보고 주는 떡으로 배부른 존재들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고 떡을 주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열둘의 제자 공동체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예수님은 헬라어로 ‘마쎄타이’(disciple)라 불리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중 12명을 택하여 제자로 부르십니다.
열두 명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12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입니다.
구약에서 12는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성전에는 진설병이라고 하여 열두 덩이의 떡을 항상 진설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임명하시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의 공동체,
곧 교회라는 공동체의 출발을 알리시는 선언입니다.
신약의 12제자의 임명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잇는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범입니다.
▶그래서 그 무대는 산입니다. 13절에 “산에 오르사”라고 말씀하시는데
물론 이 산은 단순히 어떤 공간적 배경을 지칭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열두 제자를 임명하는 장소인 ‘산’은
보다 특별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계약을 체결했던
시내 산을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름 모를 산 위에서
지금 새로운 공동체의 출범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 때 처럼요!
▶16절에서 19절까지는 열두 명의 제자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각자의 이름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12라는 숫자입니다.
이 숫자가 갖는 상징성은, 12명의 이름이 복음서에서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서
뚜렷이 두러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의 명단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일치하지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다릅니다. 11명은 같은데 한 명이 다릅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다대오’로 나오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등장 합니다.
다대오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해결하면 간단한데, 그렇게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를 빼고 대신
맛디아를 열두 제자의 이름에 올립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도, 베드로나 야고보와 요한 정도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다른 제자들은 단지 열두 제자로만 불릴 뿐입니다. 특별한 행적이 안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하는 12라는 숫자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안에는 누가 들어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12라는 숫자는, 우리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13절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는 말과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시제가 다릅니다.
‘부르시니’란 동사는 현재형이고 ‘나아왔다’는 동사는 과거형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늘 현재형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의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열두 제자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기의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또한 열두 명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교회 공동체가 어떤 곳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의 구성층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가난한 민중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당시에 배를 소유한 것으로 보아서
중산층 정도의 재산을 소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으니까 마태 또한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다양성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기에 민족 반역자라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반면에 가나안인 시몬이나 가룟 유다는 민족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나안인 시몬을 누가복음에서는 셀롯 시몬이라 부릅니다.
셀롯은 열심당이란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시가리옷 (히. 그리옷 사람)이란 뜻인데 *아마 구약의 ’그릿’
그는 당시 ‘시카리’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에 포함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성격 또한 다양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단에게 미혹되는 여린 사람이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정도로 두려움이 많고 다혈질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아마 우레처럼 그들의 급한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들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장면이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의 한 촌을 보며,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 불을 내려 저희를 멸하게 하시기를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도마라는 제자는 의심이 많아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다양한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정파를 좇아 모인 곳이 아닙니다.
민족이나 혈통을 따라 모인 곳도 아닙니다.
어떤 친교적 목적이나 문화, 취미나 성격이 유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부르신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13절입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공동체에는,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소외되지 않고 화목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부한 자들만이 있는 공동체, 또 정치적 성향이 맞는 사람들만의 공동체
그런 곳은 건전하지 않은 교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사상이나 취향을 좇아 모인 인간의 공동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처음 부르실 때는 다양하고, 그 신분 또한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존귀한 자요, 위대한 사람들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를 상징하는 비유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볼펜 알만큼 그 크기가 작지만, 이것이 땅에 심겨 자라면
새들이 깃들일 정도의 큰 나무가 됩니다.
누룩은 보잘것없고 잘 보이지도 않지만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는 겨자씨처럼 작고 누룩처럼 미미한 존재였지만
예수님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위대한 인물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역사 기록이나 전설들을 보면, 열두 제자들은 하나같이 지도자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는
베드로는 네로 황제 때에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헬라 아가야 지역에서 전도하였고
마지막은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X 자형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 부르기도 합니다.
세리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다,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다, 나중에 에베소에서 활동하며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살아났으며
밧모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의 제자였던 마가는 마가복음을 썼으며, 이집트에서 콥틱 교를 일으켰습니다.
콥틱 교는 회교권의 핍박 가운데서도 2천 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그 수가 10%, 약 7백-1천만 명에 이릅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으며
그곳에서 기도하던 중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남부 첸나이란 곳에 가면 도마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저도 인도 의료 선교차 갔다가 그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도마가 숨어 지내던 동굴이 있는데 거기에는 도마가 기도하던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팔을 대고 기도하던 곳인데 하도 많이 기도하여
11자로 홈이 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겨자씨와 같이 미미한 존재였지만
나중은 신앙의 거목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는 작은 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크고 존귀하며 능력 있는 위대한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자는 누구인가?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우셔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셨던 일은 다음 세 가지의 일이었습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째는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고,
둘째는 전도하는 것이고,
셋째는 권세 있게 하여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다른 어떤 사역이나 봉사를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소중히 하며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실상 우리 문제의 근원은 영적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리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만 급급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에게서 받으셨던 첫 번째 시험이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떡이 먼저입니다.
누가 떡을 줄 수 있느냐가 능력이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낫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 이런 것들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무능력한 존재요 무능력한 집단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의 기도 내용도, 떡을 얻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요구를 거부하시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라고 말씀하십니다.
떡도 중요하지만 떡 이전에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왔습니까? 떡입니까, 어떤 안전이나 축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은 이제 돌로 떡을 만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요로워졌고
또 건강과 안전의 위험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까?
여전히 우리는 삶의 불안, 고독, 허무, 두려움, 소외 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
교회는 바로 현대인의 문제가, 바로 영적인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외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던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실로 여기에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교회는 이런 영적인 문제를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곳입니다.
인도의 콜카타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테레사와 그 수녀들에게서
가장 중요했던 시간은, 바로 예배와 기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5시와 6시 사이의 예배와 기도,
저녁 6시와 7시 사이의 예배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기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신령한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마치 수원지를 물로 가득 차게 하는 시간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저장된 물이 가득한 사람은, 하루를 기쁨과 능력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갈되어 있을 때, 우리는 갈증과 무능력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세이비어 교회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150명 규모의 작은 공동체이지만
70여 가지 사역을 행하고, 연간 2천만 불 이상의 예산을 사용하는 큰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또한,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들은 매일 1시간씩 말씀 묵상하는 것을 의무로 합니다.
1년에 두 차례, 3박 4일의 침묵 수련회를 다녀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모든 힘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와 기도와 말씀묵상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자신의 매일이나 일주일의 시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곧 곤고해지고 말 것입니다.
제자는,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전심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제자는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교회에만 머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원문은 말씀을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전도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일주일의 삶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주일의 6일은 세상에서 보내고 단 하루만 교회에서 보냅니다.
하루 중 새벽의 짧은 한 시간만 새벽기도로 성전에서 보내고
나머지의 시간은 대부분 세상에서 보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친교하고
함께 교육을 받기도 하고 함께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이는 이유가 흩어지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 속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병원이요 휴양소입니다.
그러나 평생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건강이 회복되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새 힘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통해 받은 그 힘은 세상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빛을 비추어야 할 곳은 세상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지 에너지 충전소일 뿐입니다.
주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시며
우리를 끊임없이 땅 끝으로 몰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기동대요 별동대요 기마병들입니다.
징기스칸이 몽고를 다스릴 당시 국민은 채 2백만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시아와 온 유럽을 장악을 했습니다.
그들이 탁월한 기마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마병들을 주축으로 기동전을 펼쳤기에 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에 갇혀 있고, 정착해 있고, 거추장스런 안전도구들에 매여 있었다면
그런 위대한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칭기즈칸은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닦는 자는 흥한다”는 진리를
실전으로 보여준 영웅이었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적은 숫자를 가지고 짧은 시간 내에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를 성으로 인식하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전도에는 말로 직접 하는 전도가 가장 기본입니다.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생활 속의 전도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으로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 미움과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만드는 것,
불의가 있는 곳에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것,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것,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곳에서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것,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곳에 사랑과 헌신을 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전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행동들입니다.
▶셋째, 제자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0)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무리와 제자로 나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와 무리가 확연히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준비할 것을 지시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도와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는 제자들이 갈릴리 곳곳을 다니면서
마치 예수님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쫓는 능력을 행합니다.
반면에 ‘무리’는 예수님을 따라 집으로, 해변 가로 몰려들었던
병들거나 귀신들렸던 가난한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단지 무리, 다수, 민중들이라 불립니다.
한 때는 민중신학이라 하여 민중에 대해서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중과 함께 하는 것에 대단한 의의가 부여되기도 했고,
심지어 민중이 구원자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민중이 가진 사회계급적이며, 구원론적 성격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이익만을 기대하는 무리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제자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수동적인 무리나 민중이 되지 말고, 제자 곧 능동적인 민중,
깨어 있는 민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떡만 보고 몰려든 무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무리를 먹이는 제자입니까?
무리에서 제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 시대처럼 우리 손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민중들에게 하셨던 역할을
우리가 오늘날에도 하시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육체의 치료는 이제 의사들이 행하고 있으며
육체의 필요는 이제 과학과 정책 당국자들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인들은 영적인 필요와 갈급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삶의 이유와 만족함을 알고 느끼게 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예수의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분류 없음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시대에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P2 (0) | 2015.04.21 |
---|---|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 (0) | 2015.04.19 |
세리 마태에서 신학자 마태로 (0) | 2015.04.06 |
바울과 야고보의 신학적 입장 차이 (0) | 2014.12.29 |
눈물의 권유 (0) | 2014.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