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 막1:14-15 2011.11.20.인터넷에서 스크랩
https://www.youtube.com/watch?v=lGNozIu5r8g
◑때가 찼고
공생애를 출발하시는 예수님의 일성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찼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때’는 헬라어로는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으로 나뉩니다.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되는 시간은 크로노스입니다.
삶이나 역사에 질적인 변화나 의미 있는 시간/때에는 카이로스를 사용합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마치 알에서 병아리가 깨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톡하고 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나옵니다.
사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안에서 물이 차오르듯 생명이 차오르고, 그것이 일정수준에 달하니까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때’는 요한이 잡힌 후, 시작이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서 모두 요한이 잡혔다는 것으로부터,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을 서술합니다.
예수님에게 세례 요한의 체포는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각성 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줄탁동기(啐啄同機)란 말이 있습니다. 줄(啐)은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때가 되자
안에서 껍질을 깨는 것을 줄이라고 합니다.
어미 닭이 이 소리를 듣고 밖에서 껍질을 동시에 깨기 시작하는 것을 탁(啄)이라 합니다.
이 줄탁이 잘 맞아야 병아리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않으면 지치고 말거나 아니면 설익은 채로 끝나고 맙니다.
예수님에게 세례 요한의 사건은 마치 밖에서 깨던 ‘탁’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고양되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마음이, 세례 요한의 사건을 계기로 분출된 것입니다.
유대 사회가 가진 폭력성과 절망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본색을 드러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주님께서 때가 찼다고 선언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장소가 아닙니다. 통치권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는, 이사야서에서 정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7)
좋은 소식은 곧 복음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곧 하늘나라 라는 말을 흔히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하늘에 있는 나라’로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하늘나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로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태가 유대적 전통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기를 꺼려하여
대신 우회적으로 ‘하늘에 계신 분’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하늘나라/천국’(마태복음)나 ‘하나님 나라’(그 외 복음서)나 같은 표현입니다.
우주 어느 끝에 천국이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천국은 있지만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 높고 아름다운 우주 어느 끝일지라도
하나님의 통치가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살아계시면 그것이 천국이고, 예수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은 없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어디 입니까? 바로 이 땅입니다.
분명히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가 어디로 임합니까? 바로 이 땅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땅에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있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의미의 천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진짜 천국입니다. 기독교가 이런 역사적 지평을 잃어버리고
자꾸 내세지향적인 되는 것은 성서적 전통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 나라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확장되어갑니다.
마11장 12절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교회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주력군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통치가 실현될수록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여러 윤리가 많지만 그것을 압축하면
사랑,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통치의 핵심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 나라에 비슷해졌습니까? 내 안에서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부분이 많습니까,
아니면 어둠과 세상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했던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14)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고 이곳에서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갈릴리는 거룩한 땅이라 불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오랜 동안 이방인의 식민지였다가
예수님 태어나시기 불과 100여년 전 쯤에 유대 땅으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를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5-16).
요한복음에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에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인물이 날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본고장도 아니었으며, 부유한 엘리트들이 사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부재지주들이 땅을 가지고 농장을 경영하던 곳이 많았던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폭동도 자주 일어났던 곳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았다”(행5:37)
하며 폭동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갈릴리 땅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성도라 불리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많은 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교만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있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가까웠으니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까웠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엥기켄’인데 완료형입니다.
이 동사의 성격을 놓고 많은 학자들의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가까웠다’를 ‘임박했다’고 해석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대파국과 함께 임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에 주목한 해석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임했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5:24)라 선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already 와 아직 not yet 이라는 두 차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성도 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이 바로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와 평화와 풍요가 있으면 거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을 너무 대단하게 이상화하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편 하나님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박한 종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신다는 긴장감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이 땅에 쌓아놓은 어리석은 것들은 다 불에 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를 소중히 또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함께 나누었던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의 일부를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하게 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저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종말의식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시길 원하시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탐욕과 다툼과 허영과 이기심과 교만의 길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정의와 평화와 안식과 기쁨과 나눔과 배움 같은
영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습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13-15)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요구되는 일은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의 헬라어는 메타노에오(동사)입니다.
그 원래 의미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로는 약합니다.
(물론 생각을 바꾸는 것이, 행동을 바꾸는 일에 선행함을 의미하긴 하지만요)
구약 예언자들이 외쳤던 ‘회개’가 더 정확합니다.
예언자들은 “돌아서라!”(슈브)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하던 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로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방식과 욕심을 따라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 방식으로 사는 길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회개는 생각만 바꿀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천도 동반하는
절대적인 삶의 전환이요 결단입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렘7:3)
▲회개는 예수님 믿을 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여러 번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청소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시일이 지나면 다시 청소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어느새 죄와 탐욕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눈물을 흘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 삶의 변화가 따르는 회개가 진정한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자기가 맺은 열매를 가지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인격의 열매는 어느 정도입니까?
나는 내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자신 있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열매가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맺고 있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열매가 가득한 사람은 주님 앞에 서는 날을 사모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한 사람은 주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년이라는 나이가 아마 중간결산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지나온 날을 뒤돌아보며 다시 뛸 후반전을 준비하는 하프타임과 같은 시간입니다.
잠깐 멈추어서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율법적인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마지못해서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 때문입니다.
그 앞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좋은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성경의 윤리는 항상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직설법과 명령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직설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은혜의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명령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이 명령이 율법이 아닌 것은, 앞에 선언된 은혜 때문입니다.
그냥 손 씻으라면 싫어하지만
맛있는 고기 먹기 위해 손을 씻으라고 한다면, 그때는 율법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계명도
더 이상 율법이 아닌 것은, 그 앞에 은혜의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엄청난 죄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자기 인생에 열매가 없음을 회개하라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선물을 값있게 받으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당당히 통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더 큰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 손에 들고 있는 작은 것들이나 원망이나 게으름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수억 원의 돈이 약속되어 있다면
내 손 안에 쥔 수십만 원은 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만약 내 손 안에 있는 작은 것에 아까워하고 연연해한다면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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