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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LNCK 2015. 3. 13. 08:05

◈복음의 시작              막1:1~5                 2011.10.30. 스크랩, 출처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두 네 개가 있습니다.

각 복음서는 각각의 색깔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특징과 그들이 받은 은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예수님은 마치 새로운 모세처럼

산상수훈과 같은 새로운 율법을 전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마가는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섬김의 삶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선교와 잃어버린 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비유에 강합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양 1마리의 비유 등이 나옵니다.

 

요한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를 전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며, 직접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복음서보다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네 개의 복음서가 필요할까요? 네 다 필요합니다.

교회사에서 디아테사론이라 하여

네 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4개를 통합해 놓으니,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큰 산과 같은 분이십니다.

큰 산은 한 쪽 방향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사방에서 조명할 때, 그 산의 모습이 제대로 조명이 됩니다.

 

거친 면도 있고 부드러운 면도 있습니다. 급경사도 있고 완만한 곳도 있습니다.

바위투성이인 곳도 있고,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림이 빽빽한 곳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맛을 음미하며 복음서를 읽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생애를 뭉뚱그려 놓은 한 편의 전기 영화를 보듯

그렇게 복음서를 읽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공관(共觀), 곧 함께 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증거하는 독특한 표현은 무엇인지, 무엇을 더 강조하고 있는지

서로 비교해 보며 보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을 함께 묵상하고 강해하면서

마가가 발견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은 성서학자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성서입니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마가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마가복음을 토대로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수사학적 기교나 설명 없이, 담백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 거칠고 단순한 서술이

오히려 우리를 말씀 앞에 세우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

 

이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주저 없이 결단합니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제자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부르심을 받을 때의 제자들의 갈등이 어떠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거친 초청 앞에 따를 거냐/말 거냐는 거침없는 도전과

주저 없이 따르겠다는 제자들의 결단만 있을 뿐입니다.

 

마가복음의 시작 부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에 관한 말씀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과 공생애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은 지적 호기심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복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곧장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묘사된 예수님의 탄생이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사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상태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1:1

 

마가복음을 여는 첫 단어는 시작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아르케입니다.

이 아르케란 단어는 태초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 할 때

태초에가 헬라어로 엔 아르케입니다.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고 선언할 때

태초에엔 아르케입니다.

 

창세기나 요한복음이 태초에란 단어로 시작하듯이

마가복음 또한 태초로 시작합니다.

 

마가가 복음의 시작이라고 할 때는

단순히 복음의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겠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창조의 역사와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 이전의 세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가득했습니다.

이 때 가라사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자 혼돈과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러자 세상에 빛이 임하고, 질서가 생기고, 생명으로 충만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시작’(1:1)은 곧 창조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것과 같은 시작입니다.

 

인류 역사는 복음 시작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복음 이전은 공허와 혼돈과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자

온 우주와 인류 역사에 참된 생명과 진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떻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때는

내 인생에서 천지창조와 같은 개벽의 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내 인생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만남들 중 단지 하나였을 뿐입니까?

 

여러분 곁에 있는 배우자를 보십시오.

인생에 단 한 번뿐인 결정적이며 유일한 만남입니까?

아니면 많은 우연 중에 하나인 만남일 뿐이거나, 심지어 잘못된 만남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배우자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갈라지지 않습니까?

 

마가는 마치 빅뱅과 같은 우주 창조의 대폭발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의 인격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1:1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입니다.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는 황제에 관한 좋은 소식들과

그 칙령들을, ‘유앙겔리온곧 복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어떤 비문에는 가이사를 구세주라 부르고, 가이사 아구스도의 생일을 가리켜

신의 생일은 세상에 대하여 그로 인한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의 시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마가는 가이사의 등장이 복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소식임을 외치고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은 로마 사회 한복판에서나,

정치나 경제의 한 중심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의 갈릴리란 한 변방의 시골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 기쁨을 1:2절과 3절에서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밝힙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 4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의 무대는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기간이 끝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것이 이사야 말씀의 예언입니다.

그때에는 출애굽과 유사한 출바벨론 사건이 일어난다는 선언입니다.

 

그 해방의 기쁜 소식을 지금 선지자가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합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길 가운데, 아라비아 사막이 있습니다.

중동 지역 사람들은 이 사막을 돌아서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돌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행차하시는데

사막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 첩경이라는 것은 대로 곧 고속도로를 말합니다.

평탄케 하라는 것은 곧게 하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은 낮추고 낮은 곳은 돋우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다닐 대로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우회하지 말고 사막 한 가운데 곧게 길을 내어, 예루살렘까지 이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들은 죄와 사망의 압제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가장 기쁜 소식은 내 죄를 사함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들에게서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했다는 소식입니까?

내가 지지하던 정치인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입니까?

아니면 내 자녀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는 소식입니까?

 

이 모든 것들도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우리 자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자라간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1:1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개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메시야는 기름부은 자를 뜻하지만, 그 본질은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오셨고, 내 인생의 구원자로서 오셨습니다.

이 고백은 사도 베드로가 정확히 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하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구원자는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자리입니까? 명예입니까?

사람이나 이념입니까?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능히 모든 두려움, 심지어 죄와 사망에서부터 우리를 건지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마가복음은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1:11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입니다.

이 고백은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어떤 백부장이 하였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15:39)

 

하나님의 아들 됨을, 귀신이나 세상은 그의 능력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3;11)

 

물론 예수님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됨의 참모습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순종하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됨은 십자가 (순종)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와 성공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섬김과 가난과 희생 가운데 있습니다.

이 십자가로 나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1:2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합니다.

세례 요한이 했던 일은 예수님이 활동하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시는데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세례를 통하여 했는데,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주님을 맞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생활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무엇을 회개했습니까? 누가복음에는 그 자세한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3:10-14)

 

주님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생활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래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입교할 때 행하던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그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지금 상황은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맞을 수 없을 정도로

죄와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주님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494 주년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대대적인 회개와 정화의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탐욕, 성경에서 벗어난 교리들,

사제 중심의 권위적 체제에 대한 반발로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문에 써 붙인 95개조 반박문이 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돈이 연보궤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는 이들은

단지 인간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27)

 

그래서 탄생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이의를 제기한다 항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성서에 근거해서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집단입니다.

 

개혁교회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서에 어긋난 것을 끊임없이 개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494년 전의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항상 개혁하고 항상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탐욕과 부패와 위선과 분열과 독선과 거짓된 확신으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나 거룩함이 땅에 떨어진지는 오래 되었고

세상의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교회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무지와 맹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중세 교회의 무지를 깨버렸던 것은 성서의 발견이었습니다.

모든 잘못된 교리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깨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형태의 성경에 대한 오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처럼 성경을 많이 읽는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못 읽고 있습니다. 성경 문자에 갇혔고 교리에 갇혔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서로 하나님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해석하게 하시는 성령님은 이성의 영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되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이성과 성경이 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천동설이나 노예제도나 가부장제적인 모습을

오늘날에도 통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서는 역사 현장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오류와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 인간의 수준에 낮추어서 말씀을 전하신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성령의 영을 통하여

비판적으로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만이 성경과 과학이, 성경과 세상이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문자를 그대로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상은 그대로 믿기는커녕 자기 편한 것만 받아들입니다.

 

성경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다른 의견이나 비판들을 묵살하고

자기 기득권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성경을 달달 욀 정도로 성경 지식에 탁월했던 유대교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보며

우리는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무비판적 태도가 맹신을 낳고

교회를 자정 능력이 없는 집단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중세시대 사제를 중심으로 한 교권세력으로부터 만인이 제사장이라 하여

모두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인간 아무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무비판적으로 사람과 조직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둘째, 물질과 권력의 숭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탐욕이라는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크기와 건물만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었고, 헌금만을 강조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단어는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는 세 단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물질적 탐욕과 이기심이 팽배해 있는데, 교회도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중세의 교회가 물질적 탐욕 때문에 면죄부를 발부하는

거짓된 교리를 만들어 내었던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연옥에 빠진 영혼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발부한 면죄부이지만

그 이면에는 결국 그것을 팔아서 물질을 챙기겠다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라는 여러 신앙의 논리를 갖다 대지만

그 이면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명예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양의 울음소리와 돈 바꾸는 자들의 동전 소리로만 가득한 것에 탄식하십니다.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그 열심 때문에 주님께서 언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을 쏟고 상을 엎어버리실지 모릅니다.

교회는 가난과 섬김과 십자가의 희생을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이념과 독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이념적입니다.

특히 반공적이며 수구적입니다.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도 그 모습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한국교회의 이런 태도로는 한국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그 갈등만 더 조장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은 예수입니까? 이념입니까?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면 친미 반공국가의 건설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봉사해야 할 것은, 평화와 화해를 이룸으로써 입니까

아니면 갈등을 더 조장함으로써 입니까?

 

한국교회는 이념화된 갈등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평화와 화해의 공동체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을 위로하고

우리 민족을 공생 공영의 길로 이끄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타종교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교 이전에 평화와 겸손함이 먼저입니다. 지금처럼의 독선적 태도로는

선교도 어렵고, 우리가 가진 복음의 위대함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길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높은 산과 같은 교만이 있고,

깊은 골짜기와 같은 상처와 분노가 있고,

곳곳에 널려 있는 더러운 죄들과 바위 같은 방해물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깎고 돋우고 깨끗이 할 때, 주님께서는 그 대로를 통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단지 마음속의 회개나 옷을 찢기만 하는 쇼가 아니라

우리 생활의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사 그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