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나가야 내 영성이 살아난다 막1:2-8 2011.11.06.설교스크랩, 출처
◑광야에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려면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성전 한 복판에서 외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합니다.
광화문이나 시청 앞으로 가야하고 강남역 앞에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외쳤던 곳은, 평소에 인적도 드문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절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사막 한 가운데라도 찾아갑니다.
▲강원도 태백에 가면 <예수원>이 있습니다.
교통도 여러 번 차를 갈아타야 하는 산골이고, 장소도 협소하고 음식도 변변찮습니다.
현대인이 살기에 매우 불편한 곳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방학 중에는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도시 사회에서 영적으로 지친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변변한 프로그램도 없고, 이곳을 설립했던 대천덕 신부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이 분의 영성과 흔적이 남아 있고 그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안식과 힘을 공급받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다녀왔었는데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에 어떤 평화나 기쁨이 있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그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허름하고 불편한 곳이라 할지라도
정말 맛있는 음식점에는 사람들이 물어서라도 찾아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 부흥이 없는 것에 대해서 탄식하지 말고,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이 없는 것에 대해서 더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꿈이 있고, 비전이 있고, 말씀이 있으면, 지남철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말씀을 외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시는 욕망과 거짓과 교만이 가득한 곳입니다.
물질과 권력으로 오염되어 사람들의 영혼이 혼탁해 있고, 경쟁과 이기심으로 평화와 안식이 없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을 때 먼저 데리고 간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바라보거나 의지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켰던 학교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모세오경 중 민수기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인데
백성들을 인구 조사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목 외에 히브리 성경의 원래 제목이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첫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로 책 제목을 잡습니다.
민수기의 원래 책 제목은 ‘베 미드바르’ 곧 ‘광야에서’입니다. 1:1
저는 이 책 제목이 더 좋습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며 겪었던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도 많이 하고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렇지만 광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백성이 처음 만나 정을 쌓았던 사랑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치 신혼 생활을 보냈던 곳과 같습니다. 이는 호세아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외면하자
하나님은 호세아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광야)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2:14-16)
이는 마치 시골에서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서 겪었던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서울에서 그만 아내가 잘생긴 사내에게 바람이 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습니다.
지친 남편이 아내의 손을 붙잡고 “우리 다시 시골로 돌아가자”
이것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불평도 많았지만 그래도 광야에서 지내던 시절이 행복하고 순수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는 이런 사연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광야라는 장소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 영혼을 얽어매고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라는 요청입니다.
마치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민족을 향한 외침과 같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해졌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해졌습니다.
삶에서 불안과 불만이 더 많아졌고 감사와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사라졌고, 기도의 기쁨과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청년에게 주셨던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
그런데 그 청년은 어떠했습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지금 그 자리가 내 영혼을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자리를 부둥켜안고 우리 영혼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사실 재물을 다 내어놓고 따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 중에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끔이라도 우리는 광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평화를 얻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세례 요한은 삶은 매우 검소했습니다. 6절입니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세례 요한의 모습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합니다.
엘리야나 세례 요한이나 광야에 살면서 부드럽거나 호화로운 옷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약대털은 사막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며,
엘리야와 메뚜기와 석청은 건강음식이 아니라 사막에서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입니다.
포도주나 고기나 곡식을 먹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 중요했지, 먹는 것이나 입을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삶의 모델도,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잘 먹고 좋은 곳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마6:24)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아지면 그 풍요로움에 취하고 물질의 권세에 휘둘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은 날로 호화로워지고, 내가 굴리는 차는 럭셔리해지고, 기도원은 최신식이 되어가지만
우리 영성은 더 고갈되고 우리 마음은 더 탐욕스러워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 아닙니까?
▲오래 전 어떤 기독교 대담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대화입니다.
당시는 목회자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그 대담에서 서울대 정진홍 교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감리교회의 장로입니다. 제가 평신도로서, '목사님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목사님들은, 남들이 좋아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서는 한 발짝 늦게 가시고,
남들이 싫어하고 마다하는 힘들고 어려운 길엔 한 발짝 앞서 가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모시고 있는 목사님이 그러신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 그 분을 도울 것입니다."
지금은 옛 이야기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목회자들이 들어야 될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례 요한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세례 요한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우리 안에 말씀의 영성이 살아날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는 물질이 지배력이 예전보다 더 커졌습니다.
옛날에는 배만 주리지 않으면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집, 좋은 차, 몇 가지 명품, 최고 사양의 전자 제품,
문화 환경과 수준이 받쳐주지 않으면 매우 불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좀 더 검소하게 살려는 노력은, 물질의 권세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행동이될 것입니다.
물질의 권세에서 벗어난 만큼 우리 영혼이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좀 불편하게 살고, 좀 안 쓰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예수원이라는 곳은 정말 안 쓰며 검소하게 사는 곳입니다.
겨울에 갔던 예수원은 좁고 춥고 부족한 곳이었습니다.
처음 갔을 때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바로 지붕 밑 다락방이었습니다.
중간에 대들보가 지나는 한편으로는 낭만적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좀 걱정스러운 비좁은 공간이었습니다.
한 겨울 추위에 난방을 아끼는지 예수원 곳곳은 추웠습니다.
방 안에서도 이불을 둘러쓰고 있어야 했고 도서관이나 기도실에서는 연방 손과 무릎을 비벼야 했습니다.
전등 불빛은 너무 희미해 창가의 햇빛에 의지해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식사는 정말 절간보다 더 심했습니다. 시원한 강원도 김치에 그때그때 나오는 나물 무침 하나,
그리고 멀건 국물 그뿐이었습니다. 밥은 잡곡밥이지만 항상 모자라게 배급이 되었습니다.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아서 동일한 시간에 식사를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딱 20분이면 모두가 식사에서 정리까지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맛이 없다고 불평이더니 나중에는 배가 고파 두 그릇을 비우기도 하였습니다.
짧지만 이런 예수원 생활을 경험하면서 절감했던 것은,
우리 생활이 너무 낭비가 많고 에너지 소모량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며 가장 소모적인 동물일 것입니다.
▲검소한 생활은 물질의 횡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엇보다 물질로부터 자유 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이 깊은 종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목회자들은 하나님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 부양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생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살기는 쉽지 않지만 목회자들은 늘 세례 요한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들 중 가장 큰 자라는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큰 자됨은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어느 위치인지를 잘 알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임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행차에서 영광을 받을 자가 아니요, 그 앞에서 외치는 소리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절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말씀하듯 세례 요한은 ‘소리’ 같은 존재입니다.
소리는 자기 얼굴이 없습니다. 다만 뒤에 오는 주인공을 빛나게 하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세례 요한은 대단한 선지자였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온 유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이
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는 것(행18:25, 19:1-4)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촌 형님뻘이 됩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학자들은 예수님이 초기에 세례 요한의 운동에 동참했을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권위나 영광을 주장할 충분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능력 더 많다.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끈으로 엮은 가죽신을 주로 신었고, 이스라엘 땅은 건조해서 먼지가 많았습니다.
그 더러운 신발을 벗기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서는 종의 하는 일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세례 요한이 위대했던 것은 이처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알아보고, 그것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기득권이나 명예 때문에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질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을 세워주기보다는 오히려 이용하고 짓밟으려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또한 자기 위치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실패하는 것들 중 하나가 자기 위치나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높은 자리만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분수를 넘어 과대 권력을 행사하며 자기 영광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교주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자기들이 예수님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단들뿐만 아니라 기성교회도 위험합니다.
기성교회 당회장이나 목회자의 자리는 세상의 어떤 권력에 부럽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광야의 소리 같은 존재들입니다. 자신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되고
목회자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지시하는 소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데 그것은 정결이나 회개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안내자에 불과하고 성령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설교자의 임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길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안내하는 자입니다.
설교자는 수도관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그 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부어집니다.
그런데 수도관이 녹 쓸어 있거나 막혀 있으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못합니다. 목회자는
그래서 항상 도덕적으로 정결하고,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하며, 말씀과 지식에 깨어 있어야 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역사하시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가끔 죽을 쑬 때도 있고 스스로 성공적이라 판단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유려하면 더 성령께서 쉽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눌하거나 논리에 맞지 않아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유려하고 지식이 넘쳐도 거기에 성령이 계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간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제 생각, 제 어투를 보지 마시고 제 입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뒤에 계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설교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복음이 선포될 때 칭의가 일어난다”
즉 설교가 행해지는 곳에 칭의가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가톨릭의 성찬이나 미사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는 교리에 반해서
설교로 그 중심이 옮겨간 것입니다. 개혁 교회는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식을 채택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바로 하나님 말씀 자체이다”
설교가 행해지는 곳에 하나님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 칼빈은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설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입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입술을 타고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위대함입니다.
그러니 제 입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자들 또한 그래서 말씀을 선포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 부정한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례 요한을 보지 말고 세례 요한 뒤편에 있는 예수님,
세례 요한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과 같은 선포자들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 뒤에 계신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세례 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또한 이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런 두려움이 없이
마치 자기가 성령 세례를 주는 존재인 것마냥 자기 생각이나 자기 감정이나
섣부른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함부로 쏟아낸다면 그는 성령님을 참칭한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물은 단순히 우리 몸만 씻지만 성령은
우리 마음을 씻고 우리 존재를 불태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말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바라보지 말고 그 뒤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안에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내 삶을 이끌어가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게 되고,
그 힘의 강력함과 그분이 주는 위로의 따스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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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ramos/80144448444
※본문에 대한 "해석"을, 아래에 스크랩 했습니다.
◈왕의 사자 세례 요한 막1:2~8 2009-09-06
오늘 본문은 왕이신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왕이신 예수님의 사자 역할을 한 세례 요한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우리에게 밝히 보이고자 함입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유대인+이방인, 특별히 로마인)
로마인들의 개념으로는 왕이 행차할 때,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왕이 임하는 법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왕의 사자가 왕이 행차할 곳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왕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기에, 왕의 사자가 먼저 와서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왕의 사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입 (1:2~3)
막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오늘 본문 2절에서 세례 요한은 “사자”로,
오늘 본문 3절에서는 “광야에 외치는 자”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은 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왕이신 예수님 앞에 보내심을 받아 왕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3절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외쳐야 했습니다.
첫째, 그들에게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둘째, 왕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사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기에 왕이 행차할 때, 왕의 사자가 했던 일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왕의 사자는 왕의 길을 점검해서, 장애가 될 요소들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낮은 곳은 돋우고 높은 곳은 낮추어서,
왕이 지나가기 좋도록 모든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왕의 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왕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외쳤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죄악으로 굽은 그들의 마음을 회개하고서 곧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의 목적은 세례 요한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왕으로 강림하신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새 시대를 활짝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을 살펴보면서, 죄악으로 굽은 마음이 점차 곧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왕이신 예수님을 날로 닮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 세례 요한의 사역 (1:4~6)
막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이제 드디어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왕의 사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는 요한의 출생 기록이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가랴였고, 그의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습니다.
둘 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엘리사벳은 처음부터 잉태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요한을 낳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모두 다섯 명의 요한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요한 이외에, 사도 요한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자 마가의 본명도 요한입니다. 베드로의 아버지도 요한입니다.
또한 행4:6을 보면, 사도들을 심문하던 무리 가운데 요한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은 요한을 다른 요한들과 구별짓기 위해서,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왕의 사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본문 3절 말씀대로,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로 예언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눅1:80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실로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무엇을 외쳤습니까?
본문 4절은 그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사자 세례 요한이 해야할 사역이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마음이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한다는 의미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시 유대인들에게는 ‘세례 예식’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결 예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오면 물을 뿌렸습니다.
이와 같은 정결 예식이 유대인들에게는 전부였습니다.
단지 그 당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만
세례 예식이 특별하게 행하여 졌습니다.
과거 이방인으로 살았던 더러운 삶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끗한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 세례 예식을 행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죄인인 이방인처럼 세례를 받으라고 한 거죠)
눅3:2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은
결코 그가 임의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유대인들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전했습니다.
눅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나는 왕의 사자로서,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 뿐이다.
그러나 내 뒤에 왕이 오시리니, 그는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시리라.
그는 손에 키를 들고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시리라.
그리고서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와 같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 유대인들의 마음은 크게 찔렸을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마음도 역시 죄악으로 물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막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그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네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을 유대라고 불렀습니다.
그 위쪽을 사마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위, 곧 제일 북쪽지역을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요단 강 동편을 베뢰아라고 불렀습니다. (행17:10 베뢰아와 구분)
말하자면 수도 예루살렘과 그 인근의 유대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그 곳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많았고,
또한 그 곳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지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세례 요한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나아가다”와 “세례를 받다”가 모두 미완료형입니다.
이는 계속되는 동작을 뜻할 때 사용되는 시제입니다.
또한 여기서 “온”과 “다”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세례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눅3: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눅3: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이와 같이 그 당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다 세례 요한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들이 이방인인 것처럼,
그들은 요단 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는 대부분 피상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이신 예수님이 오셨다가 떠나셨을 때,
마가의 다락방에는 불과 백이십 명 정도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야 어떠했든지 간에, 세례 요한은 왕의 사자로서
자기가 해야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왕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사자로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칭찬을 하셨습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아브라함보다도, 모세보다도, 다윗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왕의 사자로서, 그가 해야할 사명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결과야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왕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막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여기에 세례 요한의 충성스러운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입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사자로서, 오로지 왕이신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입었던 옷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었습니다.
낙타 가죽으로 만든 옷이 아니었습니다. 낙타 털로 실을 만들어서
그것들로 짠 엉성한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옷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허리에는 질긴 가죽으로 띠를 둘렀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느지막하게 얻은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얼마든지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슥13: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털옷을 입었습니다.
자기들이 참 선지자인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겉으로는 양의 옷,
다시 말해서 양의 털옷을 입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털옷은 본시 선지자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백성들에게 선포해야 할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털옷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털옷의 효시는 누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왕하1: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선지자 엘리야는 털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불려졌습니다.
또한 그는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털옷과 가죽 띠는 선지자들의 전통적인 복장이 되었습니다.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와 같이 하나님이 강림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가 보내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자는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신약 성경은 엘리야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세례 요한에게서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눅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이는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했던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온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하고서,
선지자 엘리야가 사역했던 바로 그 곳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마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왕이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왕의 사자로 오리라 했던
선지자 엘리야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의 강림을 선포해야 할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세례 요한이 먹었던 음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레11:22에 의하면, 메뚜기는 곤충 가운데서 예외적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청(石淸)이라 함은 벌들이 돌이나 나무 사이에 모아놓은 야생 꿀을 의미합니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었기에,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나아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또한 군인들과 세리들은
좋은 옷을 입었고, 좋은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겉모양에도, 또한 다른 사람들의 겉모양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오로지 자신의 사명에만 충성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라는 칭찬을 예수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충성입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합시다.
그리해서 세례 요한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에게서 큰 칭찬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세례 요한의 증거 (1:7~8)
막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능력 많은 이라고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그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마21:26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눅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자기 뒤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왕이 아니라, 왕의 사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뒤에 오실 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당시에 이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종은 몸을 굽혀 주인의 신발끈을 풀고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겨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떠서 주인의 발을 깨끗하게 씻겨드려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지금 세례 요한은 단순히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기 위하여,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는 왕 되신 예수님을 올바르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왕,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왕의 사자일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막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어디까지나 물로 세례를 베풀 뿐입니다.
그는 결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삼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사람인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수가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이위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바르게 증거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왕의 사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예수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왕,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보좌에 모심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되고, 또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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