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 있는 새 교훈 막1:21-28 2011.12.04.설교스크랩, 출처
◑그의 교훈에 놀라니
예수님이 처음으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2절,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
27절, “다 놀랐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들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27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말씀을 전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행2:37)
“사람마다 두려워하였다”(행2:43)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고 찔리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오늘날의 강단에서도 이런 반응이 일어나고 있을까?
말씀이 우리를 심각하게 만들고, 말씀이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들고,
우리 자아를 부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말씀이, 도전적으로 자신을 휘감았던 때가 언제입니까?
‘강단의 위기, 현대 설교의 위기’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강단에서는 내 삶과는 관련되지 않는 말씀이 선포됩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잊어버리고 맙니다.
설교에 권세가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혹자는 ‘설교 잘 하나’ 평가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말씀을 듣습니다.
▲설교자들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전했는데 전혀 반응이 없을 때입니다.
몇 년 동안 말씀을 전했는데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그럴 때 설교자들은 절망합니다.
자기 능력을 탓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성도들의 변하지 않는 완악함에 분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제 설교를 많게는 5, 6년, 짧게는 2, 3년 들었습니다.
무슨 변화가 있었습니까?
하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제 자신도 변하지 않는데, 전적으로 순종하기 어려운데
무얼 더 기대하겠습니까?
교회의 위기는, 강단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설교가 선포되는 이 강단은, 비유하자면 성전의 지성소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섰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지식적인 교훈이나 얄팍한 감동이나
우스갯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현대의 설교가 ‘권세 있는 새 교훈’과 거리가 먼,
아무런 권세도 없는 옛 교훈으로 전락한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설교는 지식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귀신입니다. 24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이 본격적인 기적이나 사역을 행하기도 전에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얼마나 능력 있는 분이지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공생애가 한참 지난 후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서야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부인하거나 달아났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무지에 비하면, 귀신의 지식은 대단한 지식이었다 할 것입니다.
정답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족집게처럼 알아맞힙니다.
그래서 ‘귀신같다’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떤 분이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귀신이 들린 어떤 사람을 가운데 놓고 온 교인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지만, 귀신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성경 말씀을 읽기로 했습니다.
한사람씩 돌아가며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시원찮게 믿는 사람이 읽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설프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귀신들린 사람이 눈을 치켜뜨면서
“너는 안 믿잖아!” 하더랍니다. 그 말에 이 분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 엎드리며 “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두려움으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기도가 터져 나왔고
이 일을 계기로 시골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귀신은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이런 자신의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어떤 선한 일이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달변의 설교와, 신학자적인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는 대표적으로 서기관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지식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최소한 민중들에게조차 감화를 주지 못했습니다.
군중들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하며
서기관의 가르침을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 조항이 모두 613개이며, 안식일 계명은 49개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달달 외고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구약 말씀 외에도 미쉬나 라는 구전 말씀, 이것에 대한 해석집인 할라카,
학가다, 탈무드 등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말씀과 말씀 적용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민중들에게는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마23:3-4)
오히려 지식이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찾는 데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어눌한 말일지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전하며, 제 설교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제 설교가 지식에만 넘치는 설교가 아닌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머리를 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슴을 치고, 우리 무릎을 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디의 일화입니다. 무디가 한 번은 말씀을 전하고 내려왔는데
교인 하나가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무디의 설교중 문법이 틀리고,
단어가 부정확한 곳을 몇 곳을 지적했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정식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구두수선공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전도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식이나 문법이 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틀린 문법을 가지고도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당신은 그 정확한 문장으로 몇 사람이나 구원시켰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몰라서 못 믿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훈련을 받지 못하거나, 성경공부를 많이 못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구절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무겁게 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한마디만 깨달아도
우리 삶에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 한 마디 말씀만 순종해도
우리 삶에서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둘째,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속 안에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안식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회당은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합니다.
그는 정말 어떤 영적인 세력에 의해서 장악된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는, 더러운 귀신에 들린 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서기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일입니다.
그는 귀신에 들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온갖 탐욕의 더러운 영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길 가’ 밭처럼 말씀의 씨앗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그 대표적이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서기관들 또한 탐욕에 사로잡혔기에
권세 있는 말씀들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13, 15, 25, 27)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지만 그 안에 온갖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선언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는 다른 아닌 이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첫 번째 이적을
왜 귀신들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으로 행하셨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가장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인이 바뀌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귀신에 장악되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더러운 욕심이 떠나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지배가 시작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었던 까닭은, 이처럼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 생명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존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권세 있는 존재로부터 권세 있는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못생겼고, 지식이 모자라거나 말이 어눌할지라도
사장이나 대통령의 말은 그 자체로 권세가 있습니다.
성철 스님같은 분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면
거기에 대단한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사람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동네 아저씨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면
사람들이 당연한 말을 왜 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볼 것입니다.
말 자체에서 권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말을 권위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인간의 권세를 힘입어, 영적인 세력을 대항하려 하니
해결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가 회당 안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출입하지만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5) 말씀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단순한 말씀 한마디에 귀신들도 순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이 희한한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날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마술하는 유대인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행19:13) 하면서
악귀를 쫓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악귀가 달아나기는커녕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행19;15) 하며 그 사람에게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말이나 주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 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본질적으로 그 말에 권세를 갖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롬8:38-39)
대적할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하고 순종하듯이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순종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런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권세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진 권세는, 물질이나 지위나 힘이나 사람이나 세력의 권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권세 있는 새 교훈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복하십시오.
▲요즘 제가 가장 많이 감동받고 있는 말씀은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입니다.
스룹바벨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넣어서 기도하십시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내 OOO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러할 때 진짜 큰 산과 같은 장애물들이 변하여 평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권세요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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