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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지 못했던 성령님의 계획

LNCK 2015. 3. 18. 09:02

◈사람이 알지 못했던 성령님의 계획      행16:6-10   2015.02.08 스크랩, 출처

                                            *관련글: 혼란과 환란을 통해 일하신다

 

◑매 시대마다, 기독교에, 불확실성과 혼돈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는 종교적인 혼동기와 기독교의 사명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전에 없었던

신앙적인 변화와 불확실을 겪고 있는 시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로 세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는, 세계 복음화가 진행되는 도중에, 먼저 믿은 나라들이 신앙을 떠나는 일이 발생을 했고,

둘째는, 이슬람권과 기독교 문명 간의 갈등이 너무 커져서, 세계가 양분화 될 수 있는 위기를 당하게 됐고,

셋째는, 종교의 유익함에 대하여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모든 종교가 자신을 성찰해야 될 필요를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들은, 전례 없는 일들이지만,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과거에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도, 당시의 기준으로는 전례가 없는 위기와 혼동을 겪으면서

신앙을 지켰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민족만의 경험을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한반도가 분단된 후에, 북한에서 예수를 믿던 사람들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오면서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고, 교회가 문을 닫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될 때, 그들은 정말로 세상이 끝나는 것과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신사참배를 요구할 때, 참배를 하자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될 것이요,

거부를 하자니 생명의 위협을 겪게 되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를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유럽의 기독교인들을 흉보기를 좋아하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한 세기에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대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다른 종교를 가진 나라들과 싸운 것이 아니고, 다같이 예수님을 믿는 나라들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두 번이나 전쟁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에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이런 기독교 국가들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전쟁하는 것을 경험한 후에

그들은 신앙에 대하여, 신앙이 과연 인간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인 기록이 적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중세에 '암흑시대'라는 것이 있었지요.

암흑시대.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길래 암흑시대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흑사병 때문이라는 이론도 있고, 기근 또는 종교 재판 때문이라는 이론도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흑사병이 생겨서 인구의 1/3이 죽어나가는 일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생각을 하고,

인류에 미래에 대하여 신앙의 미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생존했고, 믿음은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생존력과 신앙의 생존력을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즉 혼란 가운데,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성 어거스틴이 살아있을 때 야만족이 로마제국을 쳐들어왔지요. 당시 로마제국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반대로 야만족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는데, 그들이 로마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성어거스틴은 그것을 보면서 분명히 번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느냐?’

번민 끝에 어거스틴이 내린 결론은 사람의 나라는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진다라는 것이었고,

그 내용을 쓴 책이 신의 도성입니다.

 

참고로 로마에 쳐들어왔던 야만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무엇을 갖고 돌아갔는지 아십니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북유럽과 중부유럽이 복음화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늘 조바심을 내고 불안해하지만, 하나님은 늘 침착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패턴이 그것입니다.

 

사람은 패닉상태에 도달하더라도, 하나님은 침착하십니다.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하소연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비슷한 심리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금은 말세라고 생각하고,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조바심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 한 예에요. 바울은 원래 아시아 사람이고,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에베소 교회라든가, 갈라디아 교회라든가, 안디옥 교회는 전부 다 아시아에 있는 교회에요.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이 바울을 막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은 사람이 말씀을 전하도록 도우시는 분 인줄로 생각을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말씀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중에, 밤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밤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서 이리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바울은 우리가 유럽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줄로 인정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바울에게는 한 개인의 선교전략에 변경이지만, 기독교 역사에는

기독교가 서구의 종교가 되는, 그 계기가 되는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왜 기독교가 서양 사람에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느냐?

사도바울이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이 그것을 막고, 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돌리셨기 때문이에요.

 

   왜 그렇게 하셨느냐?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실때,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그것을 우리에게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후에 알게 됩니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한 후에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라는 것은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에요.

미리 알고, 이해하고,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아직 알지 못하지만, 아직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궁전에 들어가,,감사는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도 감사하지 않지만, 사람에게도 감사하지 않아요.

부모가 그렇게 큰 사랑으로 키워줬지만, 감사하려하지 않아요.

친구의 사랑이든 누구의 친절이든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늘 불만이에요. 더 갖고 싶어 합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늘 불만이지요.

 

그러나 신앙은, 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요.

내 소원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신앙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내 소원이외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서로 달라요.

그것이 불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장이란, 하나님의 뜻과 내가 소원한 것이 다를 때

내 소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노라면

거기에 더 큰 축복과 더 기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고하다가 성령이 막으시니까 순종했어요.

   반발하지 않았어요. 고집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왜 막으시느냐? 이것이 좋은 일인데 왜 하지 말라고 하느냐?’ 그러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더니 주께서 더 큰 문을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그리스, 마게도냐에, 즉 유럽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운드오브뮤직>에 보면 주께서 문을 닫으시면 창문을 여신다라는 대사가 있는데

   바울의 경우에는 작은 문을 닫으시고 더 큰 대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계획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낫습니까? 내가 고집하고 있는 내가 아는 좁은 범위의 인생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있는 줄도 알지 못했던 더 큰 세상, 더 큰 가능성의 세상을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것이 낫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그것을 놓는 것에 대하여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을 믿고,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지적인 행위가 아니에요.

머리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제일 어려워요.

 

그러기 때문에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어려웠어요. 예수님에게도 어려웠어요,

예수님에게 어렵지 않았다면,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간구하셨겠습니까?

 

예수님에게도 당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여서 부활을 얻게 하시고,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에요.

 

신앙의 훈련은 내가 익숙하고, 좋아하고움켜쥐려고 하는 것을 내려놓는 훈련을 반드시 수반합니다.

이것은 괴로운 일이에요. 힘든 일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놓아버리면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나는 아무것도 없고,

 

나는 아무 길이 없는 그런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게 아니고,

이전에 알지 못했지만, 더 좁고 또 하나님의 넓은 지혜를 보여주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님이 열어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곧바로 목사로서의 부르심을 느끼고

그 때에 제가 곧바로 주님을 섬기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어요.

 

아직은 제가 그 일을 하기에 아직 배워야 될 것과, 경험해야 될 것과,

또 인격과 모든 면에 훈련을 받아야 했어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러던 중에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주님을 섬기는 일은 이후에 할 수 있지만

다시 말하면 제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 목사님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제가, 신학대학에 즉시 진학하기보다는, 미국의 일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이런저런 것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고, 나중에 대학원과정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그런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저는 몰랐어요.

 

제가 제 욕심에 의해서 그것을 한 게 아니고,

주님을 섬길려고 하고, 주님의 종으로 헌신한 후에

그 목사님을 통하여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람이 무엇인가 주님께 드리고자 할때

주님이 그것을 거저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무엇을 드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떡하면 더 가질까? 더 얻을까? 이런 것만을 염려하고,

신앙을 더 갖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려하지

무엇을 드린다든가, 양보한다든가, 희생한다든가,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꺼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고집을 피워서도 아니고,

하나님께 중언부언 기도해서도 아니에요. 무엇을 얻는 길은 무엇을 내려놓는 것을 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더 기름진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했더니

그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너와 내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배와 그물을 버린 후에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무엇을 버린 후에야 주님이 예비하신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믿음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순종.

 

사도바울이 영발이 많아서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마게도냐로 가게 하신게 아니에요. 이것은 영적인 테크닉이 아니에요

 

그도 순종해야 했습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아시아로 가는 것이었지만

성령이 그것을 막으실 때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했습니까? 기다렸어요. 기다림.

주님의 인도를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그제야 밤에 환상이 보이면서 바울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반대방향.

그러니깐 지금도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이 보스포러스해협 아닙니까?

보스포러스해협을 기준으로, 동쪽은 아시아고 서쪽은 유럽인데, 지금까지는 동쪽만을 생각했는데

성령께서 서쪽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더 큰 세상. 더 많은 준비된 영혼. 그것을 바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영발이 뛰어나서 이런 인도를 받은게 아니고,

순종하고 기다렸기 때문에, 인도를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고집, 자기 생각, 자기 계획에 붙들려 있는 한, 주님의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만 바쁜 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쉬어야 됩니다. 멈춰야 됩니다. 중단해야 됩니다.

 

길에 스톱(정지)싸인이 있지요. 우리나라는 스톱사인에서 차가 서지 않습니다. 슬슬 눈치 보다가 갑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스톱사인 있으면 차가 완전히 멈춰야 됩니다.

완전히 멈추지 않으면 그건 교통위반 한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멈춰야돼요. 하던 일을 속도를 줄이는게 아니고, 멈춰요. 스톱할 때.

사도바울이 스톱했어요. 그랬더니 주께서 이쪽으로 가거라그의 길을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가 자신의 말발로 지식으로 재능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막으시면 도리가 없어요.

 

성령이 허락을 하셔야 돼요. 성령이 인도하시고, 능력을 주셔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을 기다린 것입니다.

 

 

성령에게는 전략이 있고, 계획이 있고, 청사진이 있습니다.

   그건 구원 사역입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역사하시지만, 계획 없이 움직이는 분이 아니에요.

그것을 우리가 다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왜 북한의 평양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어요. 그래서 평안을 뭐라고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북한이 공산화가 됐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일을 허락하실 수가 있느냐?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됐기 때문에

북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해서 남한의 교회가 부흥하게 될 수가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흩어짐으로 전 세계에 한인교회들이 세워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지만, 하나님은 손해를 입지 않고, 복음은 진부하게 됩니다.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무슨 일을 하시느냐? 그것은 한가지로 이해하면 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방향으로 하신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십니다.

'왜 로마제국에 야만족이 쳐들어오도록 허락하셨느냐?'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 질서, 현재 상황, 기득권 이런 것만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구원, 인류를 구원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으시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질서, 기득권 이런 것이 무너지더라도

그런 혼란과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사람이 성령에게는 계획이 있어요. 성령은 전략을 따라 움직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부릴 수 없습니다. 그 반대에요. 성령이 우리를 부리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따라오시는게 아니에요. 그 반대로 우리가 성령을 따라가야 됩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성령충만하다는 말은 성령을 쫓는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이 시대에 성령의 계획을 신뢰하고 쫓을 수만 있다면

이 시대에 우리의 사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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