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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

LNCK 2015. 4. 19. 20:24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            3:20-30           12.02.19.설교 스크랩, 출처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이 수많은 귀신들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찾아왔습니다.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의 사역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귀신의 왕의 권세를 이용해서

다른 귀신들을 내어 쫓는다고 정죄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미쳤다고 말한 것은 부정적인 의도에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생에서 한번쯤은 이런 미쳤다는 말을 듣는 것도,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어떤 일에 미쳐보라는 뜻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저는 이것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일들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짧은 공생애 동안 쉴 틈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고 전합니다 :20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일에 미친 사람입니다.

미친 그 순간은 마치 천국과 같은 시간이라 할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쳐야 일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저에게는 대학시절입니다.

예수님에게 미쳐서 교회 일로, 성경공부로, 선교로 돌아다닐 때입니다.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에도 미쳐서, 휴학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때 했던 일이 대학기독신문 창간이었고, 기독교문화연구회 활동이었으며,

복음주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공정선거감시운동을 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제 인생에서 가장 선명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간입니다.

그 이후 인생은 아무 생각 없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 같습니다.

 

미쳐야 일이 되고 사건이 일어납니다. 옥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그분이 인도하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옥 목사님이 제자훈련 철학을 말씀하시는데, 그 첫 번째 강의가 광인론입니다.

제자훈련에 미쳐야 한다는 뜻의 강의였는데

그 메시지가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옥 목사님의 일생은 제자훈련에 미쳐서 보냈던 생애였고,

그 결과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라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이처럼 교회 일이든 세상 일이든 사업이든, 그 일에 미칠 때 열매가 나옵니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후회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제 지금 기도 제목은 하나님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에 미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해야 될 일이 있는데 제 자신을 쏟아 붓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에서입니다.

 

이른 비의 은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늦은 비의 은혜로 우리를 적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미쳤다는 말씀을 나누었지만

지금 예수님에게 미쳤다고 말한 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검열관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바알세불에 씌웠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한 종류인데 집 주인또는 파리들의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으로 쓴 유명한 소설이 파리대왕입니다.

 

바알세불 외에도, 본문에는 귀신의 왕 또는 사탄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원래 사탄은 구약에서 고발자’ ‘대적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강력한 악의 세력으로서 등장합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기적들을 행했기에,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조사한 후, 좀 더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에게 귀신들렸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기적 자체보다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각과 어긋난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특히 안식일을 범하고,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처럼 행세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해, 기적을 기적 자체로 판단하지 않고

온통 빨간 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명확한 사실이었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고

그래서 기적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의 왕이었다고 덮어씌운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마녀사냥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단이 인간에게 씌워 악한 일을 하게 한다고 하여

종교 재판소를 통해 대대적인 학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온갖 잔악한 고문 도구들이 이용되었고,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화형이나 극악한 형벌에 의해서 죽어갔습니다.

 

반대세력이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백년 전쟁의 영웅 잔다르크도 마녀로 정죄 받고 화형에 처해졌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잔인한 짓을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사회에서는 좌익, 빨갱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마녀사냥의 사례인 것 같습니다.

 

자기 반대파나 좀 더 진보적인 생각을 표출하면, 무조건 좌익 빨갱이로 몰아붙입니다.

정부의 어떤 정책에 반대하면 빨갱이가 되고,

심지어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고 파업을 해도 빨갱이로 몰아 부칩니다.

 

한국 전쟁과 남북 분열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 단어는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사건 하나하나를 객관적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판단의 말들이, 한 인간을 얼마나 왜곡 시키고,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의 말에도 옳은 것도 있고, 배울 것도 많습니다.

서로 배우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인격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행동을 왜곡하는 단계까지 간다면, 그것은 죄라 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세력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고

 

이런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설 수 없다는 비유입니다.

 

귀신의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을 내어 쫓으면

그것은 결국 사단의 나라가 분열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족이나 나라도 분열되면, 결국 패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위기는 어떻게든 버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갈라서거나, 집안에 큰 분열이 있을 때면, 그 가족은 온전히 설 수가 없습니다.

 

나라도, 외부의 적 때문에 망하는 것 아닙니다.

내부가 분열되어 있을 때, 위기에 힘없이 무너지는 법입니다.

 

사회나 교회나 어떤 공동체도, 내부의 분열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귀신이 귀신을 대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모함하는 무리들을 향해,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제는 노골적으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본질을 말씀해 주십니다.

 

27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여기 나오는 강한 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이라는 악의 세력이 사람들과 세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악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의 힘이 필요합니다.

같은 말씀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11:21-22)

 

예수님은 더 강한 자로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악의 세력들을 묶고,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인간들을 자유케 하였습니다.

 

옛날 서부 영화를 보면 어떤 마을을 악당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당들보다 더 강한 영웅이 등장하여 악당들을 쓰러뜨리고

마을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그런 강한 자로서 오셨습니다.

 

사단을 비롯한 악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일제에 의해서 강점당해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방된 것과 같습니다. 일본이라는 강한 자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라는 더 강한 자가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귀신 축출 사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난 해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또한 창녀라고 추정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자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공궤했으며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십자가에서 그 죽음 지켰으며

부활하신 후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거라사 지방의 광인은 군대 귀신에 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귀신의 지배를 받아서 자기 몸을 해하기도 하고,

사람을 해치기도 해서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성령의 힘으로 해방시키자

그들은 건전한 인간이 되어 가족에게 돌아갔고, 예수님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해방 사역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7-28)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우리는 충분히 강합니다. 안전합니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 귀신 축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고대사회에서처럼 귀신이 초월적인 능력으로

사람을 제어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떤 병이나 정신적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이 귀신의 지배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참 많습니다.

 

이번에도 보성 어느 교회에서 사이비 목사가 자기 자녀 셋이 감기에 걸렸는데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하여 굶기고 때리고 하다가는 결국 자기 자식 셋을 죽이고 마는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신앙인들이 언제까지 이런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는

과학과 이성이 발달되지 못하고, 미신과 신화들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사탄은 이런 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노략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항하여 더 큰 능력과 기적을 이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현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현대 사회는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시대입니다.

병이나 귀신들린 현상은, 대부분 의사의 힘을 빌어서 해결되고 있습니다.

 

사탄도 이제는 이렇게 미신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노략질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연약한 사람들이나 미개한 민족들 가운데서는

이런 미신적 힘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사탄은 그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 특별히 과학적이며, 물질적 가치관을 통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살도록

그들은 이런 세상의 가치관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는 말씀이

현대 사회에는 더 타당합니다.

현대인들 중 이제 어느 누가 보이는 우상을 섬깁니까?

보이지 않는 탐심이 오히려 강력한 우상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한 복판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변두리로 쫓겨나, 미신적인 세계에서만 영향을 미쳐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그 뜻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성이 발달된 시대에,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성의 한 복판에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본회퍼가 성인화된 세계라는 단어를 그의 옥중서간에서 사용한 바 있습니다.

세계는 성인처럼 어른이 되었는데, 여전히 기독교는 유치한 단계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싸움은 강력한 물질주의적 세계관과의 싸움입니다.

물질주의 가치관이 강한 자가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소유해야 행복하고, 인간을 수단화 하는 것이

물질주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신앙인들은 이런 세계에 대항하여 보이지 않은 영원한 세계의 무한한 힘,

참된 인간성과 사랑의 힘으로 대항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더 강한 자로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이런 영적인 힘이 더 강함을 확신시켜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과 감사, 평화와 안식이라는 만족감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성령 모독죄

 

본문 말씀에서 또 하나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성령모독죄입니다.

28절과 2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귀신들렸다고 몰아붙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좀 걸립니다. 어떤 흉악한 죄도 용서하시는 주님이

유일하게 용서하실 수 없는 죄라고 하니 두렵기도 합니다.

 

성령의 사역이나 은사는 판단하기 쉽지 않는데, 섣불리 잘못 판단했을 경우

우리는 영원한 심판에 처해져야 하는가요?

 

예컨대 어느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라 하며 치유집회를 합니다.

만약 그런데 그것이 불건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판했는데

실제 성령의 역사였다면,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나 우리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어떤 능력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성령을 훼방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훼방죄는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에 대한 불특정한 비방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의 성령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 왜곡하고 있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지도층을 겨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령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사실로 믿고

예수님을 붙들러 온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나 주님의 형제 야고보,

이 사람은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였고 야고보서를 쓴 사람인데

이 사람들 또한 구원을 받지 못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유사한 표현이 다른 성경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5:16)

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 세력을 지칭하여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6:4-6) 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 죄는,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지만

후에 배교한 자들에게 해당하는 죄를 말합니다.

 

주님 앞에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심지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온다면 주님은 다시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심판을 내리시려 하다가도

그들이 돌아서면 심판을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 뿐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

죽을 때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사죄를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는, 죄라는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을 거절하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한 형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을 지배하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마치 빈 집과 같습니다.

이 집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 집이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지고,

그 집에 분란이 있거나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깨끗이 청소하여 놓았는데

이 안을 성령님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놓지 않으면

다시 나갔던 귀신이 되돌아옵니다.

 

이 귀신이 들어올 때는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그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늘 우리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채워 성령님이 지배하시는

아름다운 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