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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자의 비유 1

LNCK 2015. 5. 2. 09: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            4:1-12                 2012.03.04. 축약.출처보기

 

 

서론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농경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옛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파종법이 우리와 달랐습니다.

우리는 땅을 갈아엎고 평평하게 고른 후에 씨를 뿌리던지

아니면 따로 모판에서 키운 어린 싹을 밭에 심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먼저 씨를 뿌린 후, 밭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나, 가시떨기가 있는 곳이라도

나중에 갈아엎을 생각으로 씨를 뿌립니다.

 

돌밭은 석회암층을 말하는데, 이곳은 불과 흙의 깊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곳입니다.

이런 곳은 땅을 갈아엎을 때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다 보면, 이런 네 종류의 밭에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듣고

자기 직업이나 소유물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속히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도 않는 것 같고

예수님의 사역도 기대만큼 신통치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을 비롯한 지도층들의 핍박이 심해집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불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너희들의 선택은 결코 손해나는 선택이 아니다.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너희의 모든 손해를 너끈히 보상하고도 남으리라는 위로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했던 제자들과 전도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사람들이 거부하기만 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처음에는 반응이 있는 것 같더니

시련이 오니까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말씀의 양분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결과가 신통치 않기 때문에 낙담이 되고 무능력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정말 옥토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아름답게 자랍니다.

 

이제는 또 다른 제자가 되어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전도하는 탁월한 일꾼이 됩니다.

좋은 땅에서 맺은 이런 결실들 때문에 제자들은 과거의 실패나 손해의 아픔들을 잊습니다.

 

저를 전도했던 신앙의 선배가 늘 하던 말이 있습니다.

너 하나 전도한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이 분은 복음에 대한 열정은 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전도했고,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분에게는 제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요,

거기서 30, 60, 100배의 결실을 보고 있다고 만족해합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을 위로 하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씨들을 뿌렸지만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서기관들과 유대 지도층들은 마치 길가 밭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무리들은 떡만 보고 예수님을 좇았다가 자기 뜻과 맞지 않고

또 핍박이 오자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 청년은 마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처럼

재물과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앙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심긴 12알의 씨앗이 너무나 아름답게 자랐습니다.

이들이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어 온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낙심하지 말

우리 인생의 수고가 그렇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노력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 모든 수고의 곡괭이 끝에 금맥이 발견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나간 모든 수고가 오히려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5-6)

 

무디를 전도한 킴벌 선생처럼,

우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회학교 아이들 하나를 소중히 대하십시오.

여기에서 무디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고, 그들이 수백 수천 배의 결실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자녀 양육에 애를 쓰지만, 열매가 없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기억하십시오.

성 어거스틴은 참회록신의 도성을 저술하고 중세신학을 결성했던 위대한 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대 시절을 불량배들과 어울려 쾌락을 좇고, 도둑질도 하며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20대에는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 여자와 동거하여 사생아를 낳았으며

기독교 이단이던 마니교에 흥취했습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 모니카는 늘상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혀 변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모니카는 성인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암브로시우스는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줍니다.

 

이 말을 붙잡고 모니카는 눈물 뿌려 기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어거스틴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결국 위대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어머니의 믿음과 눈물의 기도에 대한 고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펼쳐주신 당신의 손은 이 깊은 흑암으로부터 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는 나의 어머니가 무릎 꿇고 눈물로 당신께 기도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여종인 나의 어머니는, 보통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을 위해 우는 것보다도

살아 있는 나를 위해서 더 울었습니다. ...

어머니께서 늘 기도하던 곳은 눈물로 바닥이 흥건히 젖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 눈물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어거스틴이 변화되고 효자가 되자, 모니카는, 그동안의 손해와 아픔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탕하던 자녀가 선물을 들고 오거나, 의젓한 모습으로 서 있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노고나 속을 앓았던 것들이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에서 입은 손해를 바라보지 맙시다.

좋은 땅에 심긴 씨앗들을 바라보십시오.

거기서 30, 60, 100배의 결실들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광산에 돌멩이를 캐러 간 것이 아니라 금을 캐러 갔습니다.

수많은 돌멩이들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우리 곡괭이의 끝에 금맥이 걸릴 것입니다.

그때는 앞서 있었던 손해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1. 길가 밭마음

 

열매를 맺는데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결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밭입니다.

 

무엇보다도 씨앗이 튼튼하고 좋은 품종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씨앗이 부실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씨앗이 좋다하여도, 그 씨앗이 길 위에나 돌밭에나 가시 떨기 위와 같은

좋지 않은 밭에 떨어지면 또한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비유에서 하나님 말씀이 씨앗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한 말씀일지라도 우리 마음 밭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말씀이 100배의 결실을 맺기도 하고, 아예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기도 합니다.

 

말씀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말씀의 씨앗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기근에 걸려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우리 마음을 닫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종교적 편견

길가 밭 마음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다져놓은 율법이나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너무나 확고해서

도무지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강하게 충돌했던 것은 안식일과 관련된 해석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이들은 병자를 치유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예수님의 사역을 비난했습니다.

 

정결법 문제에서도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어야 한다지만

예수님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전적으로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옳았습니다.

노동으로 지치고 물질에 욕심을 내었던 그들에게는 안식일을 전적으로 일하지 않고

쉬는 날로 지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정결법을 통해서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이들은 여기에만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저 앞서 계시고 역사는 변화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틀만 고수하였습니다.

안에서는 새 술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그들은 낡은 가죽 부대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은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 무대입니다. 그러니 역사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시대와 상황을 분석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이 다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성령론입니다. 성령의 조명과 인도에 따라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마치 모순된 말씀들의 집합체처럼 보일 것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성전을 세우고 율법에 따라 제사를 제대로 드리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런 형식적인 것은 다 필요없다고 말씀합니다.

 

길 가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 우리 마음이 이처럼 굳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무엇보다 인간의 교만입니다. 자기 경험이나 생각만이 옳다는 태도입니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실은 마음속에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틀로 제한시켜 놓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틀에 맞는 박제화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입니다.

처음 죄를 저지를 때는 두렵기도 하고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죄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결국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 곧 양심이 무디어지고 죽은 사람이 됩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과 사랑 민감 지수를 따진다면 고대의 소돔과 고모라 수준일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영화 <부시맨>처럼 고대인들을 현대 사회로 불러온다면,

그들은 현대인들의 죄에 대한 무감각과 사랑 없는 무정함에 놀랄 것입니다.

 

현대 사회처럼,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대화가 단절된 사회도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가 팽배하며, 죄를 행하면서도 무감각하며,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그 마음속은 늘 불안해하며 평안과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무감각한 현대인들을 향하여서 하나님은 고대인들보다 아마 10, 100배나

더 강한 소리로 외쳐야 겨우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알아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굳고 너무 완악해졌습니다.

 

셋째는 상처입니다. 어린 시절 상처를 많이 받았거나

성장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문을 닫아 버립니다.

한 번 크게 당한 상처 때문에 이후의 작은 충격에도 또 상처를 받을까봐서

얼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들의 반응은 무관심으로 나타나거나, 반대로 분노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도무지 자신의 속마음은 드러내지 않고 꼭꼭 감추어둡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입니다.

다 외면해도 예수님은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랑 앞에 우리는, 그동안 상처받고 닫혔던 마음들을 열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 문이 열린 순간,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생이 옥토 밭에 심긴 씨앗처럼, 열매를 맺는 풍성한 인생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이분들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열등감이 사라졌습니다.

이성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힘들어 하던 제 자신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저를 생각한다면

제가 목회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 설교를 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묵은 땅을 기경하여 옥토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을 의지하십시오. 이분께 우리 마음을 내어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 열매가 가득한 풍성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돌 밭'과 같은 마음

 

돌밭은 뿌리 없는 신앙입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이나 비바람 등 환난이 닥치면 넘어지고 맙니다.

 

뿌리 없는 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은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열렬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기적신앙, 축복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의 단계까지 신앙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6:26)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무리들이었습니다.

 

물론 처음 신앙은, 기적이나 은혜를 보고 믿으며, 축복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항상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문제입니다.

 

좀 더 뿌리를 내려서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의 단계까지 가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단계까지 가고,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을 때

신앙은 온전히 뿌리를 내렸다 할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는 어떤 시련의 폭풍이 몰아쳐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축복만을 생각하는 단계에서는, 시련이 오면 뒤돌아서거나 곧 배신하고 맙니다.

 

이는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물질이나 가문이나 외모나 상대방이 가진 조건을 보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상대방이 가진 그 무엇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작은 시련에도 곧 갈라서고 맙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깊어진 사랑은

어떤 시련이 와도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떡만 먹고 배불리려는 무리입니까?

아니면 어떤 시련이 와도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제자입니까?

겉보기에는 모릅니다. 겨울의 찬바람이 불면 푸른 소나무의 진가가 드러나듯

시련의 때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큰 나무들 중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입니다.

무려 그 높이가 100m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뿌리 깊이가 2-3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데도 어떻게 이렇게 큰 높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대신 이 나무는 그 뿌리가 옆으로 뻗어 있는데 25m에 달하며,

여러 나무들의 뿌리들이 서로 굳건히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함께 사랑으로 엮인 교회공동체가 우리의 부족한 뿌리를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뿌리가 견고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뿌리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가정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고 하여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 야곱 요셉 대에 가서야 애굽의 총리에 이르는 열매를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개척교회를 해서 짧은 시간에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이 단기간에 이른 부흥에 대해서 칭찬하자, 이 목사님이 정색하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결코 짧은 게 아닙니다. 저는 3대째 목회자 집안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개척 교회하시며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교회 개척을 위해 오랜 세월 기도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코 빠른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그 뿌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열매를 맺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오랜 세월 견디며 뿌리를 내려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축복받는 가정으로 성장하기까지도, 뿌리내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1대는 믿음은 뜨거울지라도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러나 23대가 흘러가면 신앙적 가치관과 분위기가 그 집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무심코 행하는 말이나 행동에서 신앙의 향기를 풍깁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빠른 성장과 열심을 자랑하지만

신앙의 뿌리로 따지면 서구 교회나, 심지어 일본 교회에 비할 바 못됩니다.

그들은 각각 2천년, 5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품성이나 교회가 속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거짓이 팽배하며, 약자에 대해서 인색하며, 물질문화가 팽배해 있습니다.

사회에 기독교 가치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당이 텅 비었다고 서구교회를 비판을 하지만

예배당은 빈 대신 그 가치관들은 서구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도덕이나 정의감 면에서 또 약자에 대한 배려 면에서는

한국교회나 사회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부자 중에서도 뿌리 있는 부자가 있고, 뿌리 없는 부자가 있습니다.

뿌리 없는 부자를 속칭 졸부라고 부릅니다.

졸부는 부자로서의 태도나 가치관이 부족합니다.

 

몸에는 명품을 휘두르고 있지만 사람이 명품이 아닙니다. 고귀함이나 여유가 없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되니 사람이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여깁니다.

돈을 쓸 줄도 모르고 인색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졸부만 많은 것 같습니다. 부자로서의 여유도 없고

지도층으로서 사회를 책임지려는 자세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는 제3세계인들의 눈으로 보면 시건방진 졸부국가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고 그 사회가 풍성한 열매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뿌리 있는 부자가 많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속 바윗덩어리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그 깊숙한 곳에,

바윗덩어리(돌밭, 석회암층)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견고한 바윗덩어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바윗덩어리 때문에 신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우리에게 행복이 없습니다.

 

마음의 병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암의 원인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라는 한자가 병질 부()에 바위 암() 자를 쓰고 있습니다.

암 덩어리가 바위처럼 딱딱하다는 뜻이지만,

이는 바윗덩어리와 같은 마음의 병이 암을 일으킨다고도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유전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대부분 최소 3년에서 최대 8년 사이에 큰 마음의 병을 겪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사업 실패나 사별이나 화병 등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이, 신체적인 이상을 일으키고, 우리 생명을 단축시킵니다.

 

감정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이 강물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지

무조건 막으면, 어느 곳에선가는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 대화하는 것을 보면 불안불안 합니다.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억눌렸던 물이 갑자기 터지니까 그렇고, 자기 느낌을 표출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분노의 표출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아빠의 폭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빠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분노가 쌓이는데, 이것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란 곳은 자기를 위장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니, 그곳에 자기 분노를 다 쏟아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 폭력입니다.

 

아빠의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없었던 엄마의 분노가, 이번에는 자녀들에게 쏟아집니다.

자녀들은 그 폭력을 장래의 자기 배우자에게 행사하거나, 자기 자녀들에게 대물림합니다.

 

마음속에 화병이라는 바윗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으면, 우리 인생도 불행하며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숨겨진 분노는 어떻게든 폭발하게 되어 있고, 이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내 안에 분노가 쌓여 있는데 이것을 무조건 성내지 마라, 참아라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내야 합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분노는 자기 보호 장치입니다.

자기가 공격당할 때 자기를 방어하려는 작용입니다.

 

짜증도 긍정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받은 상처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썩은 것을 마음에 오래 담고 있으면 우리 영혼마저도 썩게 됩니다.

성을 내되,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바윗덩어리는 어린 시절 상처로부터 발생하기도 합니다.

불신이라는 바윗덩어리도 있습니다.

 

인간의 발달 과정을 연구했던 심리 사회학자 중에 에릭슨이 있습니다.

에릭슨은 인생을 그 나이에 따라 8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될 과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단계 구분은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신체와 정신 발달에 따라

그때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인생의 도전과 과제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만 1세 사이에 형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뢰감이라 하였습니다.

신뢰감은 부모와 아기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배고프거나, 쉬를 했거나 불편할 때 아기는 사인을 보냅니다.

 

이 사인에 대해서 엄마가 사랑으로 응대해주면 신뢰감이 형성됩니다.

세상은 믿을만하다는 감정이 곧 신뢰감입니다.

 

만약 이 단계에서 엄마의 정성어린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아기는 세상에 대해서 불신을 갖게 됩니다.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기가 우는 것은 마치 아기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신하는 엄마가 이에 응답해주지 않는다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신앙을 갖기가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니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니 그로부터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많은 실패나 좌절을 겪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부정적인 자아상이라는 바윗덩어리가 생깁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때 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자존감도 없고, 주체적 결정을 하는 삶을 전혀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기에 조금만 실패를 경험해도 그것을 못 견딥니다.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바로 이 40년이라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노예 생활과 실패로 인해 자존감이 없어지고

부정적인 자아상이 생겼던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주어도

이런 실패의 바윗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큰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새 마음을 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윗덩어리와 같은 우리 마음을 녹이시는 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자에게 상처받고 권태감으로 지쳐,

아무도 활동하지 않는 한낮에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맞으며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의

마음을 녹였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를 이해해주고 그 말을 듣고 그 문제를 지적하자, 그 마음에서 생수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짝 밭에서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8:6)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메마르고 피곤한 심령 위에 기름과 생수를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연후에 눈물이 많아진 이유는

주님께서 내 바윗덩어리와 같은 마음을 깨뜨리시고

거기에서 샘물이 솟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샘물이 솟자 그 안에서 생명이 살고 거기서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선교 초창기에 우리 한국 사회에서 여인네들이

예수님을 많이 믿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된 노동과 가사일과 남편들의 학대로 고통을 받던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밤새워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면서

그들 마음 가운데 있던 바윗덩어리들이 녹아내렸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방망이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3:29)

 

방망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단한 바윗덩어리를 깨뜨리자

그 안에서 생수가 솟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꽃과 열매가 가득한 정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사역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6)

 

우리 성령님은 외과 수술의사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굳고 딱딱하고 바윗덩어리와 같은 마음을

레이저보다도 더 정교하게 제하여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위에 부드럽고 사랑스러우며 건강하고 활기찬 새 마음을 이식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과 인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수술은 정확하고 신뢰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