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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라는 씨앗

LNCK 2015. 5. 27. 09:52

스스로 자라는 씨앗                  4:26-29                 2012.4.22.설교스크랩, 출처

 

 

비관적 현실 속의 낙관 이유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기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그가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죄와 압제에서 해방해 주길 바랐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길에는 고난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권력 당국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 때문에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로부터는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더 답답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이들이 기대하던 메시야 상과

예수님이 실현하고자 하는 메시야 상이 서로 달랐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처럼 군사적이며 승리의 메시야 상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섬기고 낮아지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희생해야 하는

수난 받는 메시야 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하나님나라 운동을 위해 제자 열두 명을 선택했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련하고 연약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기거나 저주하고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답답한 상황이 예수님의 앞뒤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적도의 성자라 불리는 슈바이처는 대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예수생애 연구사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고전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책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세계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하나님 나라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돌기를 멈추지 않자,

예수는 그 수레바퀴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

수레바퀴는 그의 몸을 부수어버렸고,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갔다.”

 

예수님을 매우 비장한 묵시적 혁명가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슈바이처의 이런 예수님 상은 일면 맞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을 빼어버리고 예수님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면

매우 우울하고 비관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긴박감과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사셨지만

예수님은 매우 낙관적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오합지졸처럼 보이지만

그런 제자들을 지도자로 세워서 당신의 일을 해 가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굳건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어둠과 혼돈과 방해 세력들이 있지만

결국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실현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4: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비유 말씀에서는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씨 안에는 자체 생명력이 있고 땅에는 양분이 있어 씨는 스스로 자랍니다.

 

농부가 애태우거나 매일 지켜보지 않아도, 씨앗은 저절로 자랍니다.

27절에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고”,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라는 표현은

인간의 노력이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때가 되니까 씨앗에서 싹이 나고, 그 싹에서 이삭이 패고

결국 추수에까지 이릅니다. 하나님 나라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노력이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마가복음 주석서를 썼던 그닐카는, 이 비유를 해석하며 예수님의 이런 태도를

도발적인 태평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평함을 꿰뚫어보았던 제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는데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없습니다.

물론 그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요한이 겟세마네 기도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겟세마네의 비통함과 긴장감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신뢰하고 있는 주님의 여유를 더 크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대제사장적 기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십자가를 비통함이나 피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영광의 순간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가상 칠언이라 하여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한복음에는 이 절규의 외침이 없습니다.

다만 다 이루었다”(19:30)는 승리의 외침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심각함과 긴장감 배후에

이런 절대적 신뢰와 여유를 요한은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절대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노심초사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그런 신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 끝에 깨달은 욥의 고백입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42;2)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욥이 이해하지 못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55:10-11)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런 신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는 역사가 거꾸로 가는 것 같고, 어둠만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리 민족을 향한 주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십시오.

 

우리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와 통일과, 자유와 풍요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라가 바로 우리 역사 한반도에 이루어지는 것 또한 자명한 일 아니겠습니까?

인류 역사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역사입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이 자서전을 쓰면서 '역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 분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역사는 인류가 이상하던 것들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실제 역사는 인간이 이상하던 대로 불평등을 이기고 민주화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불의에서 정의로, 빈곤에서 번영으로, 분열에서 통일로, 전쟁에서 평화로,

개발과 착취에서 상생과 공존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역사를 거스르는 듯한 흐름도 있고,

제자리를 맴돌고만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도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신뢰할 때 작은 성공과 실패에 교만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득하게 옳을 길을 향하여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이삭이 나올 것입니다.

   아직 이삭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쓴 편지에서

그 아내에게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꽃필 날이 있을 것이외다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은 우리 하나님입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우리 시간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얼마나 안달복달하는지 모릅니다.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아몬드 로벨 저)라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 동화책이 있습니다.

이 내용 중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꽃밭을 가꾸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구리가 멋진 정원을 가꾸었습니다.

이를 본 두꺼비가 감탄하며 자기도 정원을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개구리는 , 멋지긴 하지, 하지만 너무 힘든 일이야.”하더니 친구 두꺼비에게 씨앗을 한 봉투 건네주었습니다.

씨앗을 받은 두꺼비는 씨앗을 뿌린 후 싹이 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좀처럼 싹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두꺼비가 씨앗을 향해 자라라하고 외쳤습니다.

반응이 없자 두꺼비의 소리는 더 높아져 갔습니다.

 

고함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울타리 너머로 두꺼비를 보며 왜 그렇게 소리 지르냐고 물었습니다.

두꺼비는 내 씨앗이 자라질 않아.”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는 네가 너무 크게 소리를 치니까 그렇지. 불쌍한 씨앗이 자라기를 무서워하잖아.”

 

그래서 두꺼비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늦게 두꺼비는 기대하며 다시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화가 없었습니다. “제기랄, 아직도 자라지 않았어. 씨앗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게 틀림없어.

내가 이야기를 읽어줘야지. 그럼 두려움이 사라질 거야.”

 

며칠 동안 두꺼비는 씨앗에게 이야기를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빗속에서 춤도 췄습니다.

바이올린도 연주해줬지만, 씨앗은 좀처럼 두꺼비의 생각대로 자라질 않았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두꺼비는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이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겁이 많은 씨앗인가 봐.”

하고는 두꺼비는 지쳐서 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두꺼비는 옆집 개구리의 환호성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얼른 일어나! 네 정원을 봐.”

정원에는 그토록 기대했던 싹들이 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두꺼비는 매우 기뻐했지만 한편으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야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조바심 내고 안절부절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내야 하는 것처럼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때가 되면 어련히 자랄 텐데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생각을 하면 인생에 여유가 생깁니다.

이것이 게으름과 회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나 바쁘고 조급해 하는 현대인들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다음 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텐베르크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있는 동안에도 복음은 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내가 열심히 전하지 않으면 복음은 멈출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편히 쉬고 있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자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루터의 이 말은 인간이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라는 씨앗 비유를 통해서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따라 스스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시고,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들을 세워 일을 하게 하십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굴러다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셔서 일을 하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가져야 조급하지 않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오히려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싹, 이삭, 충실한 곡식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우리는 또한 성장의 법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28절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씨에서 싹, 싹에서 이삭, 이삭에서 열매로 이어집니다. 처음부터 열매부터 맺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조급합니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으로 심자마자 열매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은 순서가 있고 그 그릇이 채워져야 합니다.

땅속에서 자리 잡는 기간이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되어야 씨는 발아합니다.

 

충분한 햇볕과 물기를 먹어야 싹은 줄기가 자라고 성장합니다.

모진 비바람과 폭풍우를 견뎌야 줄기가 굵어지고 뿌리가 깊어집니다.

가을이 되면 그때서야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조장(助長)이라는 한자를 아십니까?

조장한다는 동사도 있는데 도와서 성장시킨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유래는 이런 뜻과는 좀 다릅니다.

 

맹자(孟子)에 보면 송()나라의 한 농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농부는 자기 심은 곡식의 싹이 빨리 자라지 않자 그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나는 오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도와주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궁금하게 여겨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싹들은 자라기는커녕 모두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은 사람을 드물다.

자라도록 돕는 사람(助之長者)은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이니,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충분히 견딜 만큼 견뎌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루었습니다. 3세계 국가들이 모델로 삼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도성장이란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키만 쭉 자라고 마음이나 머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기형아 같습니다.

 

선진국들은 수백 년에 걸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진통을 거치며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짧은 몇 십 년 사이에 그것을 이루려 하니 잘 맞지가 않습니다.

 

경제 성장 수준에 맞는 도덕성, 민주주의 의식, 물질관, 나눔이나 행복에 대한 태도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가 겪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그 성장통입니다.

아이들이 급속하게 자라면서 팔다리가 쑤시고 아픈 성장통 말입니다.

 

자녀들을 기르면서도 오늘 비유의 말씀을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그 단계에 맞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부당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중국의 당송 대에 유명한 정원사 곽탁타가 있었습니다.

곱사병을 앓아서 등이 높이 솟아 마치 낙타와 같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입니다.

 

탁타는 나무를 심거나 옮기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장안의 부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와서 나무를 길러 달라고 청하였는데

이는 곽탁타가 심거나 옮긴 나무는 살지 않는 것이 없었고,

크고 무성하여 일찍 열매를 맺고 번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비결을 묻자 탁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나무로 하여금 오래 살고 또 번성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무의 본성을 거슬리지 않고 그 본성을 다하게 할 뿐입니다.

무릇 옮겨 심은 나무는 그 뿌리는 펴 주기를 바라고, 고르게 북돋우기를 바라며,

흙은 옛 흙을 바라고, 꾹꾹 다져 주기를 바랍니다.

 

이미 옮겨 심었거든 움직이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다시는 돌아보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심을 때는 자식처럼 사랑하고, 내버려 둘 때는 버린 듯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정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다른 정원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흙은 새것으로 바꾸고, 흙을 북돋우는 것을 지나치게 하거나 아니면 모자라게 합니다.

또 옮겨 심은 나무를 아끼기를 너무 은혜롭게 하고 걱정하기를 너무 부지런히 하여,

아침마다 가서 보고 저녁마다 가서 어루만집니다.

 

심한 자는 그 껍질을 손톱으로 긁어 보며, 나무가 살았는지 말라 죽었는지 시험하며,

그 뿌리를 흔들어보며 심어진 것이 엉성한지 치밀한지를 관찰하니, 나무의 본성이 날이 갈수록 멀어집니다.

비록 아낀다고 하지만 그 실제는 해치는 것이요, 비록 걱정한다고 하나 실제는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27절의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노심초사한다고 그것이 우리 뜻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막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매니저들입니다.

아이들 스케줄 다 짜고 친구관계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합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많이 낳고 살기에 바빠서 그랬는지 자식들을 방치했습니다.

그런데 방치가 더 좋은 교육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도 오늘날 여러분들처럼 잘 자라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너도나도 관리하다보니 부모나 자식이나 살기가 힘이 듭니다.

조금만 방치하며 뒤쳐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관리가 좋은 것 같은데 인생을 멀리 보았을 때도

이런 관리가 그들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서 좋은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는 방식은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자기 자리를 찾아갑니다.

겪을 만큼 겪으면서 싹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충실한 곡식으로 맞게 성장해 갑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야곱 한 사람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조급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자기 자리를 찾기까지 기다리십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집을 떠나려는 둘째 아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말려도 소용없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둘째는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진심으로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버려두시는 까닭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때와 그릇에 맞게 성장하고 준비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인생들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십시오. 때가 되매 꽃이 피게 하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