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비하르 주 이영길 선교사 메시지 요10:10 출처보기
◑아내와 결혼한 사연
▶저는 CCC 출신입니다. 근데 제가 대학다닐 때 CCC는 이성교제를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CCC에서 학생들에게 이성교제를 못하게 했는데
그러다가 이성교제를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성교제를 잘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학창시절에 있었던 CCC 강의 제목이 ‘그리스도인의 이성교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강의를 듣고 나름 생각을 하면서
이성교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생각해봤거든요.
‘교제를 하다가 깨지더라도, 유익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교제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교제를 할까. 영어로 교제를 해봐야겠다.. 하고는
제가 사귀는 자매님과 함께 그 당시에 캠퍼스에는 <뉴스위크> 시사 잡지로
같이 영어를 공부하는 그룹들이 많이 있었는데
우리는 크리스천이니까 <크리스천 투데이> 빌리 그레이엄 재단이 만든
신앙잡지를 공부하자.. 그래서 영어만 공부하는 게 아니고
거기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관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같이 영어로 된 <크리스천 투데이>를 공부했죠.
그 영어 스타디 그룹이 갖고 있던 목적이 뭐였냐면
영어권 선교의 인적 자원을 개발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매일 아침마다 매일 아침 7시에 모여서 8시까지 하고
8시부터 9시까지 캠퍼스를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드린 적이 생각나는데요.
더듬거리는 영어로 “주님, 제가 영어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니 하나님께서 제 마음 속에 소박하고 진실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크리스천 투데이 미팅을 통해서 영어권 선교를 할 수 있게 되고
그 그룹 중에서 저희가 제일 먼저 선교사로 나간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깨지게 됐어요.
그리고 우리 자매는, 졸업한 다음에 병원에 취직을 했고요.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한 1년 정도 있다 보니까, 너무 그립더라고요.
우리의 추억이 참 아름답게 생각이 되고. 미국 유학생활 자체가 많이 외롭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참 좋은 시절이었는데 다시 어플라이 해봐야겠다.’
그래서 편지를 썼는데, 우리 자매는 그 당시에 집을 이사 간 상태였어요.
그랬었는데 우리 자매가 못 받을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날만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어서,
자기가 과거에 살던 집에 꼭 가야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편지를 받게 됐어요.
하나님께서 그 자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때 제가 편지에 어떻게 썼냐면
‘우리가 교제했던 순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시 한 번 해볼 수 없을까요.’
그 자매가 편지를 읽고 ‘다시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떨어진 상태로 5년 동안 교제를 했습니다.
그때는 이메일이 없었기에 제가 1980년대 대학생이거든요. 전화나 편지를 하곤 했지요.
그때 우리 자매는 필리핀에서 훈련을 받고, 싱가포르, 인도로 선교를 가게 됐습니다.
그때는 이메일이 없어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서로 교제했습니다.
‘앞에는 원숭이가 뛰어놀고 있습니다.’ 이런 거 너무 기쁩니다.
그래서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오면, 제가 그걸 듣고
‘나는 이렇습니다. 내 룸메이트는 이런 사람입니다. 룸메이트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시죠.’
그러면 우리 룸메이트가 또 막 저랑 인터뷰를 해요.
그 인터뷰한 걸 자매한테 보내주죠.
그럼 자매님이 또 녹음을 해가지고 보냅니다.
‘오늘은 새가 날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굉장히 원시적인 교제를 했어요.
여러분들은 요즘에 유튜브, 페이스북, 그런 거로 바로 찍어서 올리지만
우리 땐 그렇지 않았기에 카세트테이프, 요즘은 틀수도 없는.
그런 걸로 교제를 했거든요.
▶우리가 5년동안 교제를 하고 나니까, 그때는 한참 젊은 나이에 황금 같은 시간이었잖아요.
우리가 가장 많이 변할 수 있는 시간이고, 그렇게 5년 지나고 우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알지도 못하고 결혼하는 것이 너무 무모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매에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하나님 앞에 혼자서 기도했어요. 그걸 그때 저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형제가 인도를 꼭 올 수 있기 바랍니다.’
저는 미국에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학교 안에 한국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섬기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아주 젊으신 분이었어요.
저보다 다섯 살 많은 분인데, 지금은 아주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형님 같은 저 분이 저를 잘 대해주셔서.
‘이 녹음테이프 좀 들어보시죠.’ 그러고서 녹음테이프를 목사님께 드렸거든요.
목사님이 목회하시다가 심심할 때 그 녹음테이프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녹음테이프를 듣는 순간, 큰 은혜를 경험했던 것이죠.
그래서 어느 날, 저는 영어권 예배에서 설교를 하기 때문에, 주일 한국어 예배에 참여 못했는데
거기서 목사님께서 이렇게 성도님들에게 말한 거예요.
‘우리 자매가 인도에 있고, 이 전도사님께서 5년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번 만나게 해줍시다.’
그렇게 해가지고 성도님들이 다 기뻐하셔서
성도님들이 특별헌금을 해가지고, 제가 인도로 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매님은 그것을 우리 결혼의 증표로 확인하게 되었고요.
◑인도로 부르심을 받게 된 계기, 초기 사역
▶저는 그때까지 인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제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면서 평소에 존경하던 로널드 사이더라는 교수님 이 계시는데
그 분을 평소에 존경해서 제가 웨스트민스터 학생이었지만
이스턴 신학교에 가서 그 분 과목을 두 과목을 듣는 상태였거든요.
그것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분 삶 전체로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삶 전체로 살아낸 분이었습니다.
제가 존경을 하면서, 그 순간에 인도를 가게 된 거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자매님뿐만 아니라 저도 인도 현장으로 부르신다는 걸 확신하게 됐습니다.
▶인도에서 돌아와, 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인도 선교를 하고 있던 아내와 결혼을 하고,
하나님께 약속드린 대로 인도에 들어가게 됐는데요.
처음에 어떻게 해야할 지 알지 못했기에 <최전방 개척 선교 학교>라는
인도의 어느 학교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학교의 디렉터 되시는 분께서 저의 가족을 찾아왔습니다.
‘당신들이 인도에 왔는데 인도에 어느 지역으로 하나님이 부르신다고 생각하느냐?’
저희는 하나님께서 인도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고 왔지만
하나님께서 어디로 부르시는지 잘 몰랐거든요. 그때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고.
젊은 사람들이 인도에 오는데, 모든 것을 처음에 낭만적으로 생각합니다.
가난도 낭만이고, 문화도.. 모든 것을 낭만으로 생각하는데
2~3년 지난 후에 인도 현실을 보게 되면, 거기서 견디지 못하고
90퍼센트가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인도를 받으라고.
그 말씀이 저에게는 너무나 유익한 어드바이스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저에게 네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요.
강과 배와 굴뚝, 그리고 지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아주 구체적으로 인도하신 것이죠.
‘비하르’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성육신의 복음에 접목한 선교 방식
선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선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0:10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되 그 생명을 풍성하게 얻고 누리기 원하십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그 생명을 얻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기 원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례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생명 되신 것을, 성육신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가까이 오셨고
또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죠.
복음적인 삶을 살기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열심히 단련하고
우리 자신을 열심히 개혁한다고 해서 복음적인 삶을 살 수가 있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많은 오해가 이것이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가 없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생명을 주셨죠. 그래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한 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주셨죠.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삶의 질을 가지고 그들 가운데 들어가시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전혀 다른 생명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가운데 전혀 다른 생명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비하르에 도착하다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부른 얘기를 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선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생명은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죠. 어떤 상황과 맥락 속에서 태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의 비하르 주로 부르셨고
우리 안의 예수님의 생명은, 비하르라고 하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꽃피게 되었습니다.
처음 비하르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그 땅을 밟은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였습니다.
저희가 비하르에 갈 때까지, 저희는 비하르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는 말 그대로 미지의 땅으로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기차에서 딱 내렸는데, 소변이 좀 급하더라고요.
그래서 기차에서 내려서, 거기에 있는 인도 사람들에게 물어봤거든요.
제가 그 답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에브리웨어’
사방이 다 화장실인데, 뭘 굳이 화장실을 찾느냐고. 그렇게 대답하더라고요.
그 정도로 제가 간 곳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갈 때 베드로 선교센터 춘천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동원하면서
그때부터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셨고
베드로 선교단에서 무명의 한 선교단을 우리와 연결해줬는데
그때 그 팀은, 자기들도 하나님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 인도를 순회하는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선교단을 통해서, 우리하고 연결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두 팀 사이에, 어떤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첫 번째, 어린이 교사 사역 프로그램을 하고 난 후에
그 후에 어떤 비하르 선교를 위해서 항구적인 발판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해서 결정한 것이
제자 훈련 학교였습니다.
제자 훈련 학교를 통해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비하르에 사역할 수 있는 인력을 얻게 됐고요.
동역자 그룹을 통해서, 그때부터 활발히 사역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무명의 팀은 한국에 돌아가 ‘순회 선교단’이라는 팀을 만들게 됐죠.
그 후로 한국 현대 선교에 있어 무척 영향력 있는 팀이 됐습니다.
거기서 현지인 사역자 형제를 만나게 됐고요.
그 형제는 네팔 공산당에서 회심한 형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 가지 열린 문을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디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어떤 사회든지 그 사회의 수준을 측정하는 세 가지 척도가 있다.
하나는 어린이. 둘째는 여성. 셋째는 쓰레기.’
가정이든지/ 국가든지/ 사회든지, 그 사회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는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가. 자기들이 배설한 인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그 세 가지를 보면, 문명의 척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비하르 가운데 넣어두시면서
이 3가지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사역은 제자 훈련과
이 세 가지의 문을 통해서 사역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비하르 주 칭베리아에 뿌리를 내리다
몇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한 번 더
비하르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부르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곳은 기차를 타고 두 시간, 기차를 내려서 버스를 타고 삼십 분,
마차를 타고 이십 분을 가야 하는 칭베리아 라는 마을이었어요.
마을 이장을 만나서, 사역하기 원한다고 말하니까
그 마을에서 머물 수 있는 곳을 주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머물 곳을 달라고 간 건 아니거든요.
제가 그 마을에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리고 저는 읍에서 살면서 왔다갔다 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근데 그 이장님께서 제가 생각한 것을 뒤엎고
‘좋은 일을 위해 왔으니 머물 수 있는 곳을 알려주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그 곳은 마을 중앙에 있는 주민회관이었습니다.
가보니까 농사한 것들을 다 잘라가지고 바닥에 말리고 있고
생활을 위한 어떤 것도 없더라고요.
가구도 없고, 전기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없어요.
그런데 마을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고, 특별히 저와 제자훈련 학교를 마친 현지인 형제 둘이
여기서 지내시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첫날 밤이 잊혀지지 않는데, 짚새기로 기운 침대를 가지고 저희에게 자라고 주는데
제가 한잠도 못 자겠더라고요. 벼룩 같은 게 너무나 물어서..
속에서 가래 같은 게 있는데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고 가슴을 짓누르는 경험을 했고요.
그리고 화장실이 없으니까, 밖에 나가서 일을 봐야 하는데
농작물을 다 추수하고 난 후에 벼가 이렇게 올라와 있잖아요.
깜깜하니까 내가 어디에다 자리를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 굉장히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며칠 동안 저는 제자를 찾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물로 씻어요. 그래서 보통 자기 자리를 냇가에다 잡고 있더라고요.
저도 냇가에다 자리를 잡고 아침에 일어나면 냇가에 가서 일을 보고 국민 체조를 하고
마을을 중심을 통해서 들어오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일과의 시작이 됐습니다.
▶저희 옆에는 힌두교도들이 제자 훈련을 하고 있더라고요.
힌두교도 제자 훈련 한다는 것 그때 알게 됐습니다.
밤새 노래를 부르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노래를 불렀지만
그 지역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도무지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도덕적 영향력이 아주 작더라고요.
우리는 들어가는 첫날부터 예배를 드렸죠. 그리고 오디오 바이블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게 생각보다 굉장히 효과적이었습니다.
마을에 통계를 내보니 70퍼센트가 문맹이에요. 오디오 바이블을 갖고 들어가니까
귀로 들을 수 있으니, 말씀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에 세 번씩 예배드리고, 신발 벗고 들어가서 예배드리고
주일 날 별도의 예배드리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배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기 위해 힘 썼고
동시에 우리를 부르신 그 사회의 필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사람들 칠백 가구의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했죠.
그 마을 상황을 파악해봤습니다. 역시 문맹의 문제가 심각했고요.
제가 이백 명의 학생들 학령기 아이들이라고 학교를 가지도 않고
학교에 갔을 땐 선생님 마사지하고 선생님들 학교에 오지도 않아요.
한 달에 한번 밀가루 배급받기 위해서 모이고 하는 그런 게 마을의 실상이었습니다.
▶저희가 문맹 퇴치 학교를 시작하면서, 처음에 이백 명 정도 학생들 모이고
한 달 지나니 사백 명 모이고, 한 달 지나니까 육백 명 모이는 거예요.
마치 주민 회관에 자석을 꽂은 것 같이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삼삼오오 오후가 되면 책보를 들고 떠나는 거죠.
학생들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말씀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니까 부모들이 영향을 받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들을 특별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 자조 그룹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저축이 어떤 것인지
문맹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죠.
이 사람들이 이제는 은행에서 융자 주겠다고 오는 은행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 정신 자세가 바뀌니까 융자가 나오고
그것의 상환률이 그 지역에서 가장 높아졌습니다.
교육적으로는 변화가 학생들의 지식 속에 일어났고 부모님들, 여성들, 삶을 통해서
가족의 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독립 이후로 처음으로 고등학교 졸업생도 나오고
독립 이후 처음으로 정부 관료도 나오게 됐습니다.
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지적 변화가 일어나고,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하루는 한 스태프가 저를 찾아왔어요.
‘선교사님, 우리 칭베리안 마을이 공무원 시험에 났습니다.’
‘그 문제가 뭐냐고’ 그러니까
‘한국인이 들어와서 모범적인 지역 개발을 하고 있는 지역의 이름은?’
이게 공무원 시험의 문제였고, 그 답은 ‘칭베리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공무원 시험에 문제로까지 날 정도면,
계속 그것이 정답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복음이 전파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저는 성육신 선교가 너무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의 우리가 선교의 방법으로써 성육신의 부르심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여러분께 설득하고 있는 거거든요.
가넷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교육을 마을 자치기구에서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었어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아주 자주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요.
저는 이 표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마을을 찾아온 한국 사람을 통해서
처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육신 선교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법 공산당이 마을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되더라고요.
마치 옛날의 베트콩처럼 낮에는 멀쩡하게 농사하는 농부들인데
밤이 되면 총을 든 공산당이 되는 거예요. 90퍼센트가.
그런데 마을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기 시작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성육신의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그들의 삶 속에 받아들이면서
공산당에서 이탈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지게 됐습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위기였죠. 무엇보다도 당원들이 당비를 내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공산당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공산당이 어느 날은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전부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심각했죠.
우리가 예배 모일 때 의자를 둘러엎고 테러를 했어요.
‘이제부터 너희들 나가면 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그때, 수니르 암베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공산당에게 한 말이
‘내가 다리를 잘려도 내가 주님께 예배드리겠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핍박의 사건을 통해서, 교회는 엄청나게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렸고, 또 윈도우를 통해서 예배를 봐야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에 찾아오셔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성육신의 복음이라 얘기하죠.
그럼 선교는 뭐냐. 성육신의 선교는 필요가 있는 곳에 찾아가서
그들 가운데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 가운데서 말과 행실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사역이 확장되다
칭베리아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면서
저는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한 가나안 농군 운동에 대해 관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대학교에서 CCC 활동을 할 때 수련회를 가나안 농군 학교로 자주 갔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 복음화의 비전이
그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김용기 장로님과 만나서
CCC와 가나안이 아주 긴밀하게 협력했거든요.
그때 제가 대학생으로서 받은 감명이 아주 크고, 실제 제 삶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칭베리아 사역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갈 때
한국에 나가서 가나안 농군 학교의 김범일 장로님을 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김범일 장로님께서 저희가 하는 사역에 관심을 가지시고
비하르에 실제로 오셔서 일어나는 현장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여기서 가나안 농군운동 하면 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한국의 40년 전이 오늘의 비하르래요. 당신께서 보시기에는.
그런데 40년동안 한국의 놀라운 영적 경제적 부흥이 일어난 것을 보면
여기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에게 굉장히 큰 격려가 됐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는데요,
제가 한국을 방문했거든요.
그때 김범일 장로님께서 제게 이런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당신께서 인도 대통령을 만나고 싶대요. 저는 대통령 아들이 아닌데,
저보고 대통령을 좀 만나게 주선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러시더라고요.
한번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몇 번을 그러시고, 아주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진지하게 받았습니다.
제가 인도 대통령 압둘 깔람 대통령에게 이메일을 보냈죠.
‘경애하는 대통령 각하. 우리 김범일 장로님께서 당신을 뵙고 싶어 합니다.’
4페이지의 글을 기록해서 대통령에게 이메일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대통령실에서 저에게 전화가 왔던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죠.
대통령을 만나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 삶 속에서 가장 흥분됐던 순간이었습니다.
드디어 대통령을 만나게 됐습니다.
저는 대통령 접견실에 들어가기 전에, 김범일 장로님 모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주님, 만약 대통령이 우리에게 20분의 시간을 준다면
우리의 만남은 굉장히 성공적입니다.’
대통령이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제 이메일을 받고 이렇게 만남을 허락해주셨는데
20분 이상 기대하지 않고, 주님 20분의 시간을 우리에게 주시면 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기도했거든요.
대통령실에 들어갔어요. 대통령은 이미 그 분의 사상과 실천을 통해서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분이죠.
그의 책 중에 ‘윙즈 오브 파이어’라는 책도 번역됐고.
최근에는 ‘타겟 3 밀리언’ 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상태인데요.
그 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만난 건 처음이었죠.
키가 몹시 작으시고 눈이 아주 작았습니다. 대통령실 구석에 앉아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를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저는 운명의 20분을 생각하면서 얘기를 쭉 진행했고
김범일 장로님 옆에서 통역을 했습니다.
20분 정도 시간이 되니까 대통령이 하나 질문을 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각계각층에서 온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이 비하르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줄 알려져 있잖아요.)
비하르를 어젠다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없대요. 당신들이 처음이랍니다.
그러면서 '왜 비하르냐?'.
그때 제 옆에 앉아있던 김범일 장로께서 너무나 멋있는 정답을 말씀하셨죠.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친 답입니다.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대통령 각하, 환자가 있는 곳에 의원이 필요하고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필요합니다.
아시아가 살기 위해서는 인도가 살아야 하고
인도가 살기 위해서 비하르가 살아야 합니다.’
대통령의 조그만 눈이 갑자기 커지면서 제가 생각하기에 커지는 듯하면서
마치 점프를 하는 것 같이 저는 그런 제스처를 느꼈어요.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더라고요. ‘당신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자기는 이런 고귀한 사상가와 함께 있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는 김범일 장로님께 우리가 그 후에 두 번 더 만났거든요.
20분의 문제가 아니죠. 그 모임 후에 자기 참모들을 다 불러서 미팅을 했으니까요
우리가. 그리고 합해서 세 번을 만나면서
비하르의 개발에 대해 얘기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것을 인용하는 한 가지 이유는, 성육신에 핵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격 조정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에요. 복음의 핵심은 성육신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메시지.
우리가 옛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의 생명을 교체하시고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그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살아야한다는
성육신의 메시지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성육신의 선교는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가 가는 것이죠.
선교는 예수의 생명을 담은 하나님의 자녀들, 생명이 없는 영혼들 가운데서 심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 받지 못한다고 불리우는 백성을 불리움 받게 하며
내 백성이 아니라고 불리우는 백성을 내 백성이라 불리우도록 성육신하여 그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죠.
그럼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서 인도형 개발 계획과
가나안 농군 학교의 새마을 운동을 결합하는 종합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육신, 지역 계발 선교 모델
▶제가 인도로 가기 전에 제가 선교사로서 모델로 삼았던 두 분이 계세요.
그 중의 한 분은 토레이 (대천덕) 신부님이시고
웨슬리 웬트워스라는 분인데,
두 분다 한국에 헌신하셔서 한국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쳤던 분이죠.
젊은 저에게 이 두분이 영향을 끼쳤던 이유는
한 분은 성령을 통한 사회 변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국 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보수와 진보 사이에 통합적 모델이 없다고 젊은 저는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토레이 신부님을 보게 되면서, 그 순수한 성령의 체험과
또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삶을 강조하면서도 성령을 통한 사회 개혁의 중요성을 말했기 때문에
저는 인도에 들어가면 토레이 신부처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웨슬리 웬트워스라는 분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 분은 전공을 통한 신앙의 표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학문과 신앙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우리가 공부하는 학업이 우리의 신앙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후에 한동대, 연변과학기술대, 많은 이런 기독교 대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신 분입니다.
▶웨슬리 선교사님을 통해서 제가 한윤식 한동대 교수님을 만나게 됐는데요.
그 분은 학생들을 통한 성육신 선교가 어떤 것인지 이해를 잘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어떻게 믿고 있었냐면, 학습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과 회복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했죠.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GEM이라는 프로젝트로 학생들 전체를 묶어서
학생들이 전부 선교지에 연관이 되서 자기 전공을 가지고 선교를 어떻게 섬겨야할 지,
(아 시간이 다 됐네요. 한 십 분만 더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학생들을 자신의 전공이 필요가 있는 지역으로 가게 해서, 자기의 전공과 선교 현장을 연관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리모콘으로 전달되지 않죠. 말씀한대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같이
선교지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그들 가운데 삶으로 전달됩니다.
한동대 GEM 프로그램이 의미있다고 느낀 것은, 학생들이 그냥 테이블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학생들을 선교지의 현장 속에 들어오게 하고,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전공을 통해서
선교지에서 영향을 미치도록 안내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따라웅이라는 마을에 들어가서 깊숙히 같이 살면서 지역 개발에 대해 연구합니다.
지역 개발학과 학생들이죠.
마을간의 불평등이나 카스트 제도의 문제점을 밝히면서 사람들과 가까이 연구하고요.
어떤 팀들은 컴퓨터 공학이면 섬의 지도 만드는 일을 합니다. 지리정보시스템이죠.
위성을 통해서 마을의 상황을 알고 침수지역이기에 침수 상황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XYZ 좌표를 통해 만들고 이 나타 섬을 종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의 토목 작업을 할 것인지..
작업하고 수질 문제가 심각하니까 그래서 환경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와서
현지 물의 문제, 오염 문제,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정수할 수 있을까하는 적정 기술을 연구하기도 하고
에너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개량 화덕 문제를 해결한다던지
정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림 예술 치료를 한다던지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가 정신 세미나를 한다든지 하는 겁니다.
이렇게 성육신의 모태 안에서 말씀이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기 시작하죠.
한동대 GEM팀이 기업가 정신 세미나를 할 때 싸뚜라는 프로젝트가 탄생했어요.
사람들에게 세미나를 하는 과정에서
현지에서 만드는 콩으로 만드는 미숫가루를 수세기 동안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이 식량으로 먹었는데
이 싸두를 산업화할 수 있겠구나. 그런 프로젝트가 생기면서 자립 기반을 돕는 프로젝트가 됐고요.
▶그 다음에 너무 감사한 일은 싸뚜 프로젝트가 현대화 되면서
우리가 그 비하르에서 만든 음식이
아프리카, 중동, 인도 전체를 먹이는 그 프로젝트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만난 분 중에 최유한 회장님 계시는데, 그 분은 비즈니스가 찾지 않는 빈곤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비즈니스를 해야 되는가를 분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싸뚜 프로젝트가 아프리카까지 가게 되는 계기를 맡게 됐죠.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것이 복합 키라는 것이었어요.
이 시대 선교의 문을 열 열쇠는 이제는 혼자서 여는 게 아니다. 열쇠의 복합 키가 있잖아요.
거기에는 번호가 여러 개 있죠. 그래서 그 번호가 하나하나 맞아야지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각각 다른 주체가 되어 연합함으로써 복합 키를 만들면
선교의 문을 열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타 섬으로 부르시면서 새로운 개척 사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나타 섬은 마치 한국의 여의도와 같이 강북과 강남 사이에 있는 섬입니다.
이 나타 섬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 개척지에요.
거기도 마찬가지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디스코 정글이라는 잡초가 50퍼센트 덮고 있는 황폐한 땅이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2장 1절 2절의 환상, 생명의 강물, 변혁의 열매,
선교의 잎사귀가 풍성한 거룩한 도시의 비전, 오색 도시의 비전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제 우리가 성육신 선교를 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느끼는데요.
우리는 같이 주님과 함께하는 동역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분들을 예비해놓으셨더라고요.
옴프라카시라는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그 섬에 왔다갔다하면서
술주정뱅이처럼 살았던 사람이에요. 얼마나 술을 좋아하냐면 어떤 사람이 그 사람 일하고나서
이십 루피를 주면 자기 집에 가는데 걸어서 두시간 걸어가야 하는데
근데 그걸 교통 수단을 안타고 이십 루피로 술을 마시고 두 시간 집에 걸어가는 사람이에요.
어둠에 눌려있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현장에서 예배드리며 예수의 생명이 전달됐을 때 예수님 받아들이게 되어서 어둠 가운데 해방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나타 섬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린 땅을 사고 싶었는데 어떤 사람이 오더니, 사지 않고 주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힌두교인인데 이름이 예수에요.
그래서 왜 예수인가 그랬더니 얘기를 하는데 자기 생일이 12월 25일이랍니다.
그래서 힌두교인인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아이의 이름을 뭐로 할까요 물어봤대요 부모님께서.
그래서 생일이 언제냐 했더니 12월 25일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렇게 된 겁니다.
너무 놀랍더라고요. 실제 상황이에요. 그 예수님께서 저희 나타 섬에 땅을 기증했습니다.
지금 만 평의 땅이 주어져있고요. 이만 평의 땅이 확보가 되서
나타섬 오색도시 종합 프로젝트를 할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 공항에서는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이 운동을 도와달라고 말씀드렸어요.
그 분은 그냥 시큰둥하게 듣고 비행기 타고 가셨거든요. 베라둔이라는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후가 좋지 않아지면서 비행기가 착륙을 못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 겁니다.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그런 말씀을 주시더래요.
오늘 공항에서 이영길 선교사 만났지, 이영길 선교사 도와줘야지.
그런데 그 때 베라둔에 갈 때 누가 기부하신 분이 있어서 그 재정을 갔던 거였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사람도 예배해주시고요.
선교에 미친 분들도 계셨어요. 그 분이 나타 섬을 위해 교육 사업을 하겠다. 그런 분도 맺어주셔서
제가 보는 것은 컴비네이션 키, 복합 키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보는데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성육신의 모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이제 우리가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내 영역을 창조함으로써 만들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 사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육신의 메시지죠.
주님은 우리도 필요가 있는 곳에 다가가서 함께 살기 원합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복음이요, 성육신의 선교입니다.
젊은 여러분, 선교지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공부해야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전공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 생명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젊은 여러분, 빛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있습니다. 의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있습니다.
젊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자기의 전공을 가지고
어둠이 있는 곳에 환자가 있는 곳에 기꺼이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제가 목소리가 좀 작죠? 오늘 한번 구호를 외쳐보겠습니다.
제가 세계 선교는 누가! 하면 여러분은 내가! 합니다.
그런데 제 목소리는 모기 목소리 같아도 여러분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내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 외치고 난 후에 함께
주님 내게 주신 전공으로 전문성으로 내가 주님 섬기기 원합니다.
이 필요가 있는 생명에게 멀리서 리모트 컨트롤 하지 않고 찾아가기 원합니다.
내 삶의 한 부분은 최소한 단기 선교를 내 전공을 안고 가겠습니다.
장기로도 헌신하기 원합니다. 최소한 단기 선교로 헌신하는 그 기도를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자, 같이 하겠습니다.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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