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창세기 P6 / David Pawson

LNCK 2015. 5. 28. 15:30

 

창세기 6 - 요셉                           Genesis P6 (영어 녹취록)            출처

 

서론

 

대다수 사람들이 요셉의 이야기에 대해 아주 익숙하리라고 봅니다.

만약 당신이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주일 학교에서 반드시 요셉의 이야기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마지막에 결국 나쁜 사람을 이긴 이야기라서

아마 많은 어린 아이들의 관심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후에 제이슨 도너번(뮤지컬 배우)이 이 역을 맡은 후, 더욱 많은 젊은이들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지은 <요셉과 신기한 꿈 채색 옷>이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어린이용 뮤지컬

 

NIV성경은 비싼 화려한 옷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뮤지컬에서 보듯이 형형색색의 여러 색깔로 된 화려한 가운은 아닐 것입니다.

그건 잘못이고, 저는 긴 팔소매가 달린 코트라고 봅니다.

 

이 옷은 작업감독이 입는 특별한 옷일 것입니다.

노동을 하는 곳에는, 반드시 남자 하나를 세워서 감독을 하게 하였는데,

노동자들은 소매를 걷어 올리거나, 짧은 팔 옷을 입고 작업을 했을 것이며,

감독하는 남자만 긴팔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 요셉은 장자가 아니면서도 형들의 작업을 감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형제 사이가 어떻게 지냈는가를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하지만 이것이 핵심은 아니고, 요점은 요셉이 제4 세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가 아닙니다.

여기서도 하나의 명확한 패턴이 나타나는데, 장자가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4대째에 내려와서도, 무조건 장자의 출생 권리로 축복을 받지 않고,

하나님은 은혜로장자권의 축복 받을 사람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통의 경우 어린 자(연약한 자)’를 선택하십니다.

 

하지만 요셉은, 앞선 3세대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조금 다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신을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사도, 이전 3세대에게 모두 나타났지만, 요셉에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은 계열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셋의 경건한 후대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앞의 3세대처럼 대조가 되지 않습니다. *앞에는 택자와 비택자간의 대조

하지만 형들이 처음에는 요셉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채셨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요셉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셔서

그더러 꿈을 해석하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 번도 요셉에게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요셉도 하나님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상황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 요셉이 남다른 요셉의 방식으로, 믿음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은 어떻게 남다른가요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의 이야기를 알려주지요?      

 

한 가지 분명한 원인은, 바로 다음 책에서

이 야곱의 모든 가족이 애굽에서 노예로 처한 것을 보게 되고,

그들이 어떻게 애굽으로 내려갔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연결고리가 되어서, 야곱 가족이 어떻게 애굽으로 이주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건 아브라함과 이삭이, 기근 때문에, 양식이 부족하여 애굽으로 이주한 원인과 같습니다.

 

애굽은 에티오피아 고지로부터 흘러 내려온 나일 강이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 비를 의지할 필요 없었습니다.

나일 강에서 충분한 물을 공급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지중해의 서풍에 따라오는 비에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는, 적어도 성경의 다음 부분(출애굽기)의 이야기를 가져오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가 모르는 시기, 즉 닫았던 400년의 커튼을 열고,

갑자기 이들에 대해 출애굽기에서 언급할 때

그 가족의 자손은 이미 몇 백 만으로 늘어났지만, 애굽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스토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면,

요셉 이후의 400년 상황은, 왜 기록하지 않았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처럼, 창세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대략 12장을 차지했고,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그보다 짧죠.

(...! 제가 잘못 계산했네요). 요셉의 이야기는 36~50장까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두 장이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의 이야기가 창세기에 길게 나옵니다.

하지만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분량은 많이 짧습니다.

 

요셉이 왜 이렇게 중요하지요? 성경에 왜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상세히 기록하였지요?

그가 좋은 모델이고, 도덕적으로 살아서 결국 승리했기 때문입니까?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적어도 4측면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첫째 측면은 인간적 각도에서 봅시다.

요셉 이야기의 묘사는, 실제 인물이 등장하는 바, 아주 생동적이며 뛰어난 스토리입니다.

그 줄거리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복잡하게 얽혀있고,

또한 어떤 곳에는 불가사의한 우연의 일치가 일어납니다. *감옥에서 관원장들과 만남 등

 

요셉의 이야기는 단 두 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장은 아래로 추락하고, 2장은 위로 승승장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당했던 삶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던 아들이었는데, 다른 집의 노예로 변했고,

후에 그가 또한 옥중에서 잊혀진 죄수였다가, 나중에 한 나라의 총리로 수직상승했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야기지요. 사회적 신분이 높은 곳에서 밑바닥가지 떨어졌고,

다시 밑바닥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그의 이러한 경력이, 우리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중간에, 우리는 그의 형들이 그를 질투하는 것을 보는데,

그의 인생 여정 전체가, 그가 꾼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제가 보기에 요셉은, 성경인물 중에 꾀가 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참으로 순진하게 말합니다. 그가 형들에게 자랑하듯 말하기를

내가 꿈을 꾸었는데, 형들이 모두 나에게 절을 했어요.’

이러한 말을 발설하면, 절대로 친구를 얻거나, 듣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꿈 내용을 형들에게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는 확실히 꿈을 꾸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 자랑하듯 발설하는 잘못을 할 때도 있으니,

그런 요셉을 탓할 수는 없지요.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요셉의 스토리는, 대단히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좋은 뮤지컬을 만들어서 극장에서 공연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뮤지컬을 보기 원합니다. 심지어 수많은 학교에서도

이 스토리로 연극을 만들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각도에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요셉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지만, 이 이야기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이 배후에 계십니다. 그 분은 보이지 않게, 그의 목적과 계획대로

모든 환경을 주재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계획을 보여주셨는데요.

사람은 꿈을 꿀 때가, 현실에서 깨어있을 때보다, 하나님의 계시를 쉽게 받아들입니다.

 

저 파슨도, 가끔씩 이상한 꿈을 꿉니다.

보통 잘 꾸는 꿈은, 제가 특별한 모임에 참석하는데

잘못된 날짜에, 혹은 엉뚱한 설교 원고를 잘못 가져가는 꿈을 꾸며,

시간을 잘못 맞추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꿈에서 깨어나면서 식은땀을 흘립니다.

이것이 저에겐 악몽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우리는 꿈속에서, 모든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이 어떤 때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신령한 꿈은, 올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말하기를 이러한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서  *바로의 꿈

해석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합니다. *40:8, 41;16

 

다니엘도 똑같은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요셉의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이지요.

(아쉽게도 그 뮤지컬에서는 이 점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직접적인 기적은 없었지만, 모든 환경을 친히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항상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은 안 일으키더라도,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더러 어떤 사람을 만나도록 섭리하실 것이고,

당신의 인생을 배후에서 섭리하여, 이로써 당신이 변화되게 하십니다. 요셉처럼요.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진 않았지만, 그분이 배후에서 역사해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려고 언제나 섭리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운 luck을 믿는 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의 히브리 원어는 인데, 영어 God’과 발음이 비슷하네요.

운을 의지해서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이 운이야!’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을 아마 여러분이 들었을 것인데,

‘by God’이란 뜻이 아니라, ‘by Gad’란 말이며,

가장 좋은 운을 기대할 때 쓰는 말입니다.

결혼식 할 때, 말발굽 모양으로 장식하는 것도, 다 좋은 운을 바라기 때문이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운을 기대하며 사는데, 마치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모든 환경이 우연히 생성된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식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모든 환경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배후에서 섭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르지만, 나중에 지나고 보면, 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임을 봅니다.

당신도 과거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당신의 인생을 섭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 섭리가 자기 눈에 보이지 않지요.

 

사실 요셉의 모든 이야기는 한 구절로 결론지어지는데, 바로 45:7절입니다.

요셉이 먼저 형들을 낮추고 힘들게 한 후에,

마지막에 그의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이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판 악행을 용서하였습니다.

 

이때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냈습니다.’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들은 동생을 대상들에게 노예로 팔아 이미 제거했고, 다 해결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그 특별한 외투에 염소 피를 묻혀서 늙은 아버지에게 가져가

그 가련한 늙은 아비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판에서 이 옷을 발견했는데,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게 틀림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늙은 부모 야곱한테 이렇게 했는데, 이는 정말로 너무 잔인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라고 강제로 시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타인을 해치는 일이 발생할 때, 지켜보십니다.

그가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 하시는데, 이 모두에는 그분의 뜻이 있습니다.

 

(지난 5강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을 살펴보았는데, 이번 6강에서)

이것이 바로 요셉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먼저 애굽에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는 그가 애굽의 양식을 맡아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를 위해 꿈을 해몽했는데, 먼저는 칠년 풍년이고, 다음으로는 칠년 흉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로서 요셉이 바로에게 건의하기를, 흉년을 위해 양식을 저장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꿈에서 얻은 선견지명이 전 애굽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족도 구원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양식이 떨어져서, 애굽에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요셉이 그들의 구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왕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그들을 애굽으로 오게 하였습니까? 불필요할 것 같은데요

 

1. 그 답은, 먼저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의 자손을 애굽에서 사백년을 정착하게 하고,

아모리 족속의 죄가 가득 차기까지 그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5:16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그들더러 지금은 약속의 땅을 점령하지 말라는 것이고,

반드시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차서

그들이 죄로 인해 응당 죽임을 당할 때까지는, 그 땅을 넘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거주하게 하려고, 다른 민족들을 무조건 쫓아내지 않습니다.

그 분은, 그 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가 가득 차기까지 기다립니다.

고고학자들이 그 곳 주민들의 죄악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가나안의 여기저기에 성병이 있었고,

도덕의 부패와 타락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될 때,

그제야 하나님이 이스라엘더러 그 땅을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가 하나님이 그 땅을 유대인에게 주신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불평한다면,

그 말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더러 그 땅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그 땅 사람들을 심판하여 쫓아내셨습니다. 그건 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엔, 또 다른 원인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더러 노예가 되게 하셨는데,

이 일도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노예에서 구원하여 내어, 그들더러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 상징

 

그리고 이스라엘을 모델로서, 세상에 보여주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복된 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애굽 종살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더러 그런 종살이를 겪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매주 쉬는 날 없이 7일을 계속 작업하는 고생을 하게 하였고,

자기들의 돈도, 자기 재산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노예니까요

 

이 때 하나님이 비로소 크신 손을 내밀어,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하였습니다.

그 전에 이 노예생활이 먼저 발생했는데, 이러한 일을 발생하게 한 것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그들을 구속하고 구원하여, 약속의 땅에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

그들로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각도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정한 중점은 아직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3. 세 번째 측면은 요셉의 성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의 인격은, 참으로 뛰어납니다.

성경은, 요셉의 어떠한 결점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앞서 성경은 아주 성실하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해 있는 모습 그대로 묘사하였어요.

그들 각자마다 연약함과 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셉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평도 없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요셉의 잘못은, 자기가 본 꿈을 형들에게 그대로 알려 주는 것을 보아서,

그의 말투가 영악하지 못하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요셉의 잘못된 태도나 혹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그가 부정적인 반응과 태도를 나타내 보일 챤스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자기 인생이 내리막길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도,

그는 어떤 원한이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하시느냐고 말하지 않았고,

감옥 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사형수 실에 넣어진 것에 대해서도,

거기서 자기 삶이 끝나게 된 상황에서도, 그걸 정의의 실종이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오늘날로 치면 사형수 실입니다. 실제로 떡관원장은 사형)

 

더구나 그는 고향을 등지고 떠나서, 거기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아름다운 용모로 그를 유혹할 때도

그는 여전히 자기 정직성을 지켰습니다.

 

그가 요셉을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하였지요.

그러자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무고하여, 요셉이 감옥의 사형수 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보디발 아내에 대해서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인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이

뜻밖에 거기서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 자기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바로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 모두 감옥에 들어 왔는데,

뜻밖에도 요셉이 그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챙기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불행을 당하는 동안 내내, 요셉은 한 마디도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건 그가 위로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 한 사람의 인격을 제대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사람이 추락할 때인지, 아니면 위로 올라갈 때인지요?

 

제 생각으로는, 위로 올라갈 때가, 인격적으로 더 큰 시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요셉이 올라갔을 때, 자기를 애굽에 노예로 판 형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한번 보세요.

 

그들에게 양식을 주면서 돈도 받지 않고, 오히려 돈을 그들의 주머니에 넣어주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하고,

그가 또한 그들을 위해 바로에게 구하여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좋은 땅을 사게 하였는데, 바로 고센땅입니다.

 

내가 당신들을 볼보겠다고 말합니다.

그 형들이 그를 버리고, 아버지에게 죽었다고 속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거꾸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지요.

높아질 때든, 낮아질 때든, 언제나 요셉의 인격은, 타락하지 않고 정직을 유지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대해서만, 어떠한 부정적인 묘사가 없습니다.

다윗 왕도 이렇지 못하지요. 여러분 그가 무슨 죄를 범하였는지 아시지요.

그리고 다른 인물들도, 그들의 전체 그림을 보면, 흠이 조금은 발견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어떤 방면으로 보든지,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예외적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이 범죄하는 것을 보았고, 엘리야가 두려워했던 것을 보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여러 가지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확실히 완전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단 한 사람만 이렇고, 신약 성경에서도 단 한 사람만 이러합니다.

모두들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삽입된 한 장(38)의 내용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이는 그의 형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요즘 당신이 창세기를 읽고 있다면 반드시 놀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 이야기 중에 갑자기 그의 형 유다를 얘기 했으니,

이는 하나의 대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유다가 창녀 보러 갔는데, 이 창녀가 사실 그의 며느리였고,

그녀가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썼고, 유다가 그와 근친상간을 범하였습니다. 아주 속물적인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 중에 끼어들었는데,

그야말로 요셉의 인격을 대조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형들은 아주 나빴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대조가 정말로 아주 명확합니다.

 

여기에 갑자기 유다의 속물적인 이야기가 끼어들은 이유는,

제가 보기엔 요셉과 대조 시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롯의 대조,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조,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대조처럼 말입니다.

형제를 거론하여, 요셉의 정직한 인격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성경에 왜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이유를 다 논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우리가 논했던 세 개의 이유를 정리해 보십시오.

 

첫째 이유는, 사람의 각도에서 보면, 요셉이 이전에 밑바닥까지 내려간 상황이었고,

후에는 바닥에서 제일 높은 위치까지 올라와서

자기 가족, 그리고 민족까지 구원하였으며,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이 요셉의 일생을 주관하셨고,

곤경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이 사람은 완전히 정직하며, 내려갈 때나, 올라올 때나

똑같이 성실과 자기 정직을 유지했습니다.

 

이로 누구를 연상하게 됩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예수님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a type of Jesus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을 통해, 어떠한 일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임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표하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요셉처럼, 자기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고,

세상에서 제일 큰 모욕과 곤경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들려 올려지고, 그 백성들의 구주와 주재가 되셨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이 아주 닮았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거기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일찍이 예비하셨고, 그래서 구약 시대에서 암시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 여기저기에 이러한 암시가 있습니다.

 

저는 <성경 66권에 나타난 그리스도>라는 작은 책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Christ in All Scriptures’ 저자는 혹킨 여사입니다. A.M. Hodgkin

 

부피는 작지만, 내용은 아주 좋은 책자입니다.

그는 성경 66권을 살펴보고, 각 권마다에서 나타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 자신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5:39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거기서 반드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형상을, 그의 그림자를 찾으셔야 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이 그 실체가 되시는데, 하지만 그의 그림자가

이미 구약 성경의 여기저기에서 나타났습니다. 특히 창세기에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요셉이 바로 신약 성경의 예수님 예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신 답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였는지를 보았습니다.

요셉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에 반응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한 사람을 취하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구원을 주시고,

그리고 그를 높이 들어 구주와 주님이 되었는가를 보았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그림자      

 

만약 당신이 이러한 해석의 열쇠를 파악한 후, 다시 창세기를 읽으시면,

갑자기 많은 곳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성경 다섯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외 다른 곳도 있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찾아보십시오.

 

1. 첫째, 창세기에 기록한 족보인데, 사실 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을 읽으면 족보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24명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셋의 자손이고, 셋의 아래로 마리아의 아들까지 뻗어 내려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이 족보가 바로 예수님의 혈통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것이 우리 조상의 족보도 됩니다.

 

성경의 족보는, 바로 우리의 족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제일 중요한 선조들입니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면, 우리는 이 혈통에 속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역사를 계승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 가족/조상의 족보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아내와 펄시저택을 다녀왔는데, 여기서 얼마 멀지 않지요?

여기서 동쪽으로 가는데,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습니다.

거기가 노섬벌랜드 공작 포시 가문의 대지입니다.

제가 노섬벌랜드 지방에서 자라서, 거기에 관심이 깊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포시 가문에서 온 동창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저택의 벽에서 제가 길게 그려진 족보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족보는, 위로 계속해서, 노섬벌랜드의 공작 포시 가문의 족보가 뜻밖에도 아담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도 만들 수 있겠다. 우리 집 조상 모두를 찾아내기만 하면 되겠네..’

사람마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아담까지 가고, 또한 모두 아브라함까지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경의 족보가 예수님의 족보이기 때문에

또한 바로 우리의 족보가 됩니다.

당신이 창세기에서 읽은 족보는 바로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2. 다음으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창세기의 여러 인물들에게

예수님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요셉에게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지만, 이삭에게서도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드리라고 하셨죠?

하나님이 그더러 한 산에 가라고 하고, 나중에 그 산을 모리아 산이라 불렀고,

그 산은 나중에 골고다 혹은 갈보리산 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자기 독생자를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이삭을 아브라함의 독자라고 말한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22:2

당시 이삭의 나이가 적지 않게 이미 30세 초반이었지요.

사실 그가 아버지의 결정에 항거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복종하여 결박당해 번제단에 올려졌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시고, 또한 제물을 따로 예비해 놓았는데,

한 마리 숫양이였고, 뿔이 가시나무에 걸려있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숫양 ram,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 *성경에는 lamb으로 나옴. 1:29

 

저는 예수님을, 어린양 lamb으로 묘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항상 예수님을 순한 어린양으로 그려서 묘사했는데,

사실은 숫양이 맞습니다.

 

구약에서 제물로 드린 것은, 어린양이 아니고 숫양이었고, not lamb, but ram

뿔이 달린 1년된 숫양이었습니다.

 

계시록에도 예수님을 머리에 뿔이 일곱 개인 숫양으로 묘사했는데, 5:6

귀엽고 온순한 양이 아니고, 건장한 하나님의 숫양입니다.

 

*헬라어성경에는 계5:6절을 어린 양’(아르니온)으로 기록했는데, 파슨의 주장은

머리에 뿔이 일곱 개달린 양은, 문맥적으로 강함을 의미하므로 숫양이 더 맞다고 주장합니다.

은 언제나 권세를 상징하니까요. 여러분 각자의 판단을 요합니다.

 

하나님이 이 숫양을 아브라함에게 공급하여, 아들 이삭 대신 드리게 하였습니다.

이 숫양 뿌리가 가시나무에 걸렸고, 이 때 하나님은 자신의 새 이름을 주셨는데

나는 너의 공급자이다. 여호와 이레라고 하셨습니다.

 

몇 세기 후에 같은 산에서, 이삭의 나이와 같은 한 사람이

(숫양처럼)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번제로 드려졌어요.

여러분,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셨습니까?

 

3. 또 한 번은 아브라함이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왕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살렘 도시의 왕이었습니다. 살렘이 후에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사로잡혀간 가족을 구하러 갔었습니다.

그가 승리하여 빼앗겼던 재물 외 전리품을 가지고, 살렘이라는 이교 도시에 가까이 왔을 때,

이 도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살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주 신기한 인물 하나가 아브라함을 만나러 나오는데, 그가 멜기세덱입니다.

 

그는 제사장이며 왕인데, 아주 신기한 조합이지요. 이스라엘에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며 제사장인 사람이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서, 아브라함과 그의 부하들에게 주어

그들더러 원기를 회복하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재물의 십분의 일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 제사장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에게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4. 이제 야곱의 사닥다리를 가서 봅시다. 거기도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나옵니다.

야곱이 집에서 도망쳐 나온 날 밤에 돌을 베개하여 잤는데,

결국 꿈에서 움직이는 사닥다리가 나타났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사실 사다리보다, 에스컬레이터에 더 가깝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움직이는 사닥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나는 위로 올라갔고, 하나는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천사가 그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했지요.

사닥다리의 끝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하늘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가 깨어났고, 거기서 자기의 소득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 와서 생긴 율법조항 이었죠.

야곱이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일조보다는 선물

 

당신이 나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 주면, 내가 십분의 일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사람은 하나님과 흥정할 수 없고, 하나님과 계약할 수도 없습니다.

계약/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맺는 것입니다.

야곱이 나중에 고생을 하고 나서야, 이 점을 알았습니다.

 

수 세기 이후에 예수님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노라.

너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는 예수님 말씀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아주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이것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사닥다리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야곱의 사닥다리라고 하시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새 사닥다리라고 하였어요. 여기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였습니까?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5.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주시는 중에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29:12~

그가 뱀에게 여인의 후손(‘여인의 씨남성 단수)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림자

 

발꿈치를 상하게 하면 죽지는 않는데, 하지만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치명상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첫째 약속입니다.

 

장래 어느 날에, 하나님이 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실 것을 예언하지요.

누가 도대체 하와의 후손일까요? 누구인지 모두들 아시지요.

바로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의 세간을 빼앗아 온 분이십니다. 3:27

 

조금 전에 제가 얘기했던 것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5:19

 

그의 뜻은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가 동산에서 발생했습니다.

즉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말하기를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하나의 대조가 나오는데, 그들 두 사람은 각자 새로운 후손을 발전시켰습니다.

-아담은 호모 사피엔스의 시조이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란 뜻

-예수님은 호모 노보스즉 중생 후 새로운 사람의 시조입니다. *호모 노보스

 

나는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나지만, 예수 믿고 지금은 새로운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은 새로운 사람’, 영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인류를 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오늘날 세상에는 두 가지 인종이 있는데,

사람은 모두 태어날 때 호모 사피엔스로 태어나지만,

하지만 중생하여 구원 받은 후에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호모 노보스

아담 안에서 이거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인류이고,

이러한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지구에 살게 되며, 나아가 바로 새로운 우주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이 우주의 창조에 참여하셨습니다.

1장에서도, ‘예수님의 그림자를 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사람을 아주 놀라게 하는 구절 하나를 얘기할 텐데,

이는 예수님이 우주의 창조에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낱 나사렛 목수 예수가, 어떻게 이렇게 기묘한 창조역사를 이루셨는지요!

 

초대교회 제자들은, 예수님이 결국 창세기 1장의 작업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1:3

 

한번은 제가 캐나다의 야외 집회에 초청받았습니다.

거기가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 앞이며, 폭포를 배경으로 하였는데,

그 폭포 바로 앞에서, 기독교 집회로 모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집회는 전 캐나다와 미국 일부 지역 방송에 중계되었습니다.

 

총 세 명의 강사가 초대되었는데, 제가 제일 처음으로 설교했습니다.

다음으로 천주교 신부이고, 다음으로 오순절파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이, 신혼여행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전에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는 신혼여행에 좋은 곳이며,

여기 모든 호텔에, 신혼부부 용 스위트룸이 있었습니다. (약간 주제를 빗나갔군요)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17살 때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드신 분을 알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친구로 사귀고 있습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가 미쳤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그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1:3

즉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는 그분이 만드셨다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제가 연이어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책상과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그분이 먼저 나무를 만드셨고,

그래서 목재가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산상수훈을 설교하시기 전에, 그분은 산을 먼저 만드셨고,

그 산을 설교 자리로 삼으셨습니다.’ 놀랍지요?

 

나사렛 출신 목수가, 뜻밖에도 전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셨습니까?

 

그가 거기 창조 사역 때 계셨습니다.

우리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그 우리속에

삼위일체로 계셨습니다. 1:26

 

지나간 20년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는데, 지구 위의 사람은 사실 계란 껍질 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매우 불안한 지구 표면 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구의 표면은 편편한 암석 판 조각의 연결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아래는 용암 액체입니다.

그래서 그 액체 위로, 이 판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서로 부딪히는데,

그 경계선이 서로 맞물리면서 지진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정말로 위험합니다. 우리는 이 불안정한 판 위에 살고 있습니다.

마치 금이 간 계란 껍질과 같습니다

 

과학자들이 발견한 바, 판 이론은 성경의 진술과 일치합니다.

세계가 원래는 창세기 1장에서 기록했듯이, ‘하나의 마른 땅으로만 창조되었는데,

이 판이 서로 갈라지고 떠돌아다니다가, 오늘날의 여러 대륙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판 이론을 당시 발견했을 때, 새로운 단어를 생각하여

이 이론에 이름을 붙여야 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단어를 생각해 냈을까요?

‘Tectonic Plates’입니다. *지질구조 판이론

 

재미있는 것은, 헬라어로 ‘tecton’은 목수/석수(예수님의 직업)입니다.

그 형용사가 Tectonic이죠.

 

당시 과학자들이 이 단어를 새로 만들 때, 뭘 알고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이 이름을 아주 절묘하게 지었어요.

우리가 거처하고 있는 이 전 지구가 목수의 판입니다. *Tectonic Plates 목수가 만든 판.

그 목수의 이름은 바로 나사렛 출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 창세기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써, 결론을 맺습니다.

창세기는 1장부터 예수님을 논했고,

창세기 마지막에도 예수님을 논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이 세계는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또한 그를 위해 지어졌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지구상의, 생성의 여러 의문이 해결되었어요.

 

여러분,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합니까?

하지만 여기의 뜻은 그저 말씀 word’이라는 것 뿐만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복음서를 쓰기 5백년 전에, 헤라클라이터스라는 사람이 에베소에 있었는데,

그는 최초의 진정한 과학자였습니다.

 

그가 학생들이 동물의 생태와 기후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을 알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무엇을 관찰하든지 왜 그런 현상이 있게 되었는지의 배후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원인이 헬라어에서는 로고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 과학 학설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Ology(로고스에서 파생)‘OO을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한 생물학(biology)은 생물의 행위를 연구하고,

동물학(zoology)은 동물의 행위를 연구하고,

심리학(psychology)은 사람 심리의 행위를 연구하고,

사회학(sociology)은 사회의 행위를 연구하고,

기후학(metrology)은 기후의 행위를 연구합니다.

 

모든 학문의 각각 분야에서는 다만 우주의 어떠한 현상/행동의 원인만 알 수 있는 것이며, 창조 후

그런데 왜 우주 만물이, 이 지구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창조

 

답안은 예수님 그분이 모든 것의 원인이고, 예수님이 전 우주의 원인(로고스)입니다.

만물 도두가 그(로고스)로 말미암아 지었기 때문이고, 또한 그분이 지었습니다. 1:3

모든 영광, 존귀와 권능이 그분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번역 LCY, 교정 K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