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 아브라함, 이삭, 야곱 영어 녹취록 보기
◑구약 성경에는 두 개의 큰 흐름이 관통되는데,
이 점에 대해 먼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 중 하나는 유대 민족 신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인데,
당시 고대근동의 각 나라마다 모두 자기들 고유의 신이 있었습니다.
바알, 이시스, 몰렉 등 그 무슨 신이든지, 그건 ‘자기 민족의 신’ 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
그래서 당시의 전쟁이 모두 종교적이었고, 즉 두 민족신들 사이의 전쟁이었으며,
또는 두 신을 따르는 양측 신도들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야웨 혹은 ‘항상 계시는 분’이라고 불리는 이 신은,
다른 나라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정도로 이해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요.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신이, 세상의 모든 신들보다 높으신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그런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하나님은 유일하게 진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들은 모두 사람이 생각해낸 신들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창조한 우주를
지금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주장하였지요.
이러한 주장이 당연히 다른 나라의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성경 이사야서 특히 40장, 그리고 욥기서와 많은 시편에서도
이렇게 ‘온 우주적인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두 개의 큰 흐름의 하나입니다. ‘유대인의 신은 온 우주/세상의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의 흐름은, 그 전 우주의 신은, 바로 '유대민족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유대인의 특별성/선민됨 particularity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특별히 작은 무리의 사람들인, 바로 유대인을 선택하여,
그들하고만 특별히 친밀하게 교제하시는, 그래서 ‘유대민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 ‘전 우주의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른 나라가 어떠한 반응을 하였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까?
이 주장은 참으로 가당치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은 전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전 우주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라’는 이러한 이중 선포가 창세기부터 나옵니다.
만약 창세기가 없다면, 그런 주장을 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특별한 선택 The Scandal of Particularity
▶전에 제가 말씀 드렸는데, 만약 성경이 창세기를 빼고 <출애굽기>부터 시작한다면,
읽는 독자들은, 아마 하나님은 다만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말하기를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 유대인의 작은 족장 3명의 하나님’ 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창세기 50장의 연대는,
성경 나머지 65권을 다 합친 연대보다, 훨씬 더 길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가 다 합쳐서 대략 1500년간 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년대는, 천지창조부터 요셉까지인데,
이 기간이 1500년보다 훨씬 더 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 발견하겠지만, 창세기에는, 연대가 아주 많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나머지 65권과 비교해보면, 창세기에 나오는 연대가 더욱 깁니다.
창세기를 보면, 특별히 길고, 여러 역사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건 창1-11장인데, 창세기 1/4의 분량을 차지하므로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포함된 년대는 수 세기로 아주 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논했고, 심지어 많은 나라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후반부, 바로 우리가 지금 보는 12-50장은
아주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1-11장까지의 3배, 전체 창세기의 3/4의 분량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 포함된 년대는 아주 짧은데, 다만 수십 년뿐입니다.
그리고 소수의 몇 명에 대해서만 얘기했고, 특히 한 가족에만 대해 얘기했는데,
그 가족의 4대에만 걸쳐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세계 역사의 기록물이라면, 그 비율이 매우 불균형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불균형한 비례로 기록된 것인데, 거기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역사가 여기(12장)서부터 속도가 느려지는데요.
원래의 초점은 전 세계와 전 인류였는데, 이젠 초점이 한 가족으로 모아집니다.
이것은 특별한 배치인데, 창세기가 ‘하나님의 각도에서 인류 역사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전 인류와 전 역사를 다루시고, 1~11장
이제는 초점을 한 가족에 두십니다. 12~50장
전 세계에서, 이 가족만이 마치 제일 중요한 가족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각도에서 그 단 한 가족은 사실 대단히 중요한데,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셋의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예배자)들을’ 마음에 두고 계셨고,
그들을 특별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통해
그분의 구원 계획과 목표를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가, 이렇게 불균형적인 비율로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인가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똑똑히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서를,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해결해 주신다는 관점으로 설교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고독하냐? 네가 기쁘지 않냐? 너의 인생에 목표가 있느냐?
예수님이 당신의 그런 필요들을 채워 주실 것이다.’ 여러분도 이런 식의 설교를 들으셨지요?
하지만 성경의 초점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난제와 그 해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난제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인간들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시면 좋겠습니까? 이것이 그분의 난제였습니다.
그 해결 방법 중 하나는, 전 인류를 소멸시키고, 새 인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시도해 보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난 4강에서 한 가지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얼마 되지 않아서, 술에 취해 벌거벗은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슬픈 이야기가 새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도, 이 방식은 실패했습니다. *다 없애고 새로 시작
하나님이 반드시 다른 방법을 생각하셨고, 그 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그 새로운 방식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 가문의 선택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셨습니다. *인류의 구원
▶만약 어떤 사람이 제게 ‘하나님은 왜 인간을 지으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에게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는 그 아들을 너무 사랑하셔요.
그래서 그분은 더욱 많은 아들들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더욱 많은 아들을 얻고 싶은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대가족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비극은, 그분이 결국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자녀들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입니다. *노아 때 참조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일까요?
그분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신의 난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를
하나님은 한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여, 이 민족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철학가는 이를 ‘특별한 선택의 추문’이라고 불렀습니다. “The Scandal of Particularity”
예사롭지 않은 표현이지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특별한 선택의 추문’의 뜻은 ‘하나님은 왜서 유대인만 선택하였습니까?
왜 중국 사람을 통하여 중국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미국 사람을 통하여 미국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영국 사람을 통하여 영국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유대인만을 특별히 선택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셨는데,
다른 민족적 입장으로 볼 때는, 참으로 반감이 생깁니다’.
▶‘윌리엄 노먼 유워’ 와, ‘세실 브라운’이라는 두 시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짧은 시를 썼는데요.
1976년에 세상을 떠난 ‘윌리엄 노먼 유워’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얼마나 이상 odd 해요.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선택하시다니”
아주 총명한 시이지요. 이 시가 후에도 계속하여 사람들의 입으로 인용되었습니다.
후에 ‘세실 브라운’이, 같은 맥락의 시를, 위 시에 계속 연이어서 쓰기를:
“더욱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유대인은 멸시하였다.”
이 두 시가, 철학가들의 ‘특별한 선택의 추문’을 한 마디로 잘 요약해 줍니다.
▶저는 아들 셋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사탕을 사 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사탕 한 봉지를 사서, 그 중 한 아이에게 주어서
‘너희 셋이서 나누어 먹으라’고 말합니다.
-또는 초콜릿 세 개를 사서, 그들에게 각각 하나씩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한번 추측해보세요. 어느 방법이 집안을 비교적 평화롭게 합니까?
매 아이 모두에게 각각 사탕을 주는 것이, 방법적으로는 더욱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유대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탕봉지를 한 아이에게 주어서, 다른 아이들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미국 사람, 중국사람, 인도인으로 각각 보내시지 않고,
대신에 한 유대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을 보내어 유대인으로 세상에 보내셨으며, 이렇게 유대인은 지금도 선민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분부하기를 ‘너희는 가서 사람들과 나누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 particularity 은 그분의 선택이고, 당신은 이에 반박하고 싶겠지만,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족장들
▶창세기 12-50장까지 주로 네 사람의 이야기를 논했는데,
그 중 세 사람은 함께 논했고, 네 번째 사람은 아주 다릅니다.
이 강의(5강)에서는 세 사람만 논하겠고,
다음 6강에서 제 4대 이야기를 따로 떼서 다루겠습니다. *요셉
네 번째 사람은 아주 다른데,
하나님이 자신을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3대만 언급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6강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우리 같은 사람을 많이 닮았고,
반면에 요셉은, 예수님을 많이 닮았음.
▶우리는 여기서 3족장을 연구할 때, 그들은 대조적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대조되고,
이삭과 이복형제인 이스마엘이 대조되고,
야곱과 쌍둥이 형제인 에서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이 셋의 관계가,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을 주의해 보셨습니까?
조카에서 → 이복형제 → 쌍둥이 형제로 발전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다시 1~11장처럼 두 흐름을 보여주십니다.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처럼
창세기 때부터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 후손들을 대조해서 나타내 보여주시는데,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창세기의 이야기 모두는, 당신에게 선택하라고 도전합니다.
‘당신은 지금 야곱입니까, 아니면 에서입니까?’
‘당신은 이삭입니까, 아니면 이스마엘입니까?’
‘당신은 아브라함 입니까, 아니면 롯입니까?’
당신이 창세기를 읽을 때, 반드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이 질문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어느 라인에 속했습니까? 당신은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네 사람의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를 실제 이야기로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전설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민간에 전해온 영웅 이야기로 여깁니다.
혹시 그 내용 중에, 조금은 진실이 섞여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그것은
네 사람을 중심으로 한 전설이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저는 그들이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왜 반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소설’은 나중에야 비로소 어떤 문학의 표현 양식으로 알려진 것이고,
아브라함 시대 사람들은 소설 같은 것은, 아예 몰랐습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지어서 써 내던 사람도 없었고, 픽션 같은 것도 당시에는 아직 없었습니다.
문학양식 같은 것은, 당시에 아예 없었습니다.
창세기는 그저, 실제 일어난 일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며,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 같은 것을 발휘하여 기록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진실 절반, 상상 절반’을 섞어서 기록할 줄을, 당시에는 몰랐어요.
오늘날 많은 TV프로들이 이런 형식이지요. ‘진실 반, 상상 반’을 재미있게 하려고 섞습니다.
▶이 창세기가 진실인 이유 한 가지는, 바로 이 족장 이야기에 “기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의 용감한 사적을 제작하려면, 반드시 많은 기적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에는 무슨 기적 같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주의해 보셨습니까?
출애굽기에는 수 십 개의 기적이 나옵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이러한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세상의 전설 이야기에는 보통 많은 기적들이 나오는데, 창세기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전설 이야기에는, 그 전설에 부합되는 기적적/마술적 물건도 함께 나옵니다. *나르는 양탄자 등
그러나 창세기에는, 시대와 부합되지 않는 그런 마술적 물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족장이야기에는 시대착오적인 얘기도 하나도 안 나옵니다. Anachronism
그게 뭔지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이것은 시대와 부합되지 않는 것이지요.
당신도 이것은 전설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지요.
당시에 전화는 없었고, 팩스는 더욱 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만약 전화나 팩스를 언급했다면,
당신은 족장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이 함께 담고 있는 당시의 세부 문화는, 고고학에서 이미 증명 되었고,
당시 문화 배경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점은 자연현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데,
그것은 바로 창세기에서 항상 나타나는 천사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나타납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와 계시록에도 아주 많이 나옵니다. *천사 때문에 전설이라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만약 당신이 천사의 존재를 믿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믿기가 아주 힘들 것입니다.
창세기 족장 이야기에서, 천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이야기는 아주 평범합니다.
나머지 내용 모두는, 평범한 이야기들, 즉 남녀가 출생했고, 사랑했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사망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실제 사건으로 믿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와 소를 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걸 실제 사건으로 믿지 못하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그들 서로가 의견이 다르고, 다투고, 싸웠습니다.
이것은 무슨 새로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들은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위에서 얘기한 그들이 일상생활 모두는, 일반인들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창세기 이야기는,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답은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그들도 하나님께 말을 했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전 우주의 하나님이 의외로 아브라함이라는 미미한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일 좋은 비문碑文입니다. 묘비에 ‘하나님의 친구’라고 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불렀는데, 참으로 놀랍지요? 사41;8
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펼치신 하나님이, 뜻밖에도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는 나의 친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한 선택의 추문’입니다. *scandal of particularity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편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여기에 명백하게 ‘특별한 선택’의 진리가 나타나 있잖아요.
◑여러분, 다음으로 큰 물음은 하나님은 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요?
(위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과 한 가족으로 동일시 하셨다는 뜻도 됩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하나님이 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 identify 하셨을까요?
그들은 무엇이 특별했습니까?
이 질문들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계속 물어내려왔던 질문입니다.
‘유대인은 무엇이 남달리 특별한가요?’
‘하나님은 왜 우리를 택하지 않고, 그들을 택하였을까요?’.
이 질문은 마치 ‘왜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라는 뜻을 담기도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말뜻은, 마치 ‘응당 우리를 택해야 맞다. 그런데 왜 유대인을?’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욱 중요하고, 그들보다 재능도 더욱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틀렸습니다.
그 해답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연관있습니다. God’s sovereign choice
그건 제 멋대로 선택이 아니고,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한 자기 분명한 사실은, 이 세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분명히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으로 그들을 가까이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했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모든 네 세대가,
‘응당 기업을 계승 받아야 할 아들이, 마지막에 기업을 계승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장자가 집안의 기업과 재산을 계승 받아야 했는데,
하지만 여기 4가정에는, 장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막내를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택하셨고,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고,
이것은 ‘나의 사랑을 장자라서, 유대인이라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리는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을 받을지/ 안 받을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자기 출생적 권리에 의해서, 직접 계승 받지 않는 것이 좋았던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은 모두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삭과 야곱 두 사람 모두는, 출생적 권리가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장자의 기업’을 받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 명의 족장 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고상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아주 정직하게 알려주기를
이 세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 세 사람이 위대한 성자라고 미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더러 이 세 사람이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들 족장들에게, 도대체 다른 사람에게 없는, 어떤 뛰어난 자질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그들을 택하셨습니까?
▶특별히 야곱은, 이 세 사람 중에 제일 나쁜 사람이고,
여러분에게 야곱 같은 친척을 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친척이 있는 사람은, 아마 그가 자기 돈이나 물건을 도적질 할까봐
반드시 걱정되실 것입니다.
그는 계략이 아주 많지만, 후에는 그도 다른 사람한테 속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매번 성경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면 키득거림을 참지 못합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결혼하고 첫날 밤을 보낸 후에 보니, 그가 의외로 못생긴 언니를 취한 것입니다.
어제 그는 캄캄해져서야 신방에 들어갔고, 그리고 신부는 결혼식 내내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아름다운 동생을 아내로 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지만,
장인은 아주 못생긴 언니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만약 이 일이 당신에게서 발생했다면, 당신은 웃고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 친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또 다르지요.
성경은 참으로 가끔씩 매우 유머적입니다.
사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아주 큰 교훈 하나가 있는데,
바로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야곱이 눈이 먼 늙은 아버지를 속였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망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업자득입니다.
▶이렇게 족장들 모두는 아주 인간적이며, 연약하고, 그들이 가끔 잘못도 범하였습니다.
하지만 물론 올바른 일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더욱 깊은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 사람 모두 아내가 둘씩이며, 심지어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이런 그들의 어떤 점을 보셨을까요?
답은 바로 이 세 사람 모두 한 가지 남다른 특징이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한데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보다는, 믿는 사람을 더 가까이 하십니다.
God would rather have a believing man than a good man.
사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상책은,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꼬이는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고 신뢰하는 것
한번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명확히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하나님을 신뢰함)은, 선한 삶의 시작 지점입니다.
당신이 좋은 일을 많이 행할 수 있는데, 하지만 만약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고,
이삭도 이러한 믿음이 있었고,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그들의 믿음의 표현 방식이 약간씩 다른데, 이는 그들이 제각각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성격도 다르고, 기질도 달랐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믿음이 있다는 것인데,
다만 그들이 믿음의 표현 방식은 서로 조금씩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보여준 믿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림을 보여주며
이것은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아주 높은 계단식 첨탑인데, 소위 하늘에 닿고자 하는 탑이며,
이것이 아브라함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우르 이곳은 아주 대단해요. 아마 여러분이 흥미로워 하실 만큼, 대단히 문명화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우르의 집들은, 대다수 이러한 벽난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르는 당시 대단히 문명이 발전한 도시이고,
당시에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은 아주 앞선 것입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하나님이 의외로 벽난로 옆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최첨단 문명에서
‘내가 너를 남은 평생에 장막에서 살게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황무지로 이주
그리고 이 사람이 75세였습니다. 당신 같으면 75세 고령일 때,
최신식 집을 떠나 남은여생을 야산에 장막을 치고,
차디찬 겨울과 눈바람을 참으며 지내겠습니까?
만약 당시 그 노인이 믿음으로 살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아마 지금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듣고 흥미로워 하시는군요.
그가 당시 떠났던 곳이 얼마나 선진 문명적인데, 하나님이 떠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거기를 떠나, 아무도 없는 야산 벌판에 가서 장막을 치고, 목축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살기 좋은 고향을 떠나,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낯선 곳에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가 친척 친구를 떠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부친과 가족 몇 명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나안까지 가는 길의 절반인 하란에 도착했을 때,
함께 온 가족들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해서,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계속해서 가나안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노인은 하나님을 믿었고, 심지어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 하나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당시 그의 아내는 90세였고, 어쩐지 후에 아들을 낳았을 때, 부부는 그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네요.
히브리 원어에서 이삭이라는 뜻은 ‘웃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아들에게 ‘웃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당시 사라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듣고 참지 못하여 웃음을 터뜨렸는데,
하나님도 그 웃음을 들으셨고, 그래서 ‘웃음’이라 이름 짓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믿음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의 믿음도 한번은 흔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먼저는 11년을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어요.
하지만 아내의 배가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나이는 갈수록 많아졌고, 후에 아내가 그에게 건의하여 여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하니
그가 그대로 하였고, 결국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하지만 이스마엘은 믿음의 자녀가 아니고, 육신의 자녀여서, 하나님은 그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불공평하게 대하였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고, 그가 반드시 12족장을 낳을 것이며,
그가 바로 오늘의 아랍 나라의 선조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계보line로 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절대로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무엇보다 잘 나타내 보여준 때는,
하나님이 ‘너의 독자를 나에게 번제로 드리겠느냐?’고 물어보셨어요.
이삭이 출생한지 또 한 번의 16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32년 지나서
하지만 하나님이 그더러 이삭을 드리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삭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다시 그를 부활시킬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하나님이 한 번도 ‘죽은 사람이 부활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이 정말로 크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확실히 이삭을 드리려고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더러 늙어서 아들을 얻게 하셨기 때문에, 기적을 주셨으니
그가 또한 하나님이 죽은 이삭을 부활시킬 것을 믿었습니다. 또 기적을 주실 것을
여러분, 성경에서 ‘당시 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것과 같았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그런 죽은 나더러 아들을 낳게 하셨는데,
그가 또한 반드시 나의 죽은 아들도, 다시 부활시킬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큰 믿음입니다!
◑이삭의 믿음
이삭의 믿음은, 아버지가 자기를 번제로 드리기를 원했을 때,
거기에 순종한데서 드러났습니다.
당시 이삭은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림이 많이 있는데,
보통 그 그림에는 이삭을 12세로 그린 것을 보셨지요?
그러나 유대인이라면, 한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아주 잘 이해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히브리 성경은 장절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사건 후에, 사라가 죽는 것을 얘기 했습니다. 23:1
사라가 죽을 때 127세이고, 그렇다면 당시 이삭은 37세였습니다. 90세에 출산
사라의 죽음은 이삭의 번제 사건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장절 구분이 없다면
그래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이삭은 이미 30세 초반이었고,
그 나이에 연로한 부친에게 복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삭의 믿음입니다.
▶번제로 드렸던 곳은 모리아 산이고, 후에 여기를 골고다 혹은 갈보리 산이라고 불렀어요.
아주 신기하지요?
(이 점에 대해선 다음 번에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요)
이삭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내를 선택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도 이삭의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선택해 주신 리브가를 아내로 받아 들였습니다.
◑야곱의 믿음
다음으로 야곱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곱도 아주 큰 믿음이 있었어요.
자기가 축복을 조종manipulate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확실히 그렇게 하였습니다. 믿음이 오버했지요
암튼 모략과 속임수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복을 받고 싶었던 믿음의 사람이이기에, 이것은 좋은 점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에 하나님과 씨름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이때부터 남은 평생 그는 다리를 절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12아들이 12지파가 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비록 연약함과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잘한 일도 있었고, 잘못한 일도 있었는데,
모두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친척들과 대조됨
그 점은, 그들과 대조되는, 믿음이 없고 육신적으로 행하는 친척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고, 물질적인 삶으로만 살았습니다.
우리는 롯이 척박한 산에 살려고 하지 않고, 비옥한 요단 평지를 애써 선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사람들이 조그만 다툼이 일어났을 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좋게 헤어지자’, 때로는 이런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여라.
나는 다른 편 땅을 선택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말은,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자기가 먼저 응당 좋은 땅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롯이 계곡 쪽을 보니, 거기는 요단강이 뱀처럼 통과하며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아주 비옥해 보이고, 또한 따뜻한 열대 기후였습니다.
입지 조건의 모든 점이 사람을 확 사로잡는 곳이어서, 롯은 요단강 쪽으로 내려가겠다고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좋다. 그럼 내가 반대편 산지를 선택하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산의 하나님이었고, 롯은 눈으로 보이는 좋은 것만 좇아갔습니다.
롯만 이런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죽을 때가 다 되어도, 팥죽 한 그릇을 먹을지언정
아버지가 남겨줄 축복을 선택하지 않았지요.
그는 축복을 팥죽 한 그릇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에서 신드롬’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즉시 해결하려 하고, 늦어도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해결하려고 합니다. 참거나 기다리지 못합니다.
여러분,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에서 같이 되지 말라’고 깨우칩니다.
에서는 이 거래 한 것에 후회하였습니다.
후에 눈물을 흘리며 축복을 구했지만, 회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세 사람과 육신을 따라 사는 친척들이 서로 대비가 되고,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는 대다수 가족들에도, 모두 이러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가족이지만,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육신을 좇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대비를, 그들의 아내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자매 여러분, 창세기를 읽을 때 그들의 아내들을 특별히 주의해서 살펴 보십시오. 아주 재미있습니다.
사라, 리브가 그리고 라헬 모두 공통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 세 사람 모두 아주 예뻤습니다. 글래머는 아니고 예뻤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수록 글래머는 점점 사라지지만, 아름다움(인격 미)은 점점 증가합니다.
제 친구인 감리교 목회자가, 35년 전에 한번은 그의 교회에서 ‘미인 선발대회’를 열어서,
당시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가지 조건을 정했는데, 이는 참석자가 반드시 60세 이상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글래머와 인격 미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이 세 족장의 아내 모두가 아주 아름다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내적 성품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남편에게 복종하였습니다.
(자매님들이 별로 기뻐하지 않으시는군요)
다른 사람들의 아내를 보면, 이 믿음의 사람들의 아내와는
그 ‘믿음’ 면에서 달랐습니다.
사해 남쪽 끝에 형태가 신기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롯의 아내’라고 부르는데, 형태가 뛰어 가는 여자와 같습니다.
예수님도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교훈하셨지요.
그는 하나님이 심판하는 죄악의 도시를 도망쳐 나오면서도
한쪽으로는 그 소돔의 안락한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지요.
그래서 롯의 아내는, 역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들을 대비하고, 그들의 아내들도 대비가 되는데,
이 점을 유의해 보십시오.
당신이 이제 점점, 하나님이 왜 다른 가족도 아니고
이 가족들을 선택하시고, 함께하셨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이 세 족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였는데, 이 약속이 오늘까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인류의 창조 역사를 시작하셨고, *아담
또한 한 사람을 통해, 인류의 구속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아주 아름답습니다. 오늘날 성찬식 때도 말하기를
‘이는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다’라고 합니다.
‘언약’이란 단어는 아주 소중한데, 이는 동일한 힘과 권세를 가진 쌍방간의
일종의 ‘계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절대적 힘을 가지신 하나님 쪽에서 세우신 것이며, *맹세라는 의미를 포함함
그 목적은 상대방을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그 언약의 상대방은 다만 두 가지 선택이 남게 됩니다.
바로 언약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거절 할 것인지.. 입니다.
하지만 언약의 내용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약속을 하는데, 이 약속을 끝가지 지킨다고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였다는 것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사람은 맹세할 때 반드시 자기보다 더욱 능력있는 사람을 가리켜 하지요.
예를 들면, 하늘을 가리켜 맹세한다든지, 아니면 신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욱 능력 있는 존재가 없어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는 바, 이 일을 내가 반드시 행할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걸고’ 맹세하시지요.
그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였는데, 이는 그보다 더욱 능력이 있는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자신을 가리켜 맹세 하였고,
그가 맹세/언약한 것은 모두 진실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어요.
‘언약’의 성격을 쉽게 설명하면, 사실 혼인과 같은데,
그 중점은 ‘내가 반드시’에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이 ‘내가 반드시’라는 말을 여섯 번 하였습니다.
내가 반드시... 내가 반드시... 내가 반드시... I will
우주의 하나님이, 이 미천한 가족과 혼인 언약을 하셨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지요!
1) 그분이 그들에게 정착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고, 그 작은 땅이 바로 여러 대륙의 합류점이고,
전 세계 대륙의 랜드마크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길 찾는 이정표가 되는 큰 지형, 건물
아프리카에서 출발해서 아시아까지 연결되는 도로,
아라비아에서 유럽까지 연결되는 도로가 바로 아마겟돈이라는 작은 산에서 교차 되는데,
여기가 전 세계의 교차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누가 뭐라든지 그 땅은 그들에게 속한 땅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이며, 아브라함과 그의 후예에게 주신 영원한 기업입니다.
2)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은, 그에게 후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영원히 이 땅에 남게 될 것입니다. 언약 때문이지요.
3) 세 번째 약속은, 그분이 그들 선민을 통하여, 열방을 축복하든지
아니면 열방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12:3
축복 혹은 저주, 이것이 유대인을 부르신 목적이며,
그들 선민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양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약속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1) 첫째, 유대 남자 모두는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하며, 이것은 태어나서부터 약속 받은 표시다.
2) 둘째, 아브라함은 반드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
이 약속이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약속에 근거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마지막 계시록의 끝 페이지까지 여전히 나타납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라’. 아주 멋있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십니다.
성경에 마지막에서 우리는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하늘을 떠나 이 땅에 와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여 한 가족이 되고 싶어 하고, 그가 우리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주 창조와 인간을 창조하신 주요 목적입니다.
(오! 제가 아직 시간이 얼마 있지요? ... 2분 남았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야곱 이 사람이 야심만만한데, 그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놓지를 않았던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움켜쥐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에서의 후예는 오늘날 ‘페트라’라고 불리는 곳에서 지냈습니다.
거기에는 나중에 붉은 사암층을 깎아 만든 거대한 신전이 있고,
에서가 후에 여기로 이사 와서, 여기에 에돔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의 원한이 지금까지 중동에 존재하여, 아랍과 유대인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 사이의 원한은 후에 없어졌습니다. *베두인족?
그런데 헤롯이라는 마지막 에돔 사람, 그가 에서의 후예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에돔 출신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베들레헴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였어요.
그는 야곱의 후예가 태어나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한 가지를 가리키겠는데,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심상치 않는 믿음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소유한 적 없던 기업(땅)’을 아들에게 남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체 땅을 너에게 남겨주리라’.
이삭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체 땅을 너에게 남겨주리라’.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체 땅을 너에게 남겨주리라’.
하지만 그 세 사람은 모두 이 땅을 진정으로 소유해보지 못하였습니다.
막벨라 굴 외에는요, 거기는 그들 가족의 무덤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자신들이 소유해보지 못하였던 땅을 자손에게 남겨준다는 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이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어느 날엔가 그 땅 전체가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 11장을 읽을 때,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을 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으며’라는 말씀이 있지요. 11:13
이 말씀은, 그들은 하루 이틀만 믿은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따라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죽을 때도, 언약이 아직 다 성취된 것을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들어보시지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죽을 때)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11:39~40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헤브론에서 그들이 묻혔다는 무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살아있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우리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하게 되지 못합니다. 11:40
그들은 큰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으로서, 천국에서, 지금 달리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완성, 언약의 완성’은, 릴레이 경주에서 마지막 주자인
지금 우리 세대를 통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40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그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오실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은 모두 없어지고,
우리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여 나타낼 것입니다.
번역 LCY, 교정 K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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