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식사하는 자리 마8:5-13 2015.03.29 설교 스크랩
*관련글 : 작고 평범한 일에 행복을 담아두셨다
◑문제 제기/ 힘들지만, 계속 직장을 다녀야 하는 이유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꿈과 비전’이라는 것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한동안 자기 계발서가 유행을 했지요.
서점에 가면 제일 잘 팔리는 책들이 전부다 젊은이들을 위주로 한 자기계발서였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젊은이들은 그런 책들을 사서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내용이 일시적으로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면이 있지만
현실에 적용했을 때 먹히는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책 몇 권을 읽어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컨대 많은 강사들이 즐겨하는 말이 ‘젊은이여 비전을 가지라’ 이런 말을 하는데,
비전이 생겨야 비전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비전을 가지라고 주문한다고 비전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은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런 비전이 생기는게 아니고,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실족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요즘 직장에 취직하는 젊은이들의 50%도 아니고, 60%도 아니고, 거의 90%가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힘들게 취업해놓고, 왜 이직을 고려생각하느냐?
그 첫 번째 이유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거에요.
언제는 사람들이 비전이 보여서 일을 했습니까?
인류가 이 땅에 살아온 장부한 세월 동안 도대체 자기 비전을 가지고 산 사람이
몇 명이나 됐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누가 비전을 가졌습니까?
간디? 알렉산더? 드골? 누가 비전을 가졌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소위 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비전을 소유했다고 하지만
그 비전이라는 것이 반드시 직업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그 비전이 반드시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비전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에요.
히틀러의 비전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징기스칸의 비전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까?
그런 비전을 가진 사람이 더 많았다면 인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비전이 있었지만
그 비전은 당신을 희생함으로써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이지
당신의 영광이나 성공이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이 죽고, 자기가 낮아지고
그러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라든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상으로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도 어렵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설사 좋아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그것을 오랫동안 좋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생기고, 또 어려움이 생기고,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면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아픔이 되고, 의무가 되고, 책임이 되고,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그 때가 자기 일생에 제일 행복한 순간이에요.
그러나 항상 그 행복이 유지되는 게 아니고, 행복 덩어리가 조금 있으면 웬수 덩어리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이 아니고
‘나실제 행복함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고생하는 마음’이 현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저보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나서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제 목사가 되서 성도들에게 마음껏 말할 수 있으니 소원을 이룬게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모르는 말이에요.
목사는 사람 앞에 일하는 직업이 아니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일인데
이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남들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드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움이, 어떠한 목회적 즐거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상쇄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목회를 하는 사람은 좋아서 하는게 아니고, 순종과 믿음으로 합니다.
‘목회가 좋아서 한다?’ 그건 뭘 모르는 소리입니다.
목회가 좋은 면도 분명히 있지만, 그 수면 아래 감춰진 크나큰 고통과 한숨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업적 소명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죠.
‘또 잘 하는 일을 하면서 살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그 일을 할 기회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운동에 재능이 있기 때문에 선수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운동선수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길지 않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20대 중반인데 벌써 은퇴했습니다. 그의 전성기는 지나갔습니다.
재능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에요.
여자골프 선수들, 하도 한국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선수생활을 오랫동안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깐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음악인들. 음악에 재능이 있기 때문에 연주자가 되는게 아닙니까?
그러나 연주자로 활약할 수 기간이 길지 않아요.
소위 ‘신동’ 어렸을 때나 신동이지, 나이가 들면 평범한 음악인에 불과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착 펄만이 말하기를, 나이가 40이 넘어서도 연주활동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 나이가 되면 재주로 승부하는 게 아니고
경륜, 꾸준한 노력, 그리고 얼마간에 운이 따라줘야 됩니다.
기업인들. 대기업에 취업해서 임원이 되기까지 승진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요.
그러나 임원이 된 후에 은퇴하는 날이 옵니다.
그러니까 그 실력/경력/경험을, 은퇴 후에, 어디에 사용할 것입니까?
사람이 잘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국회의원 얼마나 좋아요? 모든 사람이 꿈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기는 4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5년 단임 밖에 못 합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평생을 준비했지만, 그 갈고닦은 기량을 써먹는 데는, 너무 짧습니다.
인생은 길어요. 그보다도 깁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살라’는 말이,
우리 인생의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꿈꾸는 것을 갖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영원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만둬야 되는 때가 오고
그 이후에 뭘 하면서 사는 것이 보람될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아마 제 말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는 ‘목사님, 회의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실 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되고 보람있고
또 행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우리가 지혜를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살도록 만드셨느냐?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삶이라고 말씀하셨느냐?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 해답 / 그렇다면 인생의 행복을 어디서 찾을까요?
▶탕자가 자기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해준 것이 무엇입니까?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여주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먹고 즐기자고 했어요.
우리는 이런 성경구절을 ‘이건 천국을 묘사하는 것이다’라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상징적인 구절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의 모습을, 가족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했어요.
여기에서 천국의 즐거움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의 즐거움을
가장 근접하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잃어버린 자식이 돌아와서 살찐 송아지를 잡고 온 가족이 먹고 즐기는 것.
그것이 가장 근접한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을 무슨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든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든가 그런 것으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그 아버지가 탕진한 재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남겼느냐? 얼마나 네가 잘못했느냐?
경영을 잘 못했느니.. 그런 말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자식이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고
그래서 그 즐거움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하신 것도
함께 먹고 마신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 만찬이에요.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
이상한 것은 테이블에 한쪽에만 앉아 있다는 사실이고,
마치 단체 사진 찍는 것처럼, 서로 마주보며 앉지 않고, 한쪽으로만 앉았어요.
그리고 그 식탁에 별로 먹을 게 없어요. 그 그림을 여러분 유심히 보세요.
별로 먹을 게 없어요. 만찬자리라고 부르기에는 음식이 빈약합니다.
그건 상상력의 부재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찬식을 거행하신 것이 옳지만
성찬식은 식사하시는 도중에 한 것입니다.
식사하는 도중에 떡을 떼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렇게 성찬식을 재정하신 것이지
그 전체를 보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포도주를 나누고, 함께 잔치를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식탁공동체로 모이는 것. 거기에 천국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찬식을 우리가 갖는다는 말은, 그저 주님의 수난만을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가 다 형제, 자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먹고 마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천국을 무엇에 비교하셨느냐?
11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앉는다’는 말은 ‘식사한다’는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식사한다는 말을 ‘앉는다’라는 표현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 집에 찾아갔을 때
‘다윗이 들에서 돌아오기 전에는 앉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식사하지 않겠다’라는 뜻입니다.
영화 <벤허>를 보면 찰톤 헤스톤이 식사할 때에
베개에다가 왼쪽 팔꿈치로 비스듬히 기대서 눕고, 오른손으로 식사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데
그건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에 전형적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손으로 식사했어요. 누워서 식사한다는 말은 휴식을 말하고,
또 쉼을 말하고, 식사 시간은 천천히 즐기면서 대화하면서
함께 식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앉는다’라는 단어 옆에 각주 숫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주를 보면 헬라어로 ‘앉는다’라는 말은
‘기대어 누우려니와(유대인의 음식 먹을 때에 가지는 자세)’를 뜻합니다.
즉 ‘앉는다’라는 말은 ‘식사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천국을 묘사하실 때 동서에서 많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
여러분 혼자 밥을 먹는 것은 그건 외로운 일입니다.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오붓한 일입니다.
가족들이 식사하는 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대가족이 식사하는 것은 더 즐거워요.
그리고 일가친척, 많은 사람, 동료들까지 함께 식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잔치자리에요.
어머니 입장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즐겁습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천국을 동서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로 묘사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우리가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고 가장 의미있는 것이냐?
좋아하는 일 필요하죠. 잘하는 일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요. 정말로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평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행복,
그리고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의 모형은 어디에 있느냐?
서로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평범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통하여 천국을 묘사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이 평범한 즐거움을 통하여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거기에서 천국을 엿보게 하셨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열심히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전영택 작사 구두희 작곡. 정말 성령의 감동으로 만든 찬송가 입니다.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그게 낙원이에요.
다른 데가 낙원이 아니에요.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을 수는 있지만,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나와 식구들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게 만들고,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엉뚱한 곳에서 찾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일과를 마치고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실 수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감사 기도해야 될 필요를 느낍니까?
출근할 때 그런 기도 할 필요를 느낍니까? 사우나 할 때 그런 필요를 느낍니까?
아니에요. 그러나 가족이 사람들이 같이 식사할 때는
웬일인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그건 습관에 의한 게 아니고, 사람이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경건한 것이고,
거기에 축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사를 해야 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식사 하면 이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식사하는 자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즐겁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반찬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가장 즐거울 때는 식사하는 교인들이 많아서 밥이 떨어졌다!
권사님들이 불평할 거 같아요? 천만에 말씀. 즐거워합니다.
‘밥이 떨어졌어~(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즐거워하면서)’
국이 떨어지려고 하면 그냥 물만 더 부으면 됩니다.
한국 음식이 얼마나 천재적인지 몰라요. 국물만 더 부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먹는 것이 즐거운 거에요.
나 혼자 좋은 것을 먹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아요.
전 세계에 국민은 다 굶는데, 혼자 먹는 사람이 있어요.
이상한 사람입니다. 이상한 나라에요. 도대체 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다는 말인지요.
옛날에 임금님은 나라에 흉년이 들면 반찬수를 줄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북한은 무슨 외국에서 수입하는 와인에다가 샴페인에다가
도대체 누가 먹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여러분 좋은 음식을 혼자 먹는 것은 절대 즐거운게 아니에요.
예수님 말씀에 ‘동서에서’ 그 말은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누구든지 오라는 얘기에요.
‘누구든지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동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으려니와’
우리가 갖는 성찬식이 바로 그런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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