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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LNCK 2015. 6. 1. 07:12

이미 많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1:1~22                     15.03.04.출처보기

 

 

 

 

중국의 인구가 13억을 훨씬 웃도는 14억이라고 보고 있는데,

14억 인구 중에서 한족이 95%이상이고, 그 외에 55개의 소수민족이 흩어져있는데,

이 한족의 95%라는 숫자에는 중국의 중원을 지배했던 많은 민족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중국 본토를 지배했던 많은 민족이 한족으로 흡수 통합되었는데,

그 민족들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이라든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라든지,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 등이 다 없어지고 흡수 통합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조심스럽지만, 요즘의 교회의 현실을 보면 내용적으로

이렇게 세상 속으로 흡수 통합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에 대해서 말만 하고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아주 쉽게 자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우선 나 자신을 보면 알고, 같이 대화를 나누는 교인들을 보면 압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인 돈이나 출세,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것들을 나도 좋아하고, 교인들도 좋아한다고 하면

세상으로 흡수 통합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도 선민에 대한 얘기가 계속되었지 않습니까?

 

창세기가 50장 가운데 아브라함이 나오는 12장부터~50장까지가 선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선민이 개인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유다

이런 식으로 조명이 되고 소개되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시작부터 창세기와 시간적으로 큰 갭이 전제되며 시작되고 있습니다.

 

12:40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라고 나옵니다.

 

요셉이 죽고 나서 세월이 흐르며 430년 동안에 70명이 내려갔다가

200만 명이 넘는 숫자로 번성하게 되어서, 출애굽기에서 내세우는 선민의 모습은 집단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때에는 개인적인 선민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신앙은 어차피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창세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스스로 주체적이신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인격을 복으로 누리는 자들이 선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가 선민의 본질적인 성격 규정을 해주었다면, 출애굽기는 그런 선민들이 집단으로 나타납니다.

430년을 지나는 동안에 70명이 200만 명이 넘는 숫자로 번성하여

그 집단으로서 선민의 이야기가 출애굽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교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과,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아주 뚜렷하게 근본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습이 앞에서는 부분적으로 보여 지고 있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다른 점은, 창세기가 선민의 모습을 개인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출애굽기에서부터는 집단적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교회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교회가 나갈 방향을 이미 제시해주고 있다고 봐도 좋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러한 내용을 보니 이미 많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집단으로서의 선민의 특징과 성격 규정>을 그렇게 집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본문 출1: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점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숫자적으로 200만 명이 넘는 번성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이 땅에 선민이 많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인데,

이것이 우리의 교회의 현실에 적용시키면 이미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민의 역사가 개인적 차원으로부터 집단적 차원으로 바뀌고,

이제 집단으로서의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시작 될 때에 이미 많았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교회의 부흥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교회의 창립멤버가 10명이라면,

10명에서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교회로 부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꼭 이러한 관점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많다는 것을 출애굽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400년의 기간을 뚝 잘라서 침묵 속에 묻어버리고,

우리에게는 400년이 지나서 200만 명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400년간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것이 다 번성하는 과정인데 이것들을 다 제쳐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 세상에는 우리의 지역 교회가 창립되기 전에

이미 선민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미 많습니다.

 

10명이 모여서 100명이 되고, 100명이 모여서 1,000명이 된다는 그런 개념으로

선민의 집단인 교회를 볼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선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교회는 뭘 하는 곳이냐?

 

선민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민의 수는 정해져있고,    ※관련글: 아직 우리에 들지 아니한 / 존 파이퍼

정해져있지만 숨겨져 있는 그들을 선민으로 찾아내는 곳이 교회인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만 명이 넘는 숫자가 선민의 역사로 시작되고 있는데,

그들이 광야를 거치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장정 60만 명이 다 죽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사가 부흥을 지향하는 역사가 아니라,

이미 선택된 사람들 중에서 선택받은 자로 바르게 응답하는 자들을 찾는 것입니다.

 

바르게 응답한다는 것은, 광야는 이 세상적으로 좋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인데,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는 장소가 광야인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선택하신 많은 숫자가 된 그 선민들 중에서

이제는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숫자를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많은 선민이 있게 하셨기 때문에,

그 많은 선민 중에서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하는 자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바입니다.

 

즉 교회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워놓고 그 공간 안에 사람들을 많이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선민답게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선민을 찾아내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이미 많으니 부흥하려고 하지 말고, 이제 과제는 숨겨져 있는 선민들을 찾아내서

세상 속에서 기쁨과 만족의 이유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김 과장, 이 대리, 전무님 모두가 돈 많이 버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사는 직장 속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기쁨의 근거로 삼는 그런 선민을 찾아내서 세상 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중에 참 선민이 가려지는 과정을 걷는 것이 교회의 역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된 것이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찾아내야 하고 올바르게 응답하도록 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선민/교회가 다른 점은 8-10절까지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대하여

이 말은 구분 짓는 것이고 상대자로 보는 것이고, 우리에게 속할 수 없는 자라고 구분을 짓습니다.

 

이것은 외부적으로 애굽의 왕이 애굽 사람들과 구분을 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쪽에서도 430년을 지내는 동안에 끊임없이 자신들을 구분 지었습니다.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분을 지으려면 어떤 표식이 필요하고,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하는 다름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 430년 동안 아브라함의 혈육()이고 그 중에서도 이스마엘이 아닌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고,

또한 에서가 아닌 약속의 자손에 속하는 야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이삭과 야곱을 거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 있는 후손들이라는 것이고,

그 약속이 들어간 혈육이 구분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설령 이방인들이라도 이스라엘의 영내에 들어와 산다면 할례를 받는 사람이면 표식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의 혈육과 할례가 430년을 애굽에 살면서도

중국의 여진족, 거란족, 만주족처럼 한족에 휩쓸리지 않게 된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오늘날의 교회로 가지고 와보면,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도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과 할례였는데, 이것이 오늘날로 말하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마음속에 흘러야 한다는 것이고, 할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의미를 교회의 현실에 적용하려면?

 

할례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이 담겨진 표식이므로,

할례가 한 번 몸에 이루어지면 언제 어디서나, 잠잘 때나 깰 때에나, 누구를 만날 때에나,

장사할 때에나 사업을 할 때에나 공부할 때에나

그 표식이 언제나 몸에 붙어있게 되는 것처럼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은, 사업에 위기가 생기거나, 자식문제가 생겼다면, 그 문제가 생기기 전에 먼저 내 몸에 할례의 자국이 있는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므로, 먼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는 뜻이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 지어지는 선민의 표식입니다.

 

사업의 위기 상황을 보기 전에, 자식의 문제를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눈을 맞추라는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몸에 할례의 표식이 있는 것처럼 먼저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니 그 분과 눈을 맞추라는 것인데,

이것이 안 돼서 선민 중에서 60만 장정이 두 사람 빼고 다 죽었습니다.

 

정탐을 하고 왔는데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이미 왕정체제를 구축하고,

안정된 국가체제 안에서 철기문화를 발전시켜서 다 자리 잡고 있으므로 정탐하고 나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을 어떻게 뚫고 들어가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보다, 내 몸에 할례가 있는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먼저 보았고,

하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하나님이 그 눈길을 통해서 마음속에 당신의 사랑과 평강을 전달해주시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확신을 주시므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터졌을 때에 문제에 눈길을 주며 반응하는데, 선민은 할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그 문제보다 먼저 하나님을 봄으로써 세상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숨겨져 있는 선민을 찾아내서 그 사람을 교회 안에서 프로그램 하느라고

영적 에너지를 다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서 눈앞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보다도

할례의 표식처럼 하나님을 먼저 보고 눈을 맞추라는 것이고,

그것이 선민의 존재이고 그렇게 완전히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다른 점은, 오늘 본문에 13-1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그 시키는 일이

이 말은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이고, 이게 또 구분되게 하는 요소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선민의 역사가 집단으로 시작되는 시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430년 동안에 20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430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 침묵 속에 묻어버립니다.

 

이것은 집단으로서의 선민의 이야기의 출발이, 많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이므로,

부흥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선민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들을 교회 예배당 안에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구분되게 살게 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분 되는 것의 첫 번째가, 세상의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마음의 시선이 먼저 하나님과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할례의 의미이자 구분되는 표식이었고,

그 다음의 구분되게 하는 것이 노예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노예의 상태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노예상태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할례가 몸에 있듯이 언제 어디서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먼저 마음이 하나님과 눈을 맞추고,

눈이 맞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내 마음에 주어지면서 하나님과 하나 되면서,

내 마음이 온전한 복을 누리는 것이고,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 복지에 거하는 것이지만, 여전이 남아 이 내 몸이 움직여져야 하는데..

 

선민의 몸은하나님과 눈이 맞을 때에 하나님의 주체성은

수도관에서 물이 흘러들어오듯이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는데, 그 하나님의 주체성이 담겨져서

하나님의 생각과 소원과 계획들이 넘쳐나며 이 땅에서 이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몸은, 하늘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주체성의 저수지가 아니라 샘터입니다.

이 땅에서 육체가 움직이면서 진행되는 삶을 위한 계획, 생각, 판단, 소원들이 내 인격에서 나오는 샘터입니다.

 

이 육체가 하늘에서 흘러오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담는 저수지가 아니라,

내 인격과 내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세상에 내보내는 샘터가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샘터로써 살아갑니다.

 

설령 회사에 들어가서 노예처럼 산다고 해도

회사에 들어가는 경위가 내가 돈 벌고 밥 먹고 잘 살려고 들어가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의 다른 점은, 이 육체가 자기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주체성의 샘터가 아니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담는 저수지입니다.

그 저수지에 흘러들어와 모아지는 주체성이 세상으로 흘러나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르다는 것이고, 세상과 구분되는 집단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마18:20절에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큰 예배당이나 화려한 교육관, 기상천외한 갖가지의 프로그램들이 돌아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선민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피가 마음에 흘러야 되는데,

아브라함의 혈육이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주님의 피가 흐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날마다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할례의 표식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내 마음의 할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그렇게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과 눈이 맞게 되고,

하나님과 눈이 맞으면 평강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 보세요.

 

14:27절에 주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라고 하십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지 먼저 문제를 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과 눈이 맞아서 주어지는 평강을 경험하세요.

 

이것이 바로 할례로서 구분되는 구약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것이고,

 

▶4. 네 번째로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노예가 됩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전락시키신 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주체성을 흘려보내는 샘터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노예로 살라고 하는 그 형식을 선민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노예 생활로 빠뜨리셔서, 하나님의 노예가 될 수 있기 위한 준비 단계를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십자가 복음 말씀이 있으면 되는 것이고,

날마다 상번제를 드리듯이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의 나의 사건이 되게 해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재현시키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공감하는 마음이 있고 육체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육체가 십자가에서 흘러 들어오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담는 저수지가 되어서

가정에 있고 직장에 있고 세상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꾸 예배당을 지어놓고 모여서 생활하다가 밖으로 나오면 세상과 구분이 되지 않고

한족에 흡수된 거란족처럼 살 것이 아니라, 예배당 안에서는 말씀이 전해지고 말씀을 통해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되는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고,

 

그 고백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십자가 할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눈을 맞추고, 그 시선을 통해 세상 속에서

평강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담는 저수지가 되어서 흘려보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있고, 내 육체가 있고, 육체가 사는 현장이 있으면 선민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local) 교회는, 목양을 하는 장소이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선교지이고, 선교의 전초기지이면서

그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선교를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교인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고 지금 목회를 하시는 다른 목사님이 이 말씀을 들으며 공감한다면,

저하고 그 목사님 둘이 모여 있는 것이 교회이고,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이 둘이 바로 참 교회입니다.

 

그 분이 목회하는 곳은 참 교회라기보다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선민을 찾아내는 곳이고

선민으로서 응답하도록 돕는 곳입니다. 그 분이 바른 교인이 되었다면 그 분까지 포함해서 또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르헨티나에서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디자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생활 속에 표현하는 분이 있다면 그 분과 제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 집단으로서의 선민의 모습을 보면서 교회의 성격 규정을 하나님께서 못 박으십니다.

 

선민은 부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은 중에 선민을 찾아내서 바르게 응답하는 자들로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목사님들이 목회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찾아내자! 그리고 세상과 구분되게 살게 하자!’라는 것입니다.

그 구분의 기준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할례와 노예입니다.

 

이 두 가지 다른 점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은 해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부흥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의 노예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주시고,

이미 많은 선민들 중에 찾아내서 바르게 응답하는 선민으로 세워가는 일들을 하게 하시며,

이 선민들이 선민답게 되기 위하여 할례와 노예라고 하는 두 가지 차이점을

명백히 생활화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