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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은 이러하니

LNCK 2015. 6. 3. 15:34

이름들은 이러하니                   1:1-7                    2015.03.22. 출처보기

 

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들은 이러하니

 

 

창조와 구원

 

출애굽기 강해를 시작합니다.

금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지 70주년입니다.

70년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이라고는 하는데,

BC586년에 바벨론에 망했다 BC537년에 해방되어 돌아왔으니 약 50년입니다.

그런데도 왜 70년이라고 하는가요?

 

1) 1차포로 때부터 계산하면 거의 70년입니다. BC605~537

2) 예레미야서에 예언된 바로는, 70년만에 돌아온다고 했기 때문이고요. 9:2, 25:12, 29:10

 

3)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성전은 바벨론에게 망할 때 훼파되었습니다. 스룹바벨 때 다시 재건을 했는데

그때가 BC516년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이 회복되기까지는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방은 생명의 탄생과 같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은 반만 년 전부터 존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피지배나 억압이라는 굴욕적인 현실을 겪으며 민족은 거듭납니다.

고난을 통해서 민족의 하나 됨과 자유와 자존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압제를 통해서 민족의식이 비로소 살아났다 할 것입니다.

 

단순히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풍성함을 누려야 할 생명이 왜곡되고 위축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다보니 자신의 본모습도 잃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바로 생명의 출발입니다. 생명의 탄생이고 새생명을 얻음입니다.

 

출애굽기는 그런 역사와 인생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는 두 번째 책이지만 실상은 첫 번째 책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하나님을 먼저 만났을까요, 아니면 창조의 하나님을 먼저 만났을까요?

 

순서상으로는 창조가 먼저고 구원이 다음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후,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하나님은 바로 만물의 창조주시다.

이스라엘이 만났던 하나님은 해방자 하나님이었고,

이 해방자 하나님의 눈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만났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하나님을 먼저 만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신약이 있고 구약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생명을 얻은 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약 성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순서는 구약이 먼저고 성부 하나님이 먼저이지만,

우리의 실제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도 없고,

설사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할지라도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후 그 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얼굴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얼굴이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가가 아무리 가혹하고 엄격하게 보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는 말씀이 옳습니다.

 

이름들

 

출애굽기라는 책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정한 제목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70인역은 그 성경의 중심되는 내용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로 기록된 원래의 성경에서는 책 제목을 정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각 성경 첫 문장의 중요 단어를 제목으로 정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태초에(베레쉬트)’이고,

민수기는 광야에서(베미드바르)’입니다.

출애굽기는 쉐모트이름들입니다.

 

저는 이름들이라는 단어가 좋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를 말합니다. 이름은 생명입니다.

생명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입니다.

 

이름들이라 불리는 책답게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12족장을 대표하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구약 이곳저곳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언급된 족보들이 많습니다.

 

종교적이거나 다른 여러 목적이 있지만, 그것을 떠나 하나하나의 이름들은 소중합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 인생을 다 담을 수 없어 우리는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발음도 어렵지만 소중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납골당에 가면 수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귀찮은 듯 그냥 지나쳐 가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은 매우 특별한 이름입니다.

 

사랑했던 사람, 그리운 사람, 가슴 깊은 사연을 함께 나눈 사람의 이름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은 소중합니다.

 

출애굽을 해야 했던 이유는, 이 이름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생명이 남용당하고 착취당하는 땅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출애굽의 첫 장면에서 이름을 거론하였고, 바로 이어지는 사건은

생명을 없애려 태어나는 아이를 강물에 던지는, 반생명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5절에 등장하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이 반생명의 역사에 저항했던 자랑스러운 인물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놀라운 것은 일개 히브리 여인인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언급하면서도

바로의 이름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왕이 세티 1세니, 람세스 2세니 하지만

성경은, 대제국 애굽 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억되지 않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탕진하고 다른 생명을 억압하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없고 거지의 이름은 있습니다. 그는 나사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다.

 

요즘 드라마 징비록에서 임진왜란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가장 유명하고 권력은 정점에 있었던 사람은 선조였습니다.

이순신은 이에 비해 미관이었고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고

마지막 싸움에서는 조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선조는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왕으로 기억할 뿐입니다.

 

역사보다 무서운 것이 하나님의 기록입니다.

역사는 수백 년, 길어야 수천 년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그런 사람이 영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또 신앙인들에 대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고후6:9)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아벨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어둠 속에서 사라져 같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생육 번성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이삭 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십여 장에 걸쳐 아브라함의 신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이삭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삭 한 생명으로부터 야곱과 에서 둘이 되었습니다.

야곱에서 다시 열둘이 되었습니다. 열둘이 애굽으로 갈 때쯤이면 70명이 됩니다.

 

그런데 4백년이 흐른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생육하고(fruitful) 불어나(prolific) 번성하고(multiplied) 매우 강하여(exceedingly strong)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the land was filled with).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되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12:2),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3:16),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22:17)

 

오늘 본문 7절 말씀은 그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당시 장정만 60만 명이었으니

그 가족까지 합치면 족히 2백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요롭고 안정된 땅 애굽의 뱃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애굽의 보호 속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애굽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끼어서, 강대한 민족을 이루기에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애굽의 중심 속에 밀어 넣어, 그 보호 하에 강성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처음 야곱과 70명의 조상들은 왜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떠나더라도 잠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백년이 흘렀고 하나님은 당신의 방식으로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50장과 출애굽기 1장은 연달아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4백 년 가까이 되는 공백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전혀 활동하지 않으셨던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때처럼, 모세 때처럼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요?

 

바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낳게 하고 기르시는 바로 그 현장에서였습니다.

주님은 부지런히 이스라엘이 번성하도록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손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눈이 어두워 못 볼 뿐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나만 남았다고 탄식할 때

하나님은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예비해두셨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런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허드렛일 같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창세기 1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이 복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만

실상 이 축복은 모든 인류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반생명에 저항하여 생명을 풍성케 하는 역사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자연 세계의 위협에서 인류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세계사는 소수의 지배에서 다수의 지배로

더 많은 생명이 그 풍성함을 누리도록 나아가는 민주주의의 역사였습니다.

 

잠시 제국주의가 발호해 소수 민족만의 번영을 추구하였지만

인류는 모든 민족이 풍성함을 누리는 인류 공영과 공존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떠남

 

애굽은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곳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떠나야할 때가 되니 진통이나 고난이 시작됩니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 캥거루는 그곳이 익숙합니다. 보호막이 됩니다.

그러나 다 자라서도 그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좁습니다.

알도 부화할 때가 되면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안전했던 곳이 이제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됩니다.

 

출애굽은 애굽이 행한 핍박 때문에 일어났지만, 실은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성서의 헬라 어 단어들을 목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스의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분깃점 표지판에서

엑서더스라는 단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엑스 호도스;, 길에서 빠져나가다는 뜻입니다.

 

 

 

길이 좋다고 계속 가면 안 됩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빠져나와야 합니다.

빠져나갈 때가 되면 사인이 옵니다. 안전했던 곳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자주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그 싸인을 잘 분별하고 그 음성에 잘 순종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이제 애굽을 빠져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5절에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70명이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허리(야렉)와 같은 어원이 바로 환도뼈입니다.

환도뼈는 남성 생식기를 감싸고 있는 엉덩이 부근의 고관절을 말합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환도뼈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꺾이지 않는 야곱의 고집에 하나님이 질려 그만 그의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싸우고 환도뼈를 절며 떠오르는 해를 뒤로 하고 걸어가는 야곱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환도뼈가 꺾인 무능력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야곱의 환도뼈로부터 70명의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이어서 수 백 만에 이르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무력해졌지만

그때로부터 하나님께서 대신 일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에게는 무너진 환도뼈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이방의 땅이었고 반생명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곳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이제 그 허리의 임무는 끝이 났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명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는 개인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커졌고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성장했으면 그에 맞는 땅과 법과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출애굽은 바로 그런 변화와 성장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