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구원의 확신 롬6;1~11, 고후5:15 15.02.22.출처보기
*우리가 지금 확신하고 있는 '칭의'/ 구원의 확신이, 오류일 수 있습니다. *벤자민 오 목사 <구원론> 설교 모음
◑옥한흠 목사님 설교 클립
뭔가 참 선한 일, 그럴 듯한 일
주님의 일을 하느라고
동분서주하며 요란을 떠는데,
전부 마음이 허영에 들떠 있어서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고 있어요.
의견이 안 맞으면, 서로 다툽니다.
서로 시기 질투합니다.
편당이 있고, 한 마음이 안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병입니다.
영적으로 굉장히 어리다.. 그 말입니다.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구원
이것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무조건, 구원받은 줄로 착각하고
(말씀에) 복종하지 아니하면서
되는 대로 사는 사람, (천국을) 안심할 수 있느냐?
안심할 수 없어요.
순종 안 하는 사람이
그 믿음이 진짜입니까?
순종 안 하는 사람이
진짜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순종 안 하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고, 우리가 단정할 수 있나요?
못 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믿음만큼 중요하다 그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너희도 복종하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 차례입니까?
하나님이 죄인에게 무조건 안겨주신
영생의 축복, 얼마나 귀합니까.
이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일생동안 부들부들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노력하라.. 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연 의지만으로 안 돼요.
(율법주의의) 강제노동이 아닙니다.
억압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너무 좋은 가치가
나의 의지를 먼저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믿으십시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 믿읍시다.
그러면 복종이 절대 어려운 것 아닙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 교회 성도들이 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가서 헤아려보니, 한 3백명 와서 앉아 있으면,
이거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습니까.
거기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되어버릴 거예요.
세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좋은 소원 가지고 복종하면서 살다가
나중에 예수님 앞에 서게 되면,
서로 쳐다보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요.
그 날을 우리는
고대하고 사는 것 아닙니까.
(말씀에) 복종하며 삽시다.
복종하려고 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순종하려고 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세요.
도저히 안 되는 일을, 무조건 명령하시고
발로 차면서 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계속 힘을 주시고, 능력을 공급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전심을 다해서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에 밑줄 그어진 내용이, 아래 설교에 나옵니다.
◑지난 시간 복습
저희가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 계속해서 칭의와 또 성화에 대해서 보려고 합니다.
▶칭의란, ‘의롭다고 인정해준다, 의롭다고 선언해 준다’ 라는 뜻이죠.
그런데 내가 의로워서 의롭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전혀 의롭지 않은데,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내가 덧입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의를 하나님은 보시고,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렵지만, 왜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어야 되는지를 제가 말씀드립니다.
지금도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더,
<거짓된 구원론>이 정말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잘못된 곳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성경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잘못된 미혹으로 인도할 것이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되고, 또 이것이 어렵지만, 그러나 일단 알고 나면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님이 굉장히 성경을 잘 가르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분의 메시지를 들을 텐데,
그 누가 이 부분(구원론)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해도,
우리 성도님들은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말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성도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론)에 대해서 만큼은, 자세히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놓치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어려워도 이 말씀을 전하니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지금부터, 먼저 복습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25절에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화목제물을, 영어로는 sacrifice of atonement라 하는데, *atonement 속죄, 죄를 대신 속함
하나님이 예수님을, 속죄 제물/화목 제물로 세우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김세윤 박사의 <칭의와 성화> 책에서 간단한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칭의론은, 법정적 범주로 해석하면, 아담적 죄에 대해서 용서 받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관계적 범주로 해석하면, 아담적 죄로 뒤틀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당하심으로써 우리가 그 진노에서 해방되었고,
또 깨어진 관계의 원인이 되는 죄를
예수님이 그 피로 씻어주심으로써, 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성경이 과연 “칭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는가요?
즉 칭의에 관한 성경적인 표현들을, 지난 주일에 제가 설명 드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선, 여기를 클릭해서 보세요. http://blog.daum.net/rfcdrfcd/15975755
◑물세례의 의미 – 나의 장사됨과 부활
▶그러면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죠.
여러분이 언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는가 하면
이게 사실 오늘 설교의 결론인데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물세례가 뭐냐?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장사와 그 부활에
동일시하는 것이고, 그분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잠기는 것이, 그 분과 함께 죽는 것이요,
장사지내는 것이요, 다시 물 위로 올라올 때,
새 생명으로 다시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언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칭의의 옷을 입엇습니까?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이 내 대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깨끗케 하심으로, 나의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천하만민이 보는 앞에서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세례받는 일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이제 나는 의에 대해서, 다시 산 자가 되었다.. 라고 공포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칭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누구라고 불러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을 받았어요. 그게 칭의죠.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칭의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아멘!
이것을 뭐라고요? ‘칭의’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성경이 말하는 칭의를 종합 정리해서 설명드린 것입니다.
◑본론/ 칭의 받은 사람의 증거 3가지
이때 우리의 질문이 이것입니다.
‘진짜 내가 칭의를 얻었나?’
‘정말 내가 칭의를 얻은 자임을 어떻게 알지?’
이게 궁금해집니다.
성경은, ‘칭의를 얻은 사람은, 이렇게 산다’ 라고 말씀하는데요.
그걸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칭의를 얻었는지/안 얻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1. 칭의를 얻은 사람은, 죄에 대해서 죽고,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내 죄로 인해, 내가 저주를 받고, 내가 죽어야 할 터인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내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이유는,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즉, 의를 추구하며 살도록 본성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삶
이게 칭의의 삶입니다. 칭의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2. 칭의를 얻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절대 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분을 위해서 삽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는
이제 그분 때문에 살게 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을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칭의를 경험한 사람은, 내가 죽어야 되는데, 그 분이 나 대신 죽으셨으니
내가 그 분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그런 각오가 생기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작년에 ‘두 형제 이야기’ 영상 본 것 기억나세요?
형이 있고, 동생이 있었는데
형은, 예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동생은, 안 믿고 방탕하고, 술 취하고, 그렇게 그냥 나쁜 삶을 살다가
그러다가 동생이 어떤 사람을 실수로 죽이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형한테 도망 왔어요.
그리고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고 벌벌 떨면서 고백합니다.
그때 자기 옷을 벗어서 동생에게 입혀주고
동생의 옷을 벗겨서 자기가 입었습니다.
죄인의 옷을 벗겨서 형이 입고, 형 자기의 옷을 동생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이 동생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 죄의 형벌을 뒤집어쓰고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유서를 썼습니다.
‘이제는 내 대신 내 삶을 살아다오.’
그 동생이 그것을 보고, 형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형이라면 이런 짓을 안 했을거야, 형이라면 이렇게 안 했을 거야.
형이라면 이렇게 했을거야.’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이 죄의 옷을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주님의 옷을 입고 주님처럼 살아라, 주님의 삶을 대신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칭의를 경험한 사람의 삶입니다. 증거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한 번 솔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분의 삶을 살고 있는가?
칭의를 받았는지/아닌지..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면 무수히 많은 교인들이, 자기가 칭의를 얻었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만..
자기가 칭의를 얻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얻었다는 겁니다.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증명이 되어야 되는데요..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진짜 누군가 내 대신 죽어주었다면,
내가 그 분의 삶을 대신 사는 게 마땅하지 않나요?
중요하니까,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내가 정말 칭의를 얻었나?’ 어떻게 알 수 있다고요?
지금까지 제가 2가지를 말씀드렸어요.
1. 내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난 삶을 살고 있는가?
2.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을 위해 살고 있는가?
결론은, 여러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추측하기로, 저희 성도님들중에 상당수가 칭의 여부가 불확실한 분들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여러분들이 사시는 모습을 보면 알아요.
진짜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사십니까?
네,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은 하시죠. 그러면 되지만,
그런데 아예 관심이 없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모든 게 자기중심적이죠.
내 가정, 내 사업, 내 자녀, 내 잘 되는 것! 이것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비록 교회를 다니시더라도, 아직 칭의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정말 칭의를 경험한 신자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만 봐도 마음속에서 견딜 수 없는 감동이 올라옵니다.
그 분이 왜 나를 위해서 죽으셨나.
그 분이 왜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 달려 죽으셨나요. 내가 그 분 대신 살아야지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 분을 위해서 살자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왜냐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시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의 입술의 고백에 속으시겠어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고 계신데요
진짜 우리 마음 중심의 동기가 뭔지, 내가 예수를 믿는 동기가 뭔지,
내가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는 동기가 뭔지 알고 계신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님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 내가 주님을 위해 살게요. 라고 하는 결단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겁니다.
(이 내용이 서두에 옥목사님 설교에 나왔죠?)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부터라도
주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나요?
제 대신에 제가 죽어야 될 형벌을 받으셨나요?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되죠?
그렇다면 저도, 제 인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되겠군요.
이런 마음만 가져도, 칭의 받은 사람의 증거이고, 주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3. 내가 정말 칭의를 경험했는지 어떻게 아느냐면,
이게 이 설교의 결론인데요.
칭의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반드시,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거룩한 삶을 추구합니다. 칭의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성화를 추구합니다.
자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칭의와 성화,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과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1)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칭의-
위 구절은 바로 ‘칭의’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계속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화’를 살게 된다는 겁니다.
롬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성화-
너희가 정말 칭의를 얻었으면, 이제는 성화를 이루어라..
이렇게 칭의와 성화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2)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칭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성화)
이 구절에서도 보니까, 칭의와 성화가 맞물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3) 골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칭의)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성화)
이렇게 볼 때, 성경은 칭의와 성화를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4)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칭의)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칭의)과 거룩함(성화)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역시 칭의와 성화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나옵니다.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는데,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우리를 잘못된 구원론으로, 즉 거짓 구원론으로 이끄는 것처럼
칭의와 성화는 뗄 수 없는데
칭의와 성화를 떼서, 잘못된 구원론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박영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무율법주의이다. 방종주의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면서, 멋대로 사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 문제가 왜 일어났느냐
한국교회에 무율법적인 혼란을 초래한 이유는,
값싼 은혜의 복음 때문이다.
그러면 값싼 은혜의 복음이란,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켜서,
구원은 칭의에 의해서만 근거하며,
성화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게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절대로 떼려야 뗄 수 없ㅂ는대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고, 믿음으로만 구원 얻고,
행함은 상급에 관련된 것이다.. 이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박영돈 교수는
칭의와 성화, 믿음과 거룩함은 뗄 수 없는데
이것을 딱 떼서,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한다.
성화는 무관한 것이다.. 성화는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부수적이고, 기껏해야 천국에서 상급과 롼련될 뿐이다.'
이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게 값싼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값싼 은혜의 복음(잘못된 구원론)이
한국교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실정입니다.
박영돈 교수가 최근에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제 벤자민 오 목사가 지난 10년 동안 외쳐온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저의 이런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올바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박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실제적 변화가 없어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 다시 말하면 삶의 변화(성화)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은, 비성경적이다.”
잘 들어보세요.
“만약 칭의가 참되게 일어났다면,
진짜 거듭났다면
지체없이 필연적으로 성화가 뒤따라 오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그와 동시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누구도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을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로마 가톨릭과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칭의가 어느 정도 신자의 실제적인 거룩함, 성화의 근거로 보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격이 흐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겁니다.
가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같이 보긴 했는데,
문제는, 칭의를 성화의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칭의로 보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가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보는데,
차이점이 뭐냐면
성화되는 정도에 의해서, 칭의 여부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거룩해져야,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이런 막막한 현실이, 가톨릭입니다.
개신교는 그렇게 믿지 않죠.
우리 성화 때문에, 우리 칭의가 결정되는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 칭의가 결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칭의가 결정된 다음에는, 성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와 성화를 같이 붙여서 생각하는 것은 맞는데,
가톨릭은, 잘못된 칭의의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틀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정말 선행을 열심히 합니다.
왜냐면 자기 칭의가 거기에 달려 있으니까요.
(차라리 우리도 그렇게 할까 봐요. 혹시 '값싼 은혜'보다는 나을지도..
그러나 개신교의 복음이 정확하죠. 칭의는 믿음/은혜로 받고, 성화는 뒤따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톨릭 신자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선행을 많이 합니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신학을 갖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해야 칭의를 얻게 되니까요.
개신교는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칭의를 얻을 수 없어요. 우리의 칭의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의에 달려있어요.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으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선언이 되는 순간, 우리 안에 거룩함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칼빈은, 이런 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해서 (성화에 의해서 칭의가 결정된다는 오류)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의 위협에 대비해서는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무슨 말이냐면, 가톨릭은 성화에 의해서, 칭의가 결정된다고 잘못 가르치니까
거기에 대해서 칭의가 그런 게 아니라, 칭의를 이런 거고, 성화는 이런 것이라고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구원은 칭의만 관계된 것이고,
성화는 상관없다 라는 무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대비해서,
칭의와 성화는 뗄래야 뗄 수 없다고.. 칼빈은 강조했답니다.
이게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구원론의 오류가 다 발생합니다.
(이 내용의 미묘한 차이를 오해하는 가운데서)
여기서 구원파가 나오고, 여기서 온갖 종류의 이단적 가르침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칭의와 성화는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처럼, 성화와 칭의가 결합된, 즉 성화에 의해서 칭의가 결정되는
그 결합은 잘못된 것이고,
우리가 믿는 성경적인 가르침은, 우리가 정말 칭의가 진짜라면,
성화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칭의와 성화는 같이 가는 겁니다.
칭의의 굳건한 바탕 위에, 성화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죄악 속에서 죄를 지으면서도 삶을 은밀히 합리화하는 구실로 삼는다.
바르게 살지 못해도, 믿기만 하면 구원 받으니까.
죄를 지어도 또 용서 받는다는 안일한 생각 속에
죄를 가볍게 여기고, 신앙의 방종과 나태에 빠진다.
그리하여 본 훼퍼가 개탄하듯이
죄인을 의롭게 하는 교리(칭의)가, 죄를 정당화시켜주는 교리로 곡해되어 버렸다.”
한국교회의 무율법주의가 뭡니까?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주는 칭의 교리를,
죄를 정당화하는 교리로 왜곡시켜버렸습니다.
그러면 안 되죠!
“이렇게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변질된 교리는,
옛사람을 부인하고, 성령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을 제공한다.”
그러니까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어 버리면
이렇게 아주 좋은 구실/변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면, 성화를 반드시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죄를 끊어버리지 않아도,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거짓 안위를 안겨준다.
가장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 천국갈 수 있는 신앙의 최저기준치를 설정해 놓고,
‘여기(칭의)까지만 가지면 천국간다’며, 거기에 신자들을 안주하게 한다.
결국 믿음은, 회개와 순종의 대용물이 되어버렸다. (회개와 순종이 빠져버렸다)
즉 믿음은, 의미가 텅 비어버린 껍데기로 전락해 버렸다.”
▶정리하면,
진짜 칭의라면,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면
내게는 3가지가 증거로 나타납니다.
1.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삽니다.
2.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나를 대신 죽으신 그 분을 위해서 삽니다.
3. 내 안에 거룩함의 추구가 일어나며, 점점 성화의 삶을 추구합니다.
우리 안에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이 있나요?
거룩함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열정이 있나요?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내 육신의 정욕과 싸우고, 내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그는 정말 칭의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함에 대해 관심이 없고, 죄를 지어도 합리화 시킵니다.
‘회개하면 되지, 용서 받으면 되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구원은 칭의로 얻는 건데, 이 사람은 자기가 확신하는 그 칭의가 가짜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오류에 빠진 현 시대의 구원론
▶그런데 한국교회 대다수가, 이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불행한 현실이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자란 장로교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장로교가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한다는 겁니다. 성화는 무관한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렇게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 안주하도록 합니다.
거짓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그런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외치는지 이해 되셨죠?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교리를 믿되, 성경보다 앞세우지는 마세요.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론은 이겁니다. 여러분, 로마서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그 로마서의 비결을 깨닫고, 믿음으로 취해서 그렇게 살면,
우리 안에 위 3가지가 그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다 세례를 받았죠? 그 세례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 죽었습니다. 영적으로.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우리가 물속에 잠겼을 때, 장사 되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물 위로 나올 때, 우리는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옛 생명이 아니라, 새 생명new life입니다.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런 다음에, 11절입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겨라'
무슨 말이냐면
진짜 우리가 칭의를 경험했다면, 정말 예수님의 죽으심과 내가 동일시해서 세례를 받았고,
그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과 동일시함으로 내가 새생명을 얻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간주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목사님, 아직 내 안에 죄성이 살아있는데요?’
네 맞습니다. 여전히 우리 육신/죄성은 살아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건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 역사할 것을 믿으십시오.
칭의가 진짜라면, 이 말씀이 진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진짜로 간주하라고(여기라) 하십니다.
그렇게 간주하고/여기고 살면서.. 점점 성화의 과정을 성숙되게 이루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는, 이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라/그렇게 간주하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내가 정말 새 생명으로 태어나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처럼 여기고,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차츰 더 성숙된 성화의 과정을 거치겠지만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나 OOO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었습니다.
나 OOO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는 이제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가 될 때까지, 믿고, 고백하고, 기도하고, 선포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예스’하며 반응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마귀는 ‘OOO야, 웃기지 마라. 죄에 대해서 죽기는커녕, 펄펄 살아있네!’
이렇게 우리를 속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는 아직도 죄에 대해서 땡기고, 연약하고, 넘어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이 내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면,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이렇게 싸워야 합니다.
‘맞어, 나는 안 돼! 나는 죽일 놈이야’ 이렇게 자포자기 하지 마시고요.
우리가 안 되는 그 일을, 우리 대신,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칭의/성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 넘어질 때마다, 절대로 좌절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서, 이 말씀을 붙으십시오.
‘나 아무개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롬6;11절에 써 있다.
이제 나는 새 생명으로 산 자다. 나는 이제 그분을 위해 살 것이다. 롬5:11절에 써 있다.’
이번 한 주 동안에도, 롬6;11절을 외워 버리세요.
그리고 입술로 계속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점심시간에도, 인간 본능은 서로 먼저 먹으려고 할 때도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다.’ 마음속에 다짐하시며, ‘당신 먼저!’ 이렇게 양보하는 겁니다.
차를 타고 갈 때도, 어떤 차가 끼어들 때, 그래서 독한 말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다’를 대신 선포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능력으로 역사함을 믿으십시오.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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