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여인들의 저항 출1:8-22 2015.3.29.출처
◑고난의 땅
애굽은 이스라엘이 작은 가족에서 민족으로 번성하는 요람이 되었던 곳입니다.
번성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번성하자 핍박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크니까 당하는 것이라고. 작으면 누가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반대나 박해를 받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잊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이스라엘을 향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고난은 그곳이 더 이상 요람이 아니라, 속박의 땅이 되었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싸인입니다.
성장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급격히 몸이 자라면서 이곳저곳의 관절들이 아픕니다.
고난은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임한 핍박 덕분에,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새로운 땅,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곳으로 부르시는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버질, 라틴명으로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고대 로마라는 나라를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대서사시입니다.
이 책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합니다.
“무기들과 한 전사를 나는 노래하노라.
그는 운명에 의해 트로이야의 해변에서 망명하여
처음으로 이탈리아와 라비니움의 해안에 닿았으나”
로마의 건국은, 트로이 전쟁의 패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의 장군입니다.
헬라 연합군에 의해서 패망하여, 그 부하들과 함께 트로이를 떠났습니다.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고생하다, 이탈리아의 로마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로마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이런 향수를 가지고 있기에
시저나 로마의 황제들은 고대 트로이로 수도를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오늘의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고난과 쫓겨남이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그들은 신화로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한 패배와 고난과 방랑이 살아 있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로마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미국도 쫓겨난 자들의 땅입니다.
유럽에서 종교적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미국인들이 가장 동일시 했던 것이, 바로 이 출애굽의 모델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가며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을 광야로 심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명 공동체로 인식했습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을 이끌었고 매사추세츠 주 총독을 12번이나 역임했던
존 윈스롭의 설교 중 일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건설하는 국가의 최종 목적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행복을 안겨주고
더 많은 봉사를 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덕 위의 도시’와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받았던 고난을, 새로운 땅을 향한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고난은 위기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고난은 우리로 좌절하게 하거나 타협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이 고난이 우리를 빛나게 하는 연단이 되어
그것을 계기로 우리를 우뚝 서게 만들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 위기가 있었습니다.
애굽에 안착하여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거칠지만
약속의 땅에서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것인가?
모세와 이스라엘은 후자를 선택했고
그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 넘어 온 시기는 요셉 때였습니다.
그때는 시기적으로 힉소스 족이 애굽을 침범했던 때입니다.
애굽의 본토민들이 쫓겨나고, 이민족인 힉소스 족이 통치하면서 애굽 15왕조를 열었습니다.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른 것은 그의 탁월한 역량도 있었지만
이민족 우대 정책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를 계기로 야곱의 가족이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안전한 보호를 받으며 민족 단위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본토민들이 다시 이민족들을 몰아내고는 18왕조를 세웠습니다.
19왕조의 람세스 2세는 고센 지역으로 확장 정책을 펴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학대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것이 8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라는 말씀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기 위해서 첫 번째 내세웠던 정책은 고된 노동과 부역이었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1
몸을 괴롭게 하여 출산율을 낮추는 정책입니다. 그 노동의 강도는 매우 심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3,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14
▲치졸하지만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결혼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시대의 유행이나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에 그렇습니까?
신체적으로 볼 때 결혼 적령기는 10대 중후반입니다.
마리아도 요셉과 약혼 했을 때 15세 전후 빠르게는 13,4세로 보기도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성춘향과 이몽룡도 연애를 했던 시기는 16세 이팔청춘 전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소년들은 이 나이에 공부나 스펙 쌓기나 알바나 취업준비로 바쁩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는 이를 ‘슬픈 경제학’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돌려야 취직이라는 포화된 시장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깁니다.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기성세대가 분담해야 할 경제적 고통을
상대적으로 약자인 젊은 세대에게 강요하기에, 결혼이 늦어집니다.
서구나 다른 나라보다 우리 사회가 더 심합니다.
이제는 20대에 결혼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입니다.
▲애굽과 바로는 고강도 노동을 통해 출산율 저하 정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하자’ :10 며 매우 현명한 결정을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12절입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20절입니다.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약자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입니다.
미국 사회에 흑인들의 권리가 강해진 것은, 그들의 출산율이 백인들보다 앞서
선거인수가 무시 못 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히스패닉 계가 신장 추세여서 미국의 이민정책을 바꾸고 있습니다.
약자는 힘이 약한 대신 수로 맞섭니다. 국민의 뜻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된 노동에 의한 통제 방식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출산율을 강제로 낮추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인들이 아이를 낳을 때 딸은 살려두지만 아들이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 히브리인들이라는 단어가 언급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원래는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용어입니다.
히브리란 단어는 합비루에서 나왔는데 그 단어는 ‘먼지’라는 뜻입니다.
당시 중근동을 떠돌던 먼지와 하찮은 존재가 이 합비루들이었습니다.
유럽의 집시와 같은 세력이 합비루입니다.
수는 어느 정도 되지만 힘이 없는 유랑민들은 항상 경계와 학대의 대상이 됩니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이후에 벌였던 정책도 이와 같습니다.
티벳인들을 강제 낙태와 불임수술을 시켜 인구를 축소시키려 하였습니다.
지구상에 소수 민족이나 유랑민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야만적 행동은 생명을 번성케 하는 하나님의 뜻과 위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번성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창1:28
노아 홍수 후에도 하나님은 동일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9:1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하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수가 곧 200만 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농촌에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다문화 가정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유럽처럼,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를 근거로 한 반발이 우려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함께 번성하는 길을 찾아야합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만 출애굽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12:37-38
히브리인이라 불리는 가난하고 중다한 잡족이 모여, 하나의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약자들의 하나님, 유랑민들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서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는 약자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겸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의 가난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이스라엘에 처음 계시되었던 하나님이 바로
히브리인의 하나님,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각인(刻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류동물이 처음 본 대상을 어머니로 생각하고 따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각인된 하나님은, 바로 노예와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신 해방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
바로는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기 위한 조치를 히브리 산파들에게 내렸습니다. 왕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왕의 명령을 거부했던 두 여인이 있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부아는 ‘찬란함’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들은 권력자의 편에 서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섬으로써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애굽은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이라 불립니다.
짜라르 곧 ‘억압, 괴로움, 환란’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은 풍요로운 땅이 아니라 억압의 땅이고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노예로 살아야 했던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억압을 만들어냈던 바로는 대제국의 왕이지만, 자기 이름도 없이 그저 바로(왕)라 불립니다.
그렇지만 십브라와 부아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일개 산파에 불과했습니다.
산파들의 지도자였을까요? 아니면 한 명의 산파에 불과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면
이들 두 명의 산파로는 그들의 출산을 다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은 권력자 앞에 선 힘없는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자들이 대제국 바로와 맞장을 뜨고 있습니다.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태어난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생명을 낳는 산파가 될 것이냐 생명을 죽이는 산파가 될 것이냐에서
그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잦으니까 바로의 귀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바로가 묻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러자 산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19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히브리 여인들이 강해서 아이를 잘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아기들을 살리려는 두 산파의 갸륵한 마음을 보시고,
산파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조치하셨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끄럽거나 곤란한 처지에 처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다른 한편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용납이 됩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도덕적 원칙보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이 더 높고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약자들의 거짓말에 대해서 강자의 거짓말과 같이 동일하게 취급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자들의 거짓말은 살고자 하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장발장이 주인공인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는 거짓말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습니다.
1) 장발장은 친절을 베푼 신부의 은혜를 기만하고 은수저를 훔쳐 달아납니다.
그러나 미리엘 신부는 붙잡혀온 장발장을 살리기 위해 은수저는 자기가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2)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 존경받는 시장으로 일하고 있던 장발장을 대신 해서
다른 사람이 장발장이라 오해를 사 재판정에 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완벽하게 신분세탁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를 괴로워한 장발장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정직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3) 장발장이 달아나며 어느 곳에 숨었습니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이 있느냐고 묻자
평생에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쌩쁠리스 수녀는 장발장이 이곳에 없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장면에서 “오 거룩한 처녀여, 그 거짓말이 낙원에서 보상을 받기 바라노라”고 덧붙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찬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행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도덕성에 대해서 근시안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종합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두 여인의 투쟁은 오늘에도 계승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구조와 권력 앞에 우리는 일개 산파처럼 무능력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여 손 놓고 있거나 악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항해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약탈적 시스템이 우리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며 생명을 위협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기업인으로서 사람을 이윤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살리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저는 이 두 산파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먹을 것으로 온갖 장난을 치는 세상이고 그걸헤 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업만은 생명을 살리는 그런 기업이 되겠다며 어떤 손해도 감수한다면
그는 이 두 산파처럼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저항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출1:21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할 결과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1993)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이 영화는 더 유명해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쉰들러는 폴란드에서 그릇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이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인정을 받아서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쉰들러는 한 사람의 유태인이라도 더 고용하기 위해
자기 돈과 물건을 팔아 독일군에게 뇌물로 줍니다.
이런 덕분에 이 공장에서 일했던 1,100명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지막 장면에서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돌려보내며 한탄을 합니다.
그는 울면서 자기의 승용차를 팔았더라면 유대인 10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자기의 시계와 결혼반지를 팔았더라면 유태인 2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쉰들러는 두 산파와 같이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지혜롭고도 용기 있는 여인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바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시대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위대한 이름을 얻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번성케 하는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이 생명의 역사에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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