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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짖음

LNCK 2015. 6. 16. 09:43

◈부르짖음                       2:23-3:10                             2015.04.19.스크랩, 출처

 

◑부르짖음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부르짖음으로부터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음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2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37절입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9절입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짧은 구절에서 도대체 몇 번이나 부르짖었다, 들었다, 보았다는 단어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움직인 것은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야다)  2:25

이 구절에 하나님이 '기억하셨더라'는, 히브리어로 야다’(알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24절의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는 '기억하셨다 remember'입니다.

 

7절에서는 그 근심을 알고라고 역시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알다'라는 단어가 그냥 그런 사정을 알았다 정도입니까? 아닙니다.

느꼈다는 것입니다.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억울함, 그들의 한이

그대로 전달되어 하나님의 마음속에 공명을 일으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한가롭게 왕국에 거하면서 민원이나 들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시는 아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동생을 죽인 살인자 가인 앞에 나타난 이유도

죽어가면서 부르짖은 가인의 핏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이유 또한

그 부르짖음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18:20-21).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22:22-23)

 

과부나 고아의 부르짖음은 무섭습니다. 세계사를 흔드는 것은 이 부르짖음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음을 외면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부르짖음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304명의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어미와 어비, 가족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자식을 잃은 것도 가슴 아파 못살겠는데, 그 죽음의 진실도 밝힐 수 없어 원통하다는 부르짖음입니다.

 

지겹다고요? 그만 잊자고요? 무심한 사람들입니다.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거기가 먼 사람들입니다.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외면하면 사회가 위태롭게 됩니다.

무심하고 무책임한 사회를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충분히 될 때까지, 심판은 쉬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적 원리로 보면, 그렇습니다.

    문민정부 초기에도, 나라에 연쇄적인 재앙이 임했을 때, 과거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다.

 

 

중략

 

어떤 악한 자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조롱하고 이념 논쟁으로 몰아갑니다.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외면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악인들입니다.

 

하나님은 힘없고 약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는 분입니다.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이 부르짖음의 소리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부르짖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시작되었지만, 실제 역사를 계획하고 만들어가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탄식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정적인 말씀 속에 관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행동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하나님이 만나는 장면에는 동사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내가 ...보았고 ...들었고 ...알았고 ...내려가서 ...건져내고 ...인도하고” 6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성은 히브리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이지만 히브리어에는 상태나 존재를 나타내는 be 동사가 없습니다.

 

하야라는 히브리어가 있는데 이는 있게 하다, 만들다식의 생성과 창조의 동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라는 식으로 헬라 철학 냄새를 풍기며

관념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묵상이나 관조 속에서는 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건이나 역사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갑자기 찾아오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뚱딴지같은 명령에 고민하며 순종하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에서 어떤 존재하고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브니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생생한 역사와 인생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역사 변화나 충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모세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세의 각성이나 결단이나 상황이 그렇게 몰아간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그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미디안의 침입 앞에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큰 용사여하며

기드온을 민족의 사사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인간보다 먼저 앞서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은 성서에 무수히 많습니다.

성서는 일관되게 역사 변화의 출발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분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시키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모세의 인생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모세는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 근처에서 양 떼를 몰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지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시덤불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스네'라고 하는데, 시내 산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이라 봅니다.

 

이곳은 햇빛이 매우 뜨겁게 비추는 곳이기에 가끔 자연발화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무 불꽃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었습니다.

 

이 떨기나무가 상징하는 바가 많습니다. 떨기나무는 모세의 젊은 시절을 보여줍니다.

애굽의 왕자로 자랐지만 일순간의 열정으로 그만 다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무력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애굽의 거대한 무력 앞에 신음소리만 내고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에 쉬 사라지고 맙니다.

 

떨기나무는 가난한 민족들을 상징합니다. 수는 많은데 무력합니다.

가시는 돋아 있는데 싸우기에는 모자랍니다. 떨기나무는 모든 약한 자들과 소수민족을 상징합니다.

불꽃을 피우지만 그것은 자신만을 태우고 재만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불이 붙자, 이 떨기나무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이 모세 위에 임하자, 모세가 과거와 나이와 연약함을 잊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민족의 지도자로 섭니다.

 

연약한 이스라엘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고한 애굽의 압제를 뚫고 해방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불꽃이 임하자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도 성령의 불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 위에도 이 성령의 불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소망과 비전을 잃고 모두가 개인주의, 물질주의로 움츠러들었습니다.

이 침묵을 깨는 성령의 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 위에 통일의 바람, 평화의 바람, 생명의 바람을 불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인간적 열정은 곧 사그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는 성령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파스칼이 하나님을 체험하던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었다.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파스칼은 불이란 글자를 크게 써놓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불입니다.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는 불이요 우리를 충동하는 불입니다.

 

모세의 인생을 바꾸었던 것은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내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부르심입니다. 우리 각자가, 모세처럼 분명한 만남을 갖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깨달음으로 올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들 가운데서 문득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연한 일이 자신에게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을 우리 일생 가운데 한 번은 이런 강렬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우리를 확고하게 만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것은 메마르고 더럽고 먼지가 날리는 황무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3: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원도 아니었습니다.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가던 곳이었고, 자신의 땀 냄새가 묻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뽕나무를 재배하던 농부요 목자였는데

어느 날 양떼를 몰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방의 포로 된 땅 그발 강가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을 수행하러 가던 다메섹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농부가 보화를 발견했던 곳은 고되게 노동하던 경작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부르짖음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주도적으로 당신의 역사를 써내려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