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관점으로 여호수아서는 前선지서
▶여호수아서는 구약 성경의 여섯 번째 책입니다.
하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이 책이 제5번째 책 신명기 의 후속편 같습니다.
모세 오경의 첫 5권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신명기의 마지막은 모세의 죽음으로 끝나는데,
여호수아는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리더십을 펼치는데요.
그럼 이렇게 비슷하게 보이는 책이 신명기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유대 회당에서 매년마다 오경을 한차례씩 낭독하는데,
왜 여호수아는 읽지 않고, 신명기는 읽을까요?
우리가 보면, 여호수아서에 별다른 점이 없고, 신명기의 연속적인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는 아주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 율법’의 일부분이지만, 여호수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격이 아주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세히 비교해보면,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율법으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에는 어떠한 율법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뒤에 다른 책 모두에도 율법이 명시되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서부터 우리는 ‘율법 나라’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과 같습니다.
다른 말로, 신명기로 그 나라의 기초(율법) 공사를 끝낸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서 부터, 이 율법의 시행 단계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5권은 이스라엘의 기본 헌법이며, 그것이 그들의 기초입니다.
나머지 구약성경 모두는, 그 헌법이 어떻게 실제로 시행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호수아서를 보시면,
이 책은 처음으로 율법이 기록되지 않은 책이며,
그래서 처음 5권과는 달리, 여기(여호수아서)부터 아주 큰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도표로 설명하겠습니다.
모세 오경 이후의 6권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우리가 소위 말하는 ‘역사서’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하겠지만,
유대인들은 사실 이 몇 개의 책을 ‘역사서’이라고 하지 않고, 이것을 ‘선지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역사서’라 하고, 사건의 이야기를 계속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첫 5권을 읽고, 다음에 이 6권(수~왕하)을 읽으면, *룻기는 사사기에 포함
두 그룹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첫5권은 율법이고, 유대교의 기초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항상 ‘토라’(율법서)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유대인 랍비라면 모두 이 5권을 읽고 연구하고, 매년 한 번씩 읽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식 구약의 구분에 의하면, 그 다음 6권을 ‘전 선지서’라고 불러요. *former prophets
우리는 이것이 ‘선지서’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역사서로 여기지요.
다음 단원에서부터, 이것을 왜 ‘선지서’라고 부르는지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율법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반면에 ‘전 선지서’는 이 약속들의 성취를 보여주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실천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서’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였고,
‘전 선지서’에는, 하나님이 과연 이렇게 하셨습니다..를 말씀합니다.
‘첫 5권’에는, 구원에 대한 은혜와 감사가 나타나며, 그건 아주 명확하지요.
‘다음 6권’에는, 구원 후 인도에 대한 감사가 나타나지만, 넘치는 감사는 아니고, 어쨌거나 많습니다.
‘첫 5권’에는, 구속을 (칭의?)
‘다음 6권’에는, 의로운 삶을 설명합니다. (성화?)
‘첫 5권’에는, 모세의 율법 제정.
‘다음 6권’에는, 모세 율법이 그들의 삶에 적용된 내용이 나오며,
실제로 그 율법을 어떻게 살아내었는지가 나오지요. *크게 성공적이진 못했지만요
‘첫 5권’에는,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약속을 받았지요.
‘여호수아서’에는, 순종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순종해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지요.
하나님이 지시하신 내용이 기괴하고, 현실에 맞지 않고, 쓸모없어 보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땅을 차지한 것은, 그들이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6권의 책에, 어떤 상반되는 예가 있는데,
그들이 거역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어요.
불행하게도, 여호수아서가 우리에게 그들이 어떻게 그 땅을 얻게 되었다고 알려주지만,
열왕기하는 그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그 땅을 잃어버렸다고 알려 줍니다.
그들이 약속에 순종하니 복을 받고, 그들이 약속에 거역하니 저주를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6권의 책이 처음 5권의 약속들이 어떻게 실현되는 가를 알려 주는데,
처음에 그들은 복을 받았다가, 나중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6권은 ‘선지서’이지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까지는 슬픈 이야기이며,
그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후에 그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선지서’이지요.
여호수아는 주로 순종을 이야기 하지만, 불순종의 씨앗도 그 가운데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순종해서 여리고 성은 점령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아이 성은 점령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잃어버릴 씨앗 잠재성 을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즉시 나타나진 않았고 많은 세월이 지나서, 결국은 완전히 그 땅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율법서’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운 것이 나오지만,
‘전 선지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율법을 준수했는지 그 여부가 나옵니다.
그래서 첫 5권은 원인이고,
다음의 6권은 결과입니다.
이 6권에 나타난 모든 일의 원인이, 첫 5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구약성경의 또 다른 국면(장르)에 들어 간 것이지요.
아쉽게도 영어성경에는, 우리가 이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없어요.
뭐 성경에 뚜렷한 제목 장르 구분도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저 비슷한 책(여호수아서)이 또 한 권 이어지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여러분은 이 책에서부터, 5권과 예리한 대조가 있으며, 아주 다른 장르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호수아서는 역사적으로 사실일까? 물론입니다.
▶이 역사서(여호수아서)에서 가장 큰 질문은, ‘이 모든 일이 정말 일어났는가?’입니다.
현대 신학계에 일어나고 있는 아주 위험한 하나의 추세를 언급하면,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 역사성이나 과학적 진리 측면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역사학, 과학으로는 정확하지 않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단지 도덕적 진리, 종교적 가치를 논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많은 진리가 들어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어떤 종류의 진리인가요?
그래서 성경은, 도덕과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지,
역사와 과학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꼭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이러한 주장은, 아주 그 기반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하나의 신화나, 전설로, 영웅의 이야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의 역사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도덕적/종교적 진리만 가르쳐주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의 역사성, 과학적 진리에 대해, 잡다한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봅니다.
▶물론 성경에 어떤 부분은, 정말로 역사성이 없는, 그런 부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같은 것은, 대체로 만든 이야기이지요.
그때 실제로 그런 탕자가 살고 있었는지는, 역사성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비유에서 중점은, 그 이야기로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이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비유에는, 진짜로 역사성이 없었던 일들이 있었어요.
다만 어떠한 진리를 가르치고 싶어서, 예수님이 만든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성경 전체에서 역사성은 중요치 않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만약 당신이, 여리고 성 같은 성경의 이야기에 도덕적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이 정말로 역사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신화이며,
거짓이 아니고 진리이긴 하지만, 그저 종교적 교훈을 담고 있는 ‘신화’로만 믿는다면,
이런 생각이 점점 발전되어 나갈 것이며,
이로써 당신은, 성경 이야기 전부를 ‘비유’로 믿게 될 것이며,
그저 사람에게 도덕적/종교적 진리를 전달해 주기 위한 전설적 이야기로, 성경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이솝 우화’ 정도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속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성의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어떤 진리를 전달해 줄 뿐이지요.
이솝이야기를 읽어보세요. 그 교훈이 있습니다.
▶이런 발칙한 생각은, 19세기에,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 아니고, 단 하나의 신화라는 주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전설 같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역사성이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요, 역사성을 아예 부정하는 게 아니라.
창세기 3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인간은 하지 말라고 금하면 금할수록, 더욱 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지금 그런 사상을 홍보하는 것은 아니고요,
잘못된 신학에 대해, 여러분께 설명을 드리는 중입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를, 우화나 비유로 보고,
아담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어떤 사람이며,
그런 아담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에만 있은 게 아니라요.
다만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어떤 진리/교훈만 캐내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진리/교훈을 캐내기 위해서는, 성경 이야기를 “비신화화”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신화 이야기’ 부분은 제거하고, ‘진리/교훈’ 부분만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런 생각은, 아주 빠르게 아담에서 성경의 다른 인물로 옮겨갔습니다.
다음으로 노아인데, 노아 시대의 홍수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니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도덕적/종교적 진리를 전달하고 싶은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성경은 더 이상 역사책이 아니고, 다만 ‘가치관/교훈’을 논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이것(가치관/교훈)이 오늘날 현대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도덕과 종교적 교훈을 담고 있으며, 역사와 과학적으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이 아담 노아에 이어 이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까지 번졌습니다.
그리고 요나도, 신화로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열왕기서의 족보에, 요나가 실제로 존재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왕하14:25
이런 잘못된 신학이 현재 신약성경에 까지 침투되었어요.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정녀가 정말 아기를 낳았는지/아닌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역사성은 중요하지 않고,
그 이야기에 담긴 어떤 진리/교훈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이 신학은, 마침내 ‘예수님 부활 사건’에까지 적용되었지요.
심지어 어떤 주교들은 ‘설령 예수님의 뼈가, 지금 중동의 어느 지역에서,
누워서 썩고 있다 하더라도, 그게 예수님의 부활의 이야기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역사성을 꼭 따지지 않더라도 성경의 예수님의 이야기 속의 교훈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석가나 마호멧처럼요.
▶이러한 비신화화 신학 이론이 특히 여호수아서와 여리고 성 이야기에 적용됩니다.
이런 신학이 개발된 이유는, 사실은 ‘과학시대의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기적도 빼버리고, 실제 사건으로 믿지 않으니까, 성경을 부담 없이 받아들이게 되지요.
이 비신화화 신학 이론이 등장하게 된 배후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학은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여호수아서에는 현대 과학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가득 기록되어 있어요.
여리고 성벽 무너진 사건이 제일 큰 문제가 아니고요,
제일 큰 문제는 해와 달이 하루 종일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해와 달이 멈춘 것이 아니고, 지구가 멈추었다면,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로 볼 때
그럼 지구가 덜컥 자전을 멈춘 그 시각에, 왜 사람이 우주에 던져지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신화라 여기며,
여기에 포함된 교훈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승리케 하신다는 것이지,
이것은 진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비신화화 신학에 대해 아주 충분히 설명 드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생각이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여호수아를 읽을 때,
강물이 마르고, 성벽이 무너지고, 해와 달이 멈추는 것을 보지만,
이 과학시대에, 당신은 이 일들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만약 이 사건 모두가 꾸며 낸 것이고, 모두가 전설이라고 가정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이 신화를 삭제해야 하겠지요. ‘비신화화’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에 무엇이 더 남겠습니까? *성경이 아주 얇아 지겠지요.
만약 성경에서 기적을 모두를 삭제해 버리면, 남는 것은 다만 인류의 역사뿐입니다.
그렇다면 티베트의 고대사를 읽는 것처럼 됩니다. 거기서도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만약 당신이, 성경에서 기적 부분을,
황당한 내용이라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삭제해 버리면,
그것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삭제한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남는 부분은, 다만 ‘인간의 역할’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삭제하면, 여호수아서의 3천년 전의 인간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제가 보기에도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제가 여호수아서 대신에 동시대 중국 당나라 역사를 강의하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배제하면 성경이 우리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요.
왜냐하면 기적은, 성경 역사에서 제일 기초 부분이고,
만약 기적(기초)을 삭제하면, 남는 부분은 아무런 읽을 가치가 없습니다.
조금 후에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고요,
▶여호수아서를 보겠는데, 여호수아서는 실제 인물과 실제 장소입니다. *역사적입니다.
요단강이라는 곳도 확실히 있어요. 당신이 친히 가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전에 제가 거기서 세례를 베풀었던 적도 있습니다.
여리고 성도 정말로 있어요. 전에 제가 그 성의 폐허 잔해 위에 서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도 정말로 있어요. 지금도 거기 가서, 그 곳 거리에 다닐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도 정말로 존재했고요, 고고학도 이것을 증명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실제로 존재했고, 지금도 그들의 후손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수아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친히 목격한 사람들이 기록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복수의 처음 목격자들이 여호수아서를 기록하였는데,
“우리가 여리고 성을 돌았다” 라고 했지요. *수24:17, 22
여호수아서는, 우리가 거기에 있었고, 우리가 거기서 일어난 일을 보았고,
우리가 바로 직접 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수24:17, 22
그렇다면 20세기의 신학자들이 아는 바 여호수아서의 행적이
당시 거기에 있으면서 목격했던 사람들보다 더 정확할까요? *No.
그러므로 학자들의 비신화화 입장은 이상한 편견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이 책은 당시 발생한 일들을 기록했고,
이 책에서 자주 나타나는 말 한마디가 있는데, ‘오늘까지 있더라’라는 말입니다. 4:9, 4:43, 6:24, 7:26, 10:27등
그래서 사람들은, 이 책의 기록을, 가서 역사성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신화라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여호수아서의 내용을 신화로 보고 내버리는 것은, 참으로 교만이지요.
▶무엇보다도 고고학계에서, 여호수아서의 내용이 진짜이고 확실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고고학이 여리고에서 발굴해 낸 증거를 논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성도 점령했는데,
하솔, 라기스, 그리고 또 다른 몇 개의 도시이지요.
고고학자들이 이 몇 개의 도시에서 많은 발굴 작업을 진행했고,
그들이 그중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이 도시들의 문화가 짧은 50년 사이에 급격히 변화되었는데,
아주 단순한 생활 방식으로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도시들은 아주 복잡했고, 모두가 자신만의 문화를 가진 잘 꾸며진 부유한 도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50년 만에 철저히 파괴되었고, 그 위에 새 도시가 세워졌는데
매우 다른 문화라는 점을, 고고학이 밝혀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고고학의 위대한 발굴이며,
그리고 그 변화의 발생 시기가, 여호수아서의 설명과 일치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50년 사이에 이 도시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고고학이 성경의 기적이 실제로 있었음은 증명하지 못하지요.
기적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그 옛날에 그것을 목격하지는 못했으니까요.
다만 기적의 결과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이 무너진 성벽은 찾아냈지만, 그 성벽을 누가 무너뜨렸는지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는데, 하나는 우연입니다.
성벽이 마침 바로 그때 고함쳤을 때 우연의 일치로 무너졌다는 주장이 있고요.
또 다른 하나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당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은, 아주 시시한 일에 불과하지요.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또한 여호수아서에 출애굽 때와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면, 요단강에 홍수가 날 때면, 정기적으로 요단강 바닥이 마르는 현상입니다.
홍수에 반대로 강바닥이 마른다니요? 이건 모순이지만, 제가 이유를 설명해 드릴 게요.
요단강은 굽이굽이 굴곡을 만들며 흐르는 사행천입니다. *蛇行川, 뱀이 가는 모양의 강
홍수 때, 강이 굽어지는 지점에서 강둑을 물길이 둑 아래를 잠식해서 무너트리는데,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때 그 무너진 강둑 제방은, 댐처럼 되어서, 강물을 잠시 막아줍니다.
그러면 강물이 댐 같은 장애물 꼭대기까지 차고 올라서
물이 다시 흐르기까지, 4-5시간씩 물이 흐르지 않고,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한번 일어나면, 누적되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큰 건축물들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영국에 많은 교회당의 첨탑이나 탑들이 이런 식으로 무너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무너졌는데요. *아마 하층부의 조금씩 서서히 잠식으로 하루아침에 붕괴
성당 붕괴가 하늘의 심판이라도, 매일 잠식된 원인도 있었음.
저는 요단강 마름이 기적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적 사건이, (자연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적인 것은, 보십시오. 하나님이 건너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정확한 시간에
그 뚝이 무너지고 물이 마르는 일이 일어난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바로 그들이 기적이 가장 필요한 시간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자연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셨는가/아닌가?’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기적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에서 초자연의 사건을 삭제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삭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성경을 사람들의 한 일만 기록한 책으로 격하시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성경은, 세상의 역사책과 다른 점이 전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고대 역사가,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책은 아닙니다.
여호수아서가 40년의 역사를 포함했지만, 그 기간의 많은 일들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 함락’은 3장에 걸쳐 길게 기록되었는데,
만약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라면, 이렇게 3장이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못하지요.
성경은 사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했어요.
성경은 ‘이스라엘’이 행한 일을 기록한 역사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삭제하면, 성경의 대부분을 삭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어떤 사건은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또 어떤 사건은 기록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는, 많은 주의를 기울였고, *길게 기록했고
성경에, 하나님이 행하지 않으신 일에는, 아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원칙에 근거하여, 무엇을 기록할지를 선택했는데,
세상의 역사책도, 역사학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만 선택하여 기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면, 역사책 분량이 몇 백 배 이상으로 늘어나지요.
그래서 성경 역사학자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중점이었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뿐 아니라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언약관계의 역사를 기록했고,
둘 사이가 어떻게 서로 친근한지의 역사를 기록했고,
둘 사이가 어떻게 서로 멀어져갔는지의 역사를 기록했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순종/불순종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으며, 그분이야말로 이 전체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려고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을 결코 얻을 수 없었어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적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은 원래 탈출한 노예 무리였고, 군사 훈련 같은 것은 아예 받지 못했는데,
방어가 아주 튼튼한 땅에 들어가서 점령했습니다.
가나안이 문화도 훨씬 더 발달했는데,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점령한 것입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이 초자연적인 부분을 삭제하면, 하나님을 삭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역사’도,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가 아닙니다.
너무나 많고 많은 사건들을 다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혼 언약 관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시내산 에서의 언약은 결혼식과 같고,
이 결혼 약속은 아브라함 시대에 시작되었고, 그때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약혼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시내산에서 머문 시절은 신혼여행 시기였습니다. *약2년 가까이 기간
이 신혼여행 시기가 원래 예정했던 기간보다 길었는데,
이는 신부가 아직 가정을 돌볼 준비가 되지 못하여서
신혼여행 기간이 아주 길게 연장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때부터 허니문이 끝나고 결혼 생활이 시작되며,
지금은 신혼여행을 끝마치고 집(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집을 마련하는데,
이 가족이 거처할 땅은,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사시기로 선택하신 땅입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이 결혼 생활이 잘 굴러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엉망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을 싫어하셔서 *말2:16
그들을 절대로 내보내지 않으셨는데, 이것이 그나마 잘된 점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많은 이혼 할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과 이혼하지 않으셨습니다.
결혼생활이 아름답지 않아서, 이 이야기가 아주 슬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잘못은 아내 쪽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 아내이고, 나는 너의 남편이다’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찾아가서 섬기면, 그분은 ‘네가 음부가 되었고, 심지어 창녀가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에 관련한 용어’로 말씀되어졌습니다.
시내산에서 결혼식을 거행했지만, 결혼식과 결혼생활은 또 다른 것이지요.
*결혼식은 멋지게 올리고, 결혼생활은 불행한 가정이 많잖아요.
신혼여행을 마치고 난 후에 시작되는 결혼생활이야말로
그 진정한 사랑을 테스트하는 시기가 시작됩니다.
결혼생활이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도전의 시작인 것입니다. 화려한 결혼식이 전부가 아니지요.
◑여호수아서의 개요
지금부터 이 책의 윤곽을 살펴봅시다.
저는 항상 전체 윤곽과, 구조와 개요를 살펴보는 것이, 책의 이해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고 느껴요.
일단 전체 구조를 이해하면, 가지와 부분을 전체 그림에 맞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조각 조각 읽습니다.
여러분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일주일에 10줄씩만 읽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럴 수 있습니까? *줄거리를 모르게 되지요.
아마 그의 소설 8장쯤을 읽을 때면, 1장에서 무엇을 말했는지를 이미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로 이렇게 성경을 읽는데, 이런 방법은 가장 엉망인 성경읽기입니다.
성경을 읽는 제일 좋은 방법은, 한권을 단번에 모두 읽는 것입니다.
제가 이 프로를 녹화하는 이유도, 바로 성경을 이렇게 읽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한 구절은, 그 책의 전체 메시지와 연관이 있고,
전 후 문장을 포함한 그 단락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그 단락과 전체 주제와 동떨어진 각 구절의 해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제 강의의 모든 것을 이해하신 것입니다.
*제 강의 시리즈가, 성경의 권별 전체 주제와, 개요를 보여주어, 여러분이 각 구절의 이해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여호수아서의 개요를 봅시다. 샌드위치처럼 세 부분이 있어요.
바깥 두 층은 얇은 빵이고, 중간에 속은 두툼합니다.
제1장, 그리고 23~24장은 샌드위치의 바깥 두 층의 빵에 해당되고요.
거기 ‘빵’ 부분은, 전부 여호수아 개인 인물에 관련해서 얘기했습니다.
서론에서,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내용이 나오고,
결론에서, 그의 마지막 설교, 그리고 그의 죽음과 매장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여호수아의 80~120세 사이의 생애를 커버하는데, 총 40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간이 모세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모세의 80~120세의 생애를 얘기했는데, 총 40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지도한 기간이 똑같고,
차이라면 모세는 지도자이며, 또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서 전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지도자일 뿐이고, 당시 백성들은 율법을 이미 받은 상태였습니다.
▶(햄버거의 속 패티인) 2-22장까지는,
하나님이 약속하여 그들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을, 그들이 어떻게 점령했는지를 묘사했는데,
그 땅에는 본래 다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2~5장은 그들이 어떻게 그 땅에 들어갔고, 어떻게 요단강을 건넜고,
어떻게 약속의 땅에 첫 발을 들여 놓았는지를 묘사하였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그날부터 하늘에서 만나가 멈추었어요.
그들이 처음으로 과일과 곡물을 맛보았어요. 마침내 정상적인 식사를 먹었어요.
아주 재미있지요. 요단강을 건너니 하나님이 다시는 양식을 주지 않고,
너희들이 이젠 스스로 밥을 찾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는데요, 이것이 2~5장의 내용입니다.
6-12장은 그들이 어떻게 그 땅을 점령하였는지를 기록하였어요.
“너희들이 먼저 나누고, 그 다음에 점령하라”
그래서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중간 허리부터 쐐기박듯이 진격하여 들어갔는데,
적의 군대가 두 쪽으로 나눠지게 되었지요. *인천상륙작전처럼
이렇게 나눠진 그들은 전열을 정비해서, 이스라엘을 대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북부를 쓸어버리고, 다음 남부를 쓸어 버렸습니다. 아주 뛰어난 전략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중앙 부분을 정복하였어요.
그리고 남부이고, 다음이 북부이지요. 아까 북부가 먼저라고 거꾸로 얘기했는데 미안합니다.
-남부지방 정복, 10:28~43
-북부지방 정복, 11:1~15
-정복이 완료됨, 11:16~12:24
12장에 여호수아가 모두 서른한 왕을 물리친 이름들이 배열되어 있는데,
이 왕들은 제국의 왕 같아 보이지 않고,
당시에는 어떤 한 부족의 지도자도 왕이라고 하였어요.
성경에는 총 31 성읍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바로 정복한 그 땅을 12지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중간을, 간단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그 땅을 정복하고,
-다음 그 땅을 나눈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전국적인 제비를 뽑았지요. 이것을 조금 후에 다시 해석하겠습니다.
진짜에요. 전국이 함께 뽑기를 했지요.
제비뽑기는 성경적입니다.
오순절 직전에 어떤 잘못이 생겨서, 여러분이 이 잘못이 무엇인지 모두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들도 누가 가룟유다를 대신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제비를 뽑은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들이 제비 뽑을 때 확률로 결정하지 않았는데, 조금 후에 이렇게 한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거국적인 제비를 뽑아서 땅을 나누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샌드위치 같은 윤곽을 이젠 아시겠지요.
▶그의 부르심과 사명수여는, 하나님과 사람, 양편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입니다.
그렇게 사명수여를 받고서, 여호수아는, 그들을 데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하여, 각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설교를 하였는데, 이 설교가 아주 놀라운 한편의 설교였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4:15
이것은 임종 전에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는 사람의 임종전 유언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메시지였고, 그리고 여호수아는 매장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전체 개요를 알았으면, 이제부터 그 세부 사항을 살펴봅시다.
이 책의 구조는 아주 간단해요. 개요도 아주 명확합니다.
현재 영어성경의 장chapter 구분은, 끊어지지 말아야 할 곳이 끊어져있는데,
정말로 제가 성경의 장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성경을 장으로 구분하지 말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제가 굳게 믿기로는, 성경은 장과 절의 구분이 없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성경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장절로 잘라 놓으니) 이제 우리가 한 구절만 따로 떼서 보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한절씩 잘라진 성경구절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 같아서,
우리는 자기 구미에 맞는 구절 하나만, 그 상자 속에서 딱 꺼내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성경이 온통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로 변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무슨 잘못된 주장이든지, 성경을 인용하여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무신론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씀도 나오거든요.
사실 전체 구절의 뜻은 ‘미련한 자는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이지요.
하지만 성경에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확실히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의 전체 주제와 문맥은 안 보고 한 구절만 뽑아내면, 어떠한 잘못된 논리도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 문맥과, 전체 주제를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권의 책을 주셨어요.
한권이 아니라, 아주 많은 66 권의 책을 주셨는데, 책마다 그 특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반드시 전체적으로 읽고 연구해야,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먼저 여호수아가 사명을 부여받는 점을 보겠는데, 당시 그가 80세였습니다.
이 부르심은 두 방향에서 왔는데, 저는 이러한 방식을 좋아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이중적인 부르심이 필요하지요.
이래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계속 유지됩니다. *중도포기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심이 둘 다 필요합니다.
만약 진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걸 인정해 주고, 확증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떠한 일을 하라’고 지시하셨다는데,
하지만 ‘하나님 백성들의 인증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주위 사람이 압력을 가하여서
자기보고 주의 일을 하라고 독려했지만,
자기는, 그 일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사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중적인 부르심을 둘 다 받을 때.. (사역을 시작하십시오)
저는 지금 순회 travelling ministry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라고 사람으로부터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방을 싸고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를 합니다.
이는 제가 당시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고,
저는 이 예언을 가지고 장로님들에게 분변을 구하니
장로님들이 자세히 판단한 후,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이 사역을 할 수 있겠구나’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이중적인 확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백성들의 ‘이중적 부르심’을 확인하십시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르시기를
‘모세가 죽었다..’ 여호수아가 이것을 당연히 알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죽었다. 지금 네가 모세를 계승해야 한다.
내가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데리고 출애굽 했으니,
너는 그들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가라. 이 두 개의 임무가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1:8
이 말씀은 그가 돈이 많은 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형통 prosper’을 오해하고 있어요.
이 단어의 뜻은 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닌데, 소위 ‘번영 신학 prosperity gospel’이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어요.
성경에 나오는 ‘형통 prosperous’의 뜻은, ‘한 번 시작한 일을 완수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멋있는 약속입니다. *히. 찰라크
“주님의 백성들이 형통하기를 빕니다” 할 때,
원래 뜻은 부유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시작한 일을, 완수하기를 원한다’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첫 번째는 사기입니다.
전쟁 때, 전술과 전략이 중요하지만, 전쟁에 승리하게 하는 요인은, 사기가 관건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몽고메리 장군이, 연합군의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그는 승리하고도 동료들의 미움을 받았는데,
그래서 처칠이 말하기를 ‘전쟁터에서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 후에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자(미움 받는 자) 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북 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 전투 때, 자기의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우리는 저 롬멜 나쁜 자식을 반드시 물리칠 수 있고,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며 사기를 독려했지요.
2차대전 때 북아프리카 사막에 주둔했던 제8군단이, 사기를 북돋우는 이 목소리로 인해
다시 일어났어요. 이 전쟁이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사기 고취로 이긴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너의 지도력은 백성들의 사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6, 9
사람들에게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고 말해라.
너의 용기가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점은 ‘도덕성’입니다. *morale and morality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너는 반드시 나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기와 도덕성, morale and morality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이 지도자에게 요구하시는 아주 중요한 요건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여호수아가 사람들에게 ‘모세가 죽었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을 인도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백성들이 어떻게 대답했겠습니까?
백성들이 그에게 ‘당신은 강하고 담대하소서’라고 답하였는데, *1:1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여호수아에게 분부했던 똑같은 말씀이지요. 1:6, 9
이것은 얼마나 힘이 있는 확증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증거입니까.
이것이 백성들 입에서 나왔어요.
여러분이 그들의 대답(1:18↓)을 들으면 아마 비웃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비웃을 분위기는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새 세대입니다.
옛 세대는 모세에게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 새 세대는, 그들은 모세에게 순종하여 이미 모압과 암몬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불순종적인 세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하소서’ 1:18
우리는 겁이 많은 지도자는 싫습니다. 또는 이 전쟁에 대해 의심하는 지도자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당신 여호수아 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18
▶지금부터 이 책의 핵심 부분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 데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난 다음에 땅을 분배했는데,
모두 그 땅, 땅, 땅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로 그 약속의 땅이 여호수아서 전체를 지배합니다.
먼저 요단강이 그들을 막았지요. 당시 홍수가 나는 기간이어서, 물 깊이가 20피트였습니다.
건너는 다리는 하나도 없었어요.
이 시기는, 강의 얕은 곳도 물이 넘치는 계절이요, 홍수가 나는 우기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정탐꾼을 들여보내는 일이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12정탐꾼을 보내지 않고, 두 사람만 보냈어요.
아마도 전에 두 사람만 좋은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두 명만 보냈는지도 모르지요. 이번에는 12명이 아니고 두 명만 보냈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무모하게 덤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강조하셨는데, ‘전쟁에 나가서 싸우기 전에, 먼저 앉아서 대가/비용을 판단해 보아라’고 하였습니다.
싸우기 전에 먼저 상황을 똑똑히 파악하고, 적을 살피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모하게 덤비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과 무모함 이 두 가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일을 하는데, 사실 아주 어리석어요.
그들은 사전에 상태를 똑똑히 알아보지 않고, 그냥 앞으로 전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작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상황을 신중히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탐꾼을 보내서,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싶었던 정보는 상대방의 군사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기가 어떤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기가 어떠할까?’
▶이제 두 정탐꾼이 본 것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두 정탐군은 한 기생집에 숙박했는데, 기생 라합을 만났습니다.
라합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지요. 아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창기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들을 맞이했고, 그들을 감추어 주었습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이 정탐꾼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수색하였어요.
하지만 라합이 그 두 사람을 지붕 위의 짚 속에 숨겼습니다.
수색하는 사람들이 가자,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서쪽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적진으로 깊숙이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들이 강변도 수색할 터이니 강변으로 가지 마세요.
당신들이 서쪽 산악지역으로 가서, 숨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오십시오.’
그가 이 두 사람의 생명을 살렸는데, 그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들 편에 서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놀라운 믿음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결단한 것이, 결국 신약 성경에 두 저자가, 이 여자를, 믿음의 본보기로 증거하였어요.
라합의 사람됨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 나쁜 여자’로 통해 일을 하시는 것이,
‘믿음이 없는 좋은 여자’를 통해 하시는 일보다 훨씬 많다는 것인데,
우리는 종종 이 점을 잊어버립니다.
이 기생이 그들을 감추어 주어서, 그들이 생명을 구했어요.
두 정탐군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생각이 나서, 라합에게
창문에 붉은 실을 동여매면, 우리가 너희 집은 손대지 않고, 넘어가리라고 하였어요.
아주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라합이 후에 창문에 피같이 붉은 실을 동여매었어요.
그래서 그의 집만이 파괴되지 않았지요.
*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유월절 때도, 붉은 칠을 한 집안에 있다가 재앙을 피했지요. 두 사건이 병행됩니다.
▶여러분, 이것은 요단강에 들어가지 전 일이고, 다음은 그들이 어떻게 강을 건넜습니까?
하나님이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셨어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강에 닿자 강물이 바로 말라 버렸습니다. 맞아요.
이것은 강 상류의 제방이 터져 잠간 강물을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하필, 마침 그때 그 일이 발생하였을까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우연이 나오는데, 확률로 보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우연은 아니고, 법궤를 멘 높이가 제법 높았거든요. 절대적으로 기적입니다.
그래서 이 때 그들은 마른 땅위로 요단강을 건넌 셈이지요.
하지만 얼마 전에 두 명의 정탐꾼은, 마른땅이 아니라 헤엄쳐 건너왔던 그 강이에요.
왜 이런 기적이 발생한 것일까요?
지금 새 세대는 과거에 홍해가 갈라진 것을 보지 못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새 세대를 위해, 다시 강물을 갈라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그들은 홍해가 갈라진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이 그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믿었을까요? *듣기만 들었을 뿐이죠.
그들은 완전히 새 세대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강물이 갈라지는 기적을 반복적으로 베푸셨다고, 저 파슨은 믿어요.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우리 여기서 멈추고, 다음 단원에서 더 많은 내용을 논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가 계속해서 여호수아서를 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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