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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를 대적하는 길

LNCK 2015. 8. 22. 12:51

마귀를 대적하는 길            벧전5:5~8              출처보기

 

 

 

※벧전5:8절에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대적하는 길은

7절에 염려하지 말라

6절에 겸손하라

5절에 장로에게 순복하라입니다.

 

특히 키워드는 "동기"입니다. "동기"가 잘못 되면, 마귀에게 속습니다.

오늘 내 사역의 "동기"를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마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근신하여 깨어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계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있습니다.

그는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 되시는 주님과 연합되고,

또한 그 믿음을 그대로 우리는, 사탄을 향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성경에 보면,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고선,

그 난외주에 헬라어로 훼방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과 교회 나라를 훼방하는 자가 있습니다.

훼방자(나눠지게 하는 자)’가 마귀입니다.

 

마귀가 있습니다. 저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낍니다.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는 가 하면,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가 결정하는 줄 알지만,

그 속에 마귀가 아주 격동시킵니다. 그렇게 하도록 충동질 합니다.

 

그것은 하와 때부터 입니다.

우리의 활동하는 주체가, 영이 아니라 혼일 때, 마귀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광명한 천사처럼, 아무리 선하고 빛나고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지만,

마귀적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헌신이 아니라, “동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마귀 역사를 알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것이, 맞나/틀리냐가 기준이 아니라,

 

마귀도 다 맞히고 어떤 때는 미래 일도 맞춥니다.

맞느냐/틀리느냐의 기준이 마귀/하나님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이 생각과 이 일을, 누구를 위하여 하느냐 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과 생각을, 주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먼저 나를 위한 것이냐.. 입니다.

사람(나의 유익)을 위한 것은,

그것이 아무리 맞는 말이고, 그것이 아무리 열심을 내는 것이라도

마귀적입니다.

 

반대로 성령적인 것은, 십자가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희생입니다.

 

십계명은 두 종류인데,

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가 될 때, 마귀적이 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되요.

 

우리 스스로는 마귀에게 안 속을 자가 없습니다.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죄가 없을 때인데도 마귀에게 속았어요.

우리들은 마귀가 우리를 조정할 수 있는, 죄가 있어요.

죄가 있는데, 우리 생각을 도대체 우리 힘으로 어떻게 지킵니까?

 

우리의 조상 하와는, 죄가 없는 에덴동산에서 마귀에게 속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데,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그걸 보시면 됩니다.

  *만약 나를 위한 것이면, 마귀적이 되기 쉽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 다고, 마귀로부터 절대 지켜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알아도, "자기를 위하여" 성경을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아무리 건전한 지식이 있어도, "자기를 위하여"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만, 마귀에게 속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생각하고 살 때,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훼방자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습니다.’

마귀는 죄가 없는 에덴동산에도 있었는데,

이 마지막 때, 죄가 관영한 이때, 마귀는 넘칩니다.

 

도대체 우리가 살아가면서 헤쳐나가야될 영역에

마귀가 장악하지 아니한 영역이 있을까 싶습니다. 모든 영역에 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어떻게 대적해요? 믿음을 굳게 하여, 믿음은 대상이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하신 그분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는 일은, 믿어지는 분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 앞에는, 8절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7절

 

여러분, 인격적으로 성실하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영역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도적이요, 거짓말 장이요, 비인격적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먼저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보다 먼저는,

우리 염려를 주께 맡겨야 되는 겁니다. 염려를! *8절 앞에 7절이 나옵니다. 연결해서 보면!

 

우리 마음속에 근심하는 염려가 있다는 것은, 내 삶에 내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염려가 있으면, 우리의 생각과 결정의 주체가, 우리의 혼입니다. 타락한 혼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의 결정이, 그속에서 이 지식이 맞느냐/틀리느냐를 분별하는게 아니라

마귀도 맞힙니다. 마귀도 맞는 지식이 많습니다.

맞고/ 틀리는 지식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 내면의동기에 있습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람은 스스로를 속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고 간교한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그럽니다. 어른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스스로 속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쉽게 속임)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콩을 왜 심었고, 팥을 왜 심었느냐는 것입니다. *“동기를 보십니다.

 

그래서 그 다음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무엇을 심었으며, 이전에 누구를 위하여 심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건, 기도를 하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것이잖아요.

성경구절도 우리는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럼 뭘 거두어요? 우리가 심은 성경과 기도로부터 거두는게 아닙니다.

동기를 통해서,

내 육체를 위하여 성경을 보고, 내 육체를 위하여 기도를 하잖아요?

그럼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거둡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에,

우리가 오늘을 사는 동안에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성경에 어디에 열심히 살라고 그랬습니까?

열심히 산다는 것은, 거의 주님이 없이 자기를 위해 살 때, 열심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염려를 맡기라는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염려를 맡겨라. 염려는 염려하는 주체가 나입니다.

빌립보서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주인이 감사의 대상 되시는 주님이 되실 때만 감사함으로 말하게 됩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한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염려하면 열심히 살게 됩.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마귀를 대적하기 전에, 겸손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됩니다.

 

신구약 전체에,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성령입니다.

에스겔에게 성령이 임할 때, ‘주의 손이 역사하시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도 주의 손이 저들과 함께 함으로..’ 이건 성령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성경에 주님의 발아래’.. 주님의 발은 말씀입니다.

   항상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습니다.

   에스겔서와 역대기에 지성소에 있는 법궤를, ‘주님의 발등상 모시는 곳으로 나옵니다.

 

   법궤는 주님의 발등상을 모시는 곳입니다. 모세가 율법의 두 돌판을 받았을 때,

   성경은 주님의 발이 강림했다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주님의 발은 말씀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뭘로 심판하실까요?

   신기한 것은, 주님이 오기기 전까지는 철장(쇠몽둥이) 권세로 심판하세요.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이 발아래에 밟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즉 성령 아래입니다.

여러분, 이 모임 가운데, 주님의 손이 함께 하는 모임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능하신 손,

성령의 능력아래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려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능하신 손,

성령의 능력 아래 겸손한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그 앞에는 구약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이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겸손하세요. 사람은, 전능하면 교만해져요. 놀라워요.

주님은, 전능하신데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벧전5:5절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여러분, 염려 근심을 주님께 맡기려고 하기 전에,

겸손해야 됩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여러분, 성경에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싸움 앞에서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겁니다.

 

둘째,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성경에 허리를 동이라. 묶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38:1~3절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우리는 어려움이 오면 이치를 따지고, 머리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와서, 이치를 따지고 지혜로워지려고 하기 전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정말 중요합니다.

겸손은 unlimited 제한이 없습니다.

 

물은 천년이 고여 있어도, 조금만 낮아지면 그 순간에 움직입니다.

물은 참 겸손합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의 움직임은, 천년을 움직이지 않아도, 조금만 낮아지면, 그 순간에 바로 흐릅니다.

물은 겸손에 깨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그렇습니다. 성령은 물과 같습니다. 성령은 겸손한 곳으로 먼저 흐릅니다.

겸손한 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대해서 받은 말씀입니다.

겸손한 교회가 되라!

 

주님은, 욥이 너무너무 어려운데,

주님은 욥에게 엘리야처럼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폭풍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탄 배가 풍랑칠 때, 주님은 풍랑속에서 풍랑을 뚫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폭풍처럼 어려움 속에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나 평강 가운데만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폭풍속에서 변화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주님 나는 마음이 심약하오니, 조용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에게, 폭풍가운데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도, 폭풍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에게는 조용히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욥은 내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응하였도다.’ 욥이 한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마음은 , 내가 행동한대로 되었도다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가 마음에 두려워하는 대로 되었도다

 

몸의 법칙보다 혼의 법칙이 우위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염려를 없애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사는데, 염려를 많이 해 보세요.

(열심대로 되지 않고) 여러분의 염려한 대로 됩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성령만 따릅니까?

눈에 보이는 마땅히 순종해야 될 사람에게도 순종하지 못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순종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어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대적해도,

마음에 어떤 폭풍같은 염려가 있어도,

그걸 생각하지 말고,

내가 겸손해야될 자리를 잃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