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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방문

LNCK 2015. 8. 23. 08:47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방문             18:1-27                    15.08.16.  출처

 

 

 

 

장인 이드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방문했는데 그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와 그 가족들은 분명히 함께 애굽을 향하여 갔습니다.

 

도중에 모세가 할례를 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어

십보라가 아들의 표피를 베어 대신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애굽에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미드라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론이 모세에게 그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설득하였고

결국 십보라와 그의 아들은 이드로에게 되돌아갔다.’

 

이는 모세가 얼마나 위태로웠던가를 잘 보여줍니다.

마치 늘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과 같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가족이 당하는 고통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게 가족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홀몸으로 선교를 다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일에 전심하기 위해서는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가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빠져 있고

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애굽이라는

역사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족은 고난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과 엘리에셀입니다.

게르솜이란 이름의 뜻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신앙적인 이름이고 모세의 인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아들이 모세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거나 제사장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평범한 가문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들이 애굽의 현장에서 함께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지 저는 추론해 봅니다.

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자손들에게 돌아갑니다.

 

안전과 행복을 추구한 대신 영광은 없습니다.

영어에 No pain no gain 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난을 겪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어찌되었던 처자식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처자식들보다 장인의 방문이 더 반가웠던 것 같습니다.

장인의 방문을 먼저 언급할 뿐만 아니라 말끝마다 장인, 장인 합니다.

짧은 한 장에서 장인이라는 단어를 무려 열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이드로를 만나서는 극진히 절하며 열렬히 환영합니다.

처자식들에 대한 안부나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 모세가 미디안 목자로서 40년을 보낼 때

장인에게서 많은 도움과 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인은 미디안의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까? 아니면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입니까?

성경에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었다면

모세의 장인은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이었던가

아니면 여호와를 비롯한 여러 신들을 섬기던 다신론 배경의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찬양합니다.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10)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11)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12)

 

이드로는 모세에게 친절했고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조직화하고 리더십을 나누는 지혜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멜기세덱 이라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던 사람인데

정체도 출신도 알 수 없습니다.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해석하지만 신비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그가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14:19) 하며

아브라함에게 복을 빕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도 유사한 존재입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 경외자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God fearer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이스라엘보다 더 경건하고 진리에 대해서 열려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였던 고넬료를 보면서 베드로가 했던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4-35)

 

하나님을 이스라엘에만, 교회에만 갇힌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기에 어디든 계십니다.

그곳에서 어렴풋하게 하나님을 발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거나 행동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교회의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진리를 찾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는 모세를 통해서 진짜 실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적 삶입니다.

 

일을 나누라

 

모세는 이드로에게 하나님 신앙을 가르쳐 주었지만

반대로 이드로로부터 세상의 지혜를 얻습니다.

세상의 지혜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일반은총

 

하루 밤을 묵은 다음날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루 종일 재판을 하기 위해 앉아 있고

백성들은 재판을 받기 위해서 종일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혼자 재판하니 일이 너무 많고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드로가 내린 판단입니다. 18절입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백성들은 기다리다 지치고 모세는 일하다 탈진하게 생겼다는 판단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모세 혼자서 일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모세만 바라보고 있고

모세는 자기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작은 단위에서는 한 사람의 헌신으로도 충분하지만, 규모가 커지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일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드로는 중간 리더들을 세우라고 조언합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서 작은 일들은 그들이 재판하게 하고

큰일만 모세가 처리하는 조직을 갖추도록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고 모세는 과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일은 분담해야 합니다. 그래야 효율적입니다.

시너지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둘이 모이면 두 배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힘이 발생합니다.

 

두께 2인치, 4인치의 각목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최대 하중은 167kg이라고 합니다.

두 개 각 각 사용하면 334kg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각목 두 개를 접착제로 붙이거나 못을 박아서 사용하면

최대 하중 2,212kg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합니다. 무려 열배나 더 강해집니다.

 

우리 교회도 운영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장로교의 당회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그동안은 저 혼자 운영해 왔다면 이제는 그 책임을 나누려 합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할 때 효율적입니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는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을 해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성경에서는 몸에 비유합니다. 몸은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락합니다. 머리에서 내린 명령을 일사불란하게 수행합니다.

 

사람 몸처럼 효율적인 조직도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완벽히 조화를 이룬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조직이 유기체처럼 효율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소외도 차별도 없습니다.

고통을 함께 느끼며 서로가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일을 나누는 것은 또한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권한을 나누는 것입니다.

정치학의 불변의 원리 중 하나가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이기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욕심이 생기고 그 맛에 취합니다.

 

생각은 편협되고 갇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로 견제할 때 좀 피곤하더라도 경계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는 대의(대표를 뽑아서 맡기는)정치입니다.

성도들의 대표를 장로로 선출하고 목사와 함께 당회를 이루어 교회를 이끌어가게 합니다.

교황이나 감독처럼 독재 체제가 아닙니다.

서로 견제하고 의견을 수렴해서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모세의 가문에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 옆에 비판적인 일을 하는 선지자 직분이 함께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견제와 감시도 서로 나누고 돕는 일입니다.

 

일을 분담할 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20절입니다.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율례와 법도를 정하는 것입니다.

 

율례와 법도는 원칙이나 매뉴얼과 같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리더들이 재판을 하고 또 전체적인 방향을 조율해 갈 수 있습니다.

 

건강한 조직은 시스템이 살아 있는 조직입니다.

누가 그 자리에 앉혀 놓아도 주어진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변화가 심한 조직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리더의 조건이 있습니다.

21절입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세 가지 조건입니다.

 

첫째는 능력 있는 사람,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셋째는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그에 합당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여 다 뽑아서는 안 됩니다.

그냥 기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합당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따라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필요조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자리를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으며 그 뜻에 합당하도록 행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진실되고 정의로운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뜻이 앞서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초기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선교에만 집중했습니다.

성령께서 이끌어가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목회서신이라는 것을 통해서, 조직에 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감독 장로 집사를 세워 교회가 조직적으로 운영되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주어진 일들을 잘 운영해 가는 것도

충성된 종이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