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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에 어두운 설교자

LNCK 2015. 8. 29. 16:45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설교자          딤전5:17~25                14.04.16.설교스크랩출처

 

 *원제목 성경말씀 외에 설교말씀이 꼭 필요한가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어떻습니까성경말씀 외에 설교말씀이 꼭 필요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결론적으로 교회 안에서 다스리는 장로님들을 존경하되,

말씀을 전하는 장로님들은 더욱 그리할지니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적으로 존경만 할 뿐 아니라교회가 이분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그런 단계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님들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게 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그분들의 생계를 떠맡는 그런 일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참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여러분?

 

왜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은 당신의 생업을 갖지 않으시고,

교회 안에서 교회가 재정적으로 그분들의 생계를 담당하면서

말씀을 전하시도록 하는 걸까요?

 

그리고 이것이설교말씀을 교회가 꼭 그렇게 설교말씀을 전하는 자를 위해서

전적으로 생계를 다 충당하면서도 모셔야 되는가라고 하는 질문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설교말씀이 꼭 그렇게 누군가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하다록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회중교회 같은 경우는

꼭 목사님이 아니라도 아무나 설교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 자기 생업을 갖고 있는 회중들 중에서 나와서 설교를 할 수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많은 교단은 아직도 교회가 생계비를 다 충당하고 있는 목사님을 모시고 있어요.

 

그것이그분들이 해야 되는 주 업무인 설교말씀과 가르치는 일과 연관이 되어서,

설교말씀과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들이 그만큼 중요한가라고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전임 목회자가 필수적인가요?

만약 필수적이라면왜 그런가요?

 

여러분 교회에 관한 학문을 하다 보면교회재정에 관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근데 개척교회 같은 경우에 재정의 70%에서 90%까지도

목사님의 생계비로 다 들어가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학문적으로 그렇습니다.

 

모든 이론을 다 따져보면개척교회가 교회로서 처음으로 생겨날 때는,

몇 명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70%에서 90%까지를 모든 재정을 목사님의 생계비로 다 투자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목사님들,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을 교회가 모셔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곧그분들이 하는 사역인 설교말씀이 그렇게 과연 중요한 것인가라고 하는,

아무도 그렇게 질문하지 않지만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보고대답해 봅니다.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에요즘은 또 옛날과 중세시대와도 달라서

집 안에 성경이 한 권만 있는 집이 없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한쪽에 그냥 놔둔 성경책도한두 권이 아닐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성경말씀 읽고 대하고,

그리고 요즘은 또 QT가 유행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서점에 나가서 책을 읽으면

내게 어려운 책도 있고 쉬운 책도 있는데,

어려운 책도 읽으면서 이해하고 내 나름대로 거기서 감동도 받고

또 배울 거는 배우고 그렇지 않습니까?

 

또 책 한 권을 다 이해하지 않더라도,

어느 구절이 내 마음에 특별히 감동을 주고 인상적으로 남아서,

내 인격의 자기 계발에 영향을 주고 그러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성경도 그렇게 읽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꼭 설교말씀을 하는 자를 교회가 재정적으로 다 부담을 하면서,

소위 지금 본문으로 말하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그런 장로님들을,

그 목사님들을 우리가 꼭 그렇게 모셔야 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결론부터 말하면,

설교말씀을 전담하는 분들이 안 계시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저 태목사는 그렇게 봅니다.

 

적어도 제 신앙과 제가 공부한 신학 안에서는,

설교말씀을 하는 분이 설교말씀을 전담하는 분이 안 계시면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우리에게 꼭 벌어집니다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 말씀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 세상 말이라고 해야 되는데, ‘이 세상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설교말씀과 대비시키기가 좋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쓰도록 합니다.

 

근데 이 세상 말씀이 들어올 때는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세상 말씀’ 속에는 세상의 영이 들어있어요.

 

언제나 말씀드리지만소설가의 글 속에는 소설가의 정신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말씀들 안에는세상의 영이 들어 있어서,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 마음속에

세상말씀 속에 들어 있던 세상의 영들이, 침전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영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채운다는 거예요.

 

그럼 세상의 말씀이라는 게 뭐냐?

 

결코 영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신념체계들 가치관들,

이런 것들이 세상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고,

그런 것들 속에 있는 세상의 영들이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일단 들어오게 되면 이 현상은 절대적으로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시장에서 살고사업장에서 살고학교에서 살고가정에서 살다보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언어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고,

세상의 영들이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할 때,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객관적으로 내게 주어진 상황이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세상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 때문에 내가 걱정하는 거예요마음이 사로잡혀 가지고요.

 

장사가 잘 안됐습니다한 달 동안.

 

그러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 ‘아이고이 장사가 한 달 동안이나 안 되니,

이렇게 나가다가는 망하겠구나!’ 그러면서 염려를 합니다.

 

장사가 잘 안 되는데 이렇게 나가다가는 망하겠구나!’ 이게 세상 말씀이에요.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상황이 주어지지만그 상황이 곧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의해서 장사가 잘 안됐기 때문에

다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의 말씀들이 들어와 가지고,

돈이 안 벌리니까 이제는 우리 집안이 망하겠구나 라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고우리 마음이 걱정과 염려에 휩싸여버리고 맙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관심에 의해서 성경말씀들이 취사선택이 되고,

끌어당겨지는 게 있고 밀쳐지는 게 있고,

 

또 끌어당긴 말씀조차도 겉으로 보기에는 내 관심사에 맞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말씀인데도내가 멋대로 해석을 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QT라고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제가 거듭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사람은 언제나내 마음을 선점하고 있는 관심사에 의해서,

그 다음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사건이든 말씀이든 글이든

다 해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선점되는 관심사에 의해서해석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 것들에 의해서 선점된 상태에서는,

성경을 백 번 읽어도 결코 성경에 들어 있는

올바른 말씀을 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예를 들면 그런 겁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요한복음에 의하면 표적이에요표적 싸인.

내 안에 너희가 지금 나를 너희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는데,

맞다 나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내 안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내 안에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고 계신다라는 것을 표시해 주는 사건이라는 얘기입니다.

 

근데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늘 먹고사는 게 관심인 사람들이니까물질적인 관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이 예수님을 세상적인 의미에서 임금 삼으면

우리가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겠구나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는예수님과 삼 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조차도

마음을 선점하고 있는 관심이 있다 보니까,

삼 년을 쫓아다니며 듣고 보고 배움을 받았는데도예수님을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이 땅에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삼 년 동안 가까이에서 접하고,

온갖 말씀과 기적과 모든 표적을 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동고동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해를 하는 겁니다.

 

마음에 나라에 독립이라든지 자기 인생의 출세라든지 하는

선점된 관심사가 있어놓으니까,

육신이 되어서 오신 말씀자체를 완전히 오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수십만 명이 아마 기적의 혜택을 받았을 거예요.

근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도망가 버립니다.

오해한 거예요.

 

~든 사건과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한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이 이 세상적인 관심 하에서 선점되고 있으니까.

근데 이것을 나 스스로는 깨우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말씀이 들려지기 전까지는,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 세상적인 말씀들을 몰아내고

쳐내고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는 없는 겁니다.

 

근데세상적으로 관심이 선점된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이 먹힐 수 있다는 것은,

설교하는 사람도 세상적인 관심에 의해서 설교말씀을 이해하고 있고,

듣는 사람도 세상적인 관심,

 

예를 들어 돈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돈이 중요하다고 하는 앞선 관심에 의해서 말씀을 해석하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그러니까,

 

일 년에 순이익을 뭐 100억을 남긴다, 1000억을 남긴다 이거 가능하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또 돈이 첫 번째 관심인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고아멘아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성경말씀을 내가 읽는다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세상에 의해서 관심이 선점된 상태에서는,

성경은 성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계발서이고 내 관심사를 현실 가능한 것으로 보여주는 희망의 서적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능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왜 그러면 생계 수단을 전폐하고 말씀에 전념하느냐?

 

목사님들도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목사님을 시장에 내보내 가지고사업장에 내보내서

사업가로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으로 살게 해 보세요.

 

예를 들어오늘이 금요일인데

월요일이면 100만 불짜리 프로젝트를 계약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계약에 사업의 사활이 달려있습니다.

딸려있는 식구가 백 명인데 다 먹여 살려야 되는데이 프로젝트가 성공을 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월요일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토요일 날설교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본문이 보이겠고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영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겠습니까?

 

쉽게 말해서목사님들이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이유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목사님들 중에서는집사님이나 장로님들보다 세상에 내보내면,

훨씬 더 마음을 못 지킬 사람이 많이 있어요.

 

인지상정입니다세상에서 살다보면 마음을 지킬 수가 없어요,

세상 관심사가 들어와 가지고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데 장사가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 내가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 사로잡힐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목사님들한테 직업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구약 때 대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전체가

다 자기 산업이 없이열한 지파가 내는 십일조를 통해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신 이유도 같은 이유라는 얘기입니다.

 

성전에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종사해야 될 사람들은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 성전은 있었지만 예수님 시대 때대제사장들이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돈에 뺏겨버린 거예요마음을.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70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싹 멸망해 버리고 말지 않습니까그런 성전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대제사장과 레위인성전에서 종사하는 그 사람들이 마음을 지킬 때,

예루살렘 성전이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이 세상 관심으로 점령되지 않은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그래서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되니까.

 

말씀을 받으려면 먼저 인격적으로하나님이 말씀만 던져주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은 분리될 수가 없어요.

말씀이 있는 곳에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이 임하시는 겁니다.

 

그 인격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선점되면 안 되거든요,

그런 마음에는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하나님이.

 

어쨌든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이

다른 모~든 관심사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근데 문제는 목사님 스스로가 생업은 관두고,

생업은 없더라도 교회 안에서 일을 만드시면서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교회 건축은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나서서 건축하자고 그럴 때,

목사님은 그들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목사님 자신은 계속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을 교회 건축으로부터 지켜내야 되는 겁니다.

 

근데교회가 백이면 백 다 목사님들이 앞장서 버리는 거예요.

마음이 교회 건축예배당 건축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또는 예배당에 모여서 하는 행사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교인 숫자를 늘려야 된다는 관심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교인 숫자를 늘려야 된다는 관심에 사로잡히면,

말씀이 다 그 관심으로부터 풀어지는 겁니다.

 

예배당 건축을 해야 된다 그러면,

예배당 건축이라는 관심에 의해서 말씀이 다 이해되고 풀어지는 거예요.

 

모든 말씀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존재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목사님이 생업을 하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이 현장에서 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물정을 모르시는 거 같아요.

 

물정을 몰라야 된다는 거 아십니까?

세상 물정을 몰라야 돼요.

목회자가 세상 물정을 알면말씀이 물정에 맞춰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성도들이 살아야 되는 삶의 현실을 잘 이해해서

그 현실에 맞추는 게 아닙니다.

 

물정 상관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 지으시고 보고 계시고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살아계신 그 하나님께서 내게 전해주신 그 말씀을 전하는 거지,

물정에 맞춘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에요.

 

물정에 맞추다 보니까 교회가 이 모양으로 돼 가는 겁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그리스도인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문을 들어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는 거 같아요.

 

이 말씀은신문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보면서,

그 세상 돌아가는 걸 이해한 다음에 성경을 거기에 맞추어 해석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을 이해해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그 다음에 이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신문을 통해 접하는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얘기에요세상을 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대로 살아버리라는 얘기지,

세상에 맞춰서 성경을 이해하라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말씀만 듣고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만 만난 뒤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말고세상으로 나가라는 얘기입니다.

 

이거 오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까 얘기한프로젝트 때문에 마음에 딱 걸린 장로님이 계세요.

 

그 프로젝트 계획을 성사시켜야 되는데,

근데 물정 모르는 목사님께서 설교단에서 뭐라고 얘기하시냐 하면,

 

사업 때문에 지금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십자가에서 죽으세요,

사업에 대해서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사업은 여러분이 이삼십년 해 오신 거지만하나님은 태초에 계신 분입니다.

존재의 순서를 따라서 생각을 하시고 마음을 드리세요하나님께 먼저 마음을 드려야 됩니다.’

 

물정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업이 사활이 걸린 건데어떻게 하면 이 사업계획,

이 계약을 따낼 수 있는 가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주셔야지,

그거에 대해서 죽으라 그러면 어떡하느냐는 말입니다.

 

근데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으라는이 말씀이 역사합니다.

 

완전히 머리가 그 계약을 따내야 된다는 사로잡혀 있던 이 장로님의 생각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역사하면서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십자가 사건이 프로젝트 계약 사건보다 더 우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계약 건 때문에 애를 쓴 6개월 동안 처음으로 느끼는 평강을 느낍니다,

잠 잘~잤습니다.

 

사업 다잊어버리고 평강 가운데 있다가,

월요일 날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갑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었더니,

그동안 몰랐던 하나님이 느껴지는데사업 망해도 하나님만 있으면 살겠어요.

 

그리고 이 사업망하면 망하는 대로 하나님 뜻일 거라고 믿게 됩니다.

웃으면서 나가요.

 

온전히 스트레스가 해방된 상태에서 나갑니다.

직원들은무슨 좋은 일이 있나보다 그러는데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었을 뿐이고하나님 만났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진짜 계약 현장에 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물정 모르는 목사님이말씀을 받아서

자기 마음을 어떤 관심사에도 뺏기지 않고 지켜내면서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모든 말씀에서 하나님이 만나져야 된다 그러면,

십자가가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말씀은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품고 있는 것들이에요.

 

근데예배당 건축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십자가에서 죽자는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예배당 건축에 대해서 살아 있어야 예배당 건축이 될 줄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거지요.

 

목사님이 하고장로님들이 하고당회가 하는 걸로 돼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관심이든지 살아 있으면십자가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목사님들 설교 속에서.

 

그러니까 십자가만 전하고 있으면물정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물정은 하나님이 아시면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 거지,

왜 내가 알아야 됩니까?

 

노아가이제 홍수가 날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에

사람들한테 가서 말해요 홍수가 날 거다

 

사람들이 물정 모르는 망령 난 노인네라고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정 다 아시지만 그러나 물정에 맞추지 않습니다.

 

대제사장들의 물정 알고지금 이 예루살렘의 이 종교의 현실 물정,

재정적인 물정경제적인 상황식민지하에 있는 물정 다아십니다.

 

그런데 이 물정 아~무 상관없이하나님이 전하시는 말씀만 전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입에서단 한 마디도 나라 독립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물정을 모르시는 분입니까?

 

물정에 밝은 목사님의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물정에 밝은 목사님은그렇게 물정에 밝으면 나가서 돈 벌라 그러세요.

 

우리가 그분의 생계비를 대는 이유는,

물정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살아계신 하나님,

세상을 다 알고 온세상 물정을 다 지배하고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생계비를 대드리는 거지,

세상 물정 많이 아는 그런 목사님 필요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이라든지 교회 숫자 같은 거,

이런 것도 목사님의 마음을 뺏는 거예요.

 

오직 목사님의 관심은 십자가에서 목회 현장에 대해 죽어야 됩니다.

 

목회 현장에 대해 죽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고,

말씀을 전할 때 전해야 되는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고,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서 교회는 목사님들에게

마음의 존경을 드리고 생계비를 책임져 드리면서 지켜드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지켜드리고그 말씀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의 말씀들이 쳐 나가게 돼요밖으로.

 

그런 마음으로라야 성경을 읽어도성경이 말씀으로 이해될 수가 있게 됩니다.

 

선점된 관심이 십자가 복음 말씀을 통하여 떨쳐져 나가기 전에는,

그 관심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죽는 일이 말씀을 통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성경말씀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이름 하는 자기계발서에 불과하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설교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꼭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존경과 재정적 배려를 해 드려야만 되는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들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목사님들의 마음을 지켜 주시사,

영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에 가장 선호하시는 장소가 되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전해지는 모든 말씀이 물정에 맞춰진 말씀이 아니고

관심에 의해 지배되는 해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성경말씀 외에 설교말씀이 꼭 필요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결론적으로 교회 안에서 다스리는 장로님들을 존경하되,

말씀을 전하는 장로님들은 더욱 그리할지니라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적으로 존경만 할 뿐 아니라, 교회가 이분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그런 단계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님들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게 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그분들의 생계를 떠맡는 그런 일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참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왜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은 당신의 생업을 갖지 않으시고,

교회 안에서 교회가 재정적으로 그분들의 생계를 담당하면서

말씀을 전하시도록 하는 걸까요?

 

그리고 이것이, 설교말씀을 교회가 꼭 그렇게 설교말씀을 전하는 자를 위해서

전적으로 생계를 다 충당하면서도 모셔야 되는가라고 하는 질문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설교말씀이 꼭 그렇게 누군가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하다록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회중교회 같은 경우는

꼭 목사님이 아니라도 아무나 설교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 자기 생업을 갖고 있는 회중들 중에서 나와서 설교를 할 수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많은 교단은 아직도 교회가 생계비를 다 충당하고 있는 목사님을 모시고 있어요.

 

그것이, 그분들이 해야 되는 주 업무인 설교말씀과 가르치는 일과 연관이 되어서,

설교말씀과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들이 그만큼 중요한가라고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전임 목회자가 필수적인가요?

만약 필수적이라면, 왜 그런가요?

 

여러분 교회에 관한 학문을 하다 보면, 교회재정에 관한 얘기가 나오거든요?

 

근데 개척교회 같은 경우에 재정의 70%에서 90%까지도

목사님의 생계비로 다 들어가는 것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학문적으로 그렇습니다.

 

모든 이론을 다 따져보면, 개척교회가 교회로서 처음으로 생겨날 때는,

몇 명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70%에서 90%까지를 모든 재정을 목사님의 생계비로 다 투자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 이렇게까지 하면서 목사님들,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을 교회가 모셔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곧, 그분들이 하는 사역인 설교말씀이 그렇게 과연 중요한 것인가라고 하는,

아무도 그렇게 질문하지 않지만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보고, 대답해 봅니다.

 

!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에, 요즘은 또 옛날과 중세시대와도 달라서

집 안에 성경이 한 권만 있는 집이 없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한쪽에 그냥 놔둔 성경책도, 한두 권이 아닐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성경말씀 읽고 대하고,

그리고 요즘은 또 QT가 유행하지 않습니까?

 

! 이런 상황에서, 서점에 나가서 책을 읽으면

내게 어려운 책도 있고 쉬운 책도 있는데,

어려운 책도 읽으면서 이해하고 내 나름대로 거기서 감동도 받고

또 배울 거는 배우고 그렇지 않습니까?

 

또 책 한 권을 다 이해하지 않더라도,

어느 구절이 내 마음에 특별히 감동을 주고 인상적으로 남아서,

내 인격의 자기 계발에 영향을 주고 그러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그렇게 읽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꼭 설교말씀을 하는 자를 교회가 재정적으로 다 부담을 하면서,

소위 지금 본문으로 말하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그런 장로님들을,

그 목사님들을 우리가 꼭 그렇게 모셔야 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결론부터 말하면,

설교말씀을 전담하는 분들이 안 계시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저 태목사는 그렇게 봅니다.

 

적어도 제 신앙과 제가 공부한 신학 안에서는,

설교말씀을 하는 분이 설교말씀을 전담하는 분이 안 계시면 불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 하나 우리에게 꼭 벌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 말씀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 세상 말이라고 해야 되는데, ‘이 세상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설교말씀과 대비시키기가 좋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쓰도록 합니다.

 

근데 이 세상 말씀이 들어올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세상 말씀속에는 세상의 영이 들어있어요.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소설가의 글 속에는 소설가의 정신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말씀들 안에는, 세상의 영이 들어 있어서,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 마음속에

세상말씀 속에 들어 있던 세상의 영들이, 침전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영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채운다는 거예요.

 

그럼 세상의 말씀이라는 게 뭐냐?

 

결코 영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신념체계들 가치관들,

이런 것들이 세상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고,

그런 것들 속에 있는 세상의 영들이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일단 들어오게 되면 이 현상은 절대적으로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시장에서 살고, 사업장에서 살고, 학교에서 살고, 가정에서 살다보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언어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고,

세상의 영들이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할 때,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객관적으로 내게 주어진 상황이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세상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 때문에 내가 걱정하는 거예요, 마음이 사로잡혀 가지고요.

 

! 장사가 잘 안됐습니다, 한 달 동안.

 

그러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 ‘아이고~ 이 장사가 한 달 동안이나 안 되니,

이렇게 나가다가는 망하겠구나!’ 그러면서 염려를 합니다.

 

장사가 잘 안 되는데 이렇게 나가다가는 망하겠구나!’ 이게 세상 말씀이에요.

 

장사가 잘 안 된다는 상황이 주어지지만, 그 상황이 곧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의해서 장사가 잘 안됐기 때문에

다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의 말씀들이 들어와 가지고,

돈이 안 벌리니까 이제는 우리 집안이 망하겠구나 라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고, 우리 마음이 걱정과 염려에 휩싸여버리고 맙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관심에 의해서 성경말씀들이 취사선택이 되고,

끌어당겨지는 게 있고 밀쳐지는 게 있고,

 

또 끌어당긴 말씀조차도 겉으로 보기에는 내 관심사에 맞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말씀인데도, 내가 멋대로 해석을 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QT라고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제가 거듭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사람은 언제나, 내 마음을 선점하고 있는 관심사에 의해서,

그 다음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사건이든 말씀이든 글이든

다 해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선점되는 관심사에 의해서, 해석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 것들에 의해서 선점된 상태에서는,

성경을 백 번 읽어도 결코 성경에 들어 있는

올바른 말씀을 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예를 들면 그런 겁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표적이에요, 표적 싸인.

내 안에 너희가 지금 나를 너희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고 있는데,

맞다 나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내 안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내 안에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고 계신다라는 것을 표시해 주는 사건이라는 얘기입니다.

 

근데,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늘 먹고사는 게 관심인 사람들이니까, 물질적인 관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이 예수님을 세상적인 의미에서 임금 삼으면

우리가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겠구나,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 삼 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조차도

마음을 선점하고 있는 관심이 있다 보니까,

삼 년을 쫓아다니며 듣고 보고 배움을 받았는데도,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이 땅에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삼 년 동안 가까이에서 접하고,

온갖 말씀과 기적과 모든 표적을 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동고동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해를 하는 겁니다.

 

? 마음에 나라에 독립이라든지 자기 인생의 출세라든지 하는

선점된 관심사가 있어놓으니까,

육신이 되어서 오신 말씀자체를 완전히 오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수십만 명이 아마 기적의 혜택을 받았을 거예요.

근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 ~ 도망가 버립니다.

~ 오해한 거예요.

 

~든 사건과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한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이 이 세상적인 관심 하에서 선점되고 있으니까.

근데 이것을 나 스스로는 깨우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부로부터 말씀이 들려지기 전까지는,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 세상적인 말씀들을 몰아내고

쳐내고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는 없는 겁니다.

 

근데, 세상적으로 관심이 선점된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이 먹힐 수 있다는 것은,

설교하는 사람도 세상적인 관심에 의해서 설교말씀을 이해하고 있고,

듣는 사람도 세상적인 관심,

 

예를 들어 돈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돈이 중요하다고 하는 앞선 관심에 의해서 말씀을 해석하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그러니까,

 

일 년에 순이익을 뭐 100억을 남긴다, 1000억을 남긴다 이거 가능하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또 돈이 첫 번째 관심인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듣고, 아멘, 아멘!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내가 읽는다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세상에 의해서 관심이 선점된 상태에서는,

성경은 성경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계발서이고 내 관심사를 현실 가능한 것으로 보여주는 희망의 서적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능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왜 그러면 생계 수단을 전폐하고 말씀에 전념하느냐?

 

목사님들도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목사님을 시장에 내보내 가지고, 사업장에 내보내서

사업가로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으로 살게 해 보세요.

 

예를 들어, 오늘이 금요일인데

월요일이면 100만 불짜리 프로젝트를 계약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계약에 사업의 사활이 달려있습니다.

딸려있는 식구가 백 명인데 다 먹여 살려야 되는데, 이 프로젝트가 성공을 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 월요일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토요일 날, 설교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무슨 본문이 보이겠고,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영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목사님들이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이유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목사님들 중에서는, 집사님이나 장로님들보다 세상에 내보내면,

훨씬 더 마음을 못 지킬 사람이 많이 있어요.

 

인지상정입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마음을 지킬 수가 없어요,

세상 관심사가 들어와 가지고, 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데 장사가 안 되는 현실을 어떻게 내가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 사로잡힐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목사님들한테 직업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구약 때 대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전체가

다 자기 산업이 없이, 열한 지파가 내는 십일조를 통해서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신 이유도 같은 이유라는 얘기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종사해야 될 사람들은,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 성전은 있었지만 예수님 시대 때, 대제사장들이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돈에 뺏겨버린 거예요, 마음을.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70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싹 멸망해 버리고 말지 않습니까? 그런 성전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대제사장과 레위인, 성전에서 종사하는 그 사람들이 마음을 지킬 때,

예루살렘 성전이 의미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이 세상 관심으로 점령되지 않은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되니까.

 

말씀을 받으려면 먼저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말씀만 던져주는 분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과 말씀은 분리될 수가 없어요.

말씀이 있는 곳에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이 임하시는 겁니다.

 

그 인격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선점되면 안 되거든요,

그런 마음에는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쨌든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이

다른 모~든 관심사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드리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근데 문제는 목사님 스스로가 생업은 관두고,

생업은 없더라도 교회 안에서 일을 만드시면서,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교회 건축은,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나서서 건축하자고 그럴 때,

목사님은 그들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목사님 자신은 계속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을 교회 건축으로부터 지켜내야 되는 겁니다.

 

근데, 교회가 백이면 백 다 목사님들이 앞장서 버리는 거예요.

마음이 교회 건축, 예배당 건축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또는 예배당에 모여서 하는 행사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교인 숫자를 늘려야 된다는 관심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교인 숫자를 늘려야 된다는 관심에 사로잡히면,

말씀이 다 그 관심으로부터 풀어지는 겁니다.

 

예배당 건축을 해야 된다 그러면,

예배당 건축이라는 관심에 의해서 말씀이 다 이해되고 풀어지는 거예요.

 

모든 말씀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존재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목사님이 생업을 하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이 현장에서 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물정을 모르시는 거 같아요.

 

물정을 몰라야 된다는 거 아십니까?

세상 물정을 몰라야 돼요.

목회자가 세상 물정을 알면, 말씀이 물정에 맞춰집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살아야 되는 삶의 현실을 잘 이해해서

그 현실에 맞추는 게 아닙니다.

 

물정 상관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 지으시고 보고 계시고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살아계신 그 하나님께서 내게 전해주신 그 말씀을 전하는 거지,

물정에 맞춘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니에요.

 

물정에 맞추다 보니까 교회가 이 모양으로 돼 가는 겁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그리스도인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문을 들어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는 거 같아요.

 

이 말씀은, 신문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보면서,

그 세상 돌아가는 걸 이해한 다음에 성경을 거기에 맞추어 해석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을 이해해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그 다음에 이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신문을 통해 접하는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얘기에요, 세상을 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대로 살아버리라는 얘기지,

세상에 맞춰서 성경을 이해하라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말씀만 듣고,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만 만난 뒤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얘기입니다.

 

이거 오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까 얘기한, 프로젝트 때문에 마음에 딱 걸린 장로님이 계세요.

 

그 프로젝트 계획을 성사시켜야 되는데,

근데 물정 모르는 목사님께서 설교단에서 뭐라고 얘기하시냐 하면,

 

사업 때문에 지금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세요,

사업에 대해서,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사업은 여러분이 이삼십년 해 오신 거지만, 하나님은 태초에 계신 분입니다.

존재의 순서를 따라서 생각을 하시고 마음을 드리세요, 하나님께 먼저 마음을 드려야 됩니다.’

 

물정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사업이 사활이 걸린 건데, 어떻게 하면 이 사업계획,

이 계약을 따낼 수 있는 가에 도움이 되는 말씀을 주셔야지,

그거에 대해서 죽으라 그러면 어떡하느냐는 말입니다.

 

근데,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으라는, 이 말씀이 역사합니다.

 

완전히 머리가 그 계약을 따내야 된다는 사로잡혀 있던 이 장로님의 생각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역사하면서,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십자가 사건이 프로젝트 계약 사건보다 더 우선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계약 건 때문에 애를 쓴 6개월 동안 처음으로 느끼는 평강을 느낍니다,

잠 잘~잤습니다.

 

사업 다~ 잊어버리고 평강 가운데 있다가,

월요일 날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갑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었더니,

그동안 몰랐던 하나님이 느껴지는데, 사업 망해도 하나님만 있으면 살겠어요.

 

그리고 이 사업, 망하면 망하는 대로 하나님 뜻일 거라고 믿게 됩니다.

웃으면서 나가요.

 

온전히 스트레스가 해방된 상태에서 나갑니다.

직원들은, ! 무슨 좋은 일이 있나보다 그러는데,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었을 뿐이고, 하나님 만났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진짜 계약 현장에 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물정 모르는 목사님이, 말씀을 받아서

자기 마음을 어떤 관심사에도 뺏기지 않고 지켜내면서,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모든 말씀에서 하나님이 만나져야 된다 그러면,

십자가가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품고 있는 것들이에요.

 

근데, 예배당 건축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십자가에서 죽자는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예배당 건축에 대해서 살아 있어야 예배당 건축이 될 줄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거지요.

 

목사님이 하고, 장로님들이 하고, 당회가 하는 걸로 돼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관심이든지 살아 있으면, 십자가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목사님들 설교 속에서.

 

그러니까 십자가만 전하고 있으면, 물정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물정은 하나님이 아시면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 거지,

왜 내가 알아야 됩니까?

 

노아가, 이제 홍수가 날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에

사람들한테 가서 말해요 홍수가 날 거다

 

사람들이 물정 모르는 망령 난 노인네라고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정 다 아시지만 그러나 물정에 맞추지 않습니다.

 

대제사장들의 물정 알고, 지금 이 예루살렘의 이 종교의 현실 물정,

재정적인 물정, 경제적인 상황, 식민지하에 있는 물정 다~ 아십니다.

 

그런데 이 물정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이 전하시는 말씀만 전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입에서, 단 한 마디도 나라 독립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물정을 모르시는 분입니까?

 

물정에 밝은 목사님, 의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물정에 밝은 목사님은, 그렇게 물정에 밝으면 나가서 돈 벌라 그러세요.

 

우리가 그분의 생계비를 대는 이유는,

물정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살아계신 하나님,

~ 세상을 다 알고 온~ 세상 물정을 다 지배하고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생계비를 대드리는 거지,

세상 물정 많이 아는 그런 목사님 필요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이라든지 교회 숫자 같은 거,

이런 것도 목사님의 마음을 뺏는 거예요.

 

오직 목사님의 관심은 십자가에서 목회 현장에 대해 죽어야 됩니다.

 

목회 현장에 대해 죽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고,

말씀을 전할 때 전해야 되는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고,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서 교회는 목사님들에게

마음의 존경을 드리고 생계비를 책임져 드리면서 지켜드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지켜드리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의 말씀들이 쳐 나가게 돼요, 밖으로.

 

그런 마음으로라야 성경을 읽어도, 성경이 말씀으로 이해될 수가 있게 됩니다.

 

선점된 관심이 십자가 복음 말씀을 통하여 떨쳐져 나가기 전에는,

그 관심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죽는 일이 말씀을 통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성경말씀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이름 하는 자기계발서에 불과하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설교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존경과 재정적 배려를 해 드려야만 되는 것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들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목사님들의 마음을 지켜 주시사,

영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에 가장 선호하시는 장소가 되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전해지는 모든 말씀이 물정에 맞춰진 말씀이 아니고

관심에 의해 지배되는 해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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