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삶과 바벨론의 삶 계14:1~12 14.10.07.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ryMdE9DrQkI
‘바벨론’이라는 말은 계14:8절에 나오는 말로 ‘‘시온 산’’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 등장합니다.
그 ‘큰 성 바벨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시온 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궁극적인 운명, 이런 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14:1절에 보면,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4천 명이 서있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우리가 바로 앞에서 무엇을 함께 생각했었지요?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의, 큰 권세와 이적을 행하는 능력에 의해 미혹을 당해서
이마와 오른손에 666이라는 표를 받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것과 대조가 되는 거죠.
이마에 666표를 받는 대신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자들이 바로 14만4천 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온 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있습니다.
이 ‘시온 산’을, 이 본문을 잘못 이해해가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새 신부처럼 단장하고 내려올
‘새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아니에요.
※계시록의 <상징적 해석>으로는 그렇죠. <문자적 해석>과 다르게 봄.
앞에서 계속 ‘짐승’들이
현재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진행하고 있는 교회의 교인들을 공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공격하고 있는 동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바다짐승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 ‘짐승의 표’를 받는 자들이 있어요,
근데 교회 안에 있으면서, 올바르게 신앙을 갖고 있는 그들이 ‘참 시온’인 겁니다.
그러면 ‘시온 산’이라는 걸 어떠한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을까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이 구절을 잘 보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겠다고 생각하셨을 때
하나님 말고 다른 피조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지요.
창조를 생각 안 하실 때는, 하나님만이 계셨죠, 무(無)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가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겠다니까, 창조되어진 것들이 있는 영역이 생겨난 거지요.
그게 바로 ‘땅’이라고 얘기한 겁니다.
근데 그 땅이 혼돈과 공허 즉, 땅의 속성이 혼돈과 공허라는 얘깁니다,
피조물이 생길 영역이.
그리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땅의 속성이 혼돈과 공허인데, 혼돈과 공허를 깊음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땅이 깊음인 거예요,
땅인 혼돈과 공허가 깊음으로 있고, 그 깊음 위에 암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암흑이 있는 그곳으로, 하나님의 신이 오셔서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빛이 있어라!’ 암흑을 몰아내시는 거죠.
그렇게 혼돈과 공허가 깊음인데,
딱딱한 평면인 땅 위에 있는 혼돈과 공허가 아니고
부피를 갖고 있는 깊음이라는 얘깁니다.
그 깊음을 또 바다처럼 인식해가지고
그 깊음 위에 운행하고 계시는 바람이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고 얘기한 거예요.
여러분, 참 신기하지 않아요?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맨 마지막 책 아닙니까?
창세기가 시작이고 요한계시록이 끝인데,
이 처음과 끝의 책이 원주 상에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만나는) 책이 돼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창세기의 처음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머리와 꼬리가 관통하면서, 수미일관하고 있는 것이 성경책이라는 얘깁니다.
그런 걸 보면 너무 신기해요.
▲자, 여러분 잘 이해하셔야 돼요,
성경에서 땅이라고 할 때는 이 육체가 머무는 땅을 말하는 겁니다, 딱딱한 땅이에요,
그 위를 걸어도 육체가 빠지지 않아요.
그런데 이 육체가 머물고 있는 이 땅이라는 인간의 세상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바다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땅 위의 피조물들 중에 어느 것을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혼돈과 공허의 깊음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이게 바로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의 해도 해당되는 것이었고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라는 것도 그렇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것도 다, 이걸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온’이란 뭐냐 하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지금 마음에 대해서 바다인 이 땅,
그 속성이 혼돈과 공허인 이 땅 속에 가라앉아서 바다 속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십자가 역사를 받아들여서
날마다 그 수면 위에 만들어져 있던 그 어느 것을 좋아해서 붙잡지 않고,
붙잡고 싶을 때마다 가라앉는 것을 느낄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서 약속된 성령의 바람을 받아
가라앉지 않고 수면을 발로 딛고 서있는 사람들, 이들의 모임이 시온인 거예요.
멀리 광활한 대평원이 있습니다,
근데 그 평원 저 끝에 만년설이 덮인 산 하나가 솟아올라 있어요.
그런 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이라는 수면이 쫙 펼쳐져 있는데, 전부 그 수면 아래 가라앉아서 살고 있어요.
가라앉아서 살고 있는 사람이,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에서 내 옆에 있는 이웃이에요.
같은 직장동료고 내 아파트 맞은편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죠.
같이 몸을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마음은 다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다 위에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전부 바다 속에서 사느라고 정신들이 없으니까.
그런데 오직 하나의 섬처럼 바다 위에 떠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5대양 6대주가 아니라, 하나의 바다가 있고, 하나의 섬처럼 떠올라 있는 육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온이라는 거예요.
수면을 밟고 가라앉지 않고 있는 자들의 모임, 그게 시온이고 그게 참 교회라는 거죠.
▲그런데 그들의 육체는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환란과 고난과 오늘 본문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에서 인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육체가 그들과 부딪치고 사니까요.
마음은 세상바다 위에서 수면을 밟고 있지만,
마음이 가라앉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육체와
마음이 떠있는 나의 육체는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괴로움이 생기고 핍박이 생기고 탄압이 생기고,
여기서 대세에 거스르는 역행함에서 오는 곤란과 어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시온 산’ 위에 어린양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핍박과 탄압과 괴로움만이, 그들의 삶의 내용입니까?
그걸 인내해야만 되는 것이겠습니까?
인내 속에는, 괴로움에 대한 인내만 있는 게 아니에요.
괴로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환란과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내용물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 내용물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거죠.
자, 수면 위에 마음이 올라가면, 이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상태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전제는 함께 죽었을 때, 어린양을 얘기하는 거죠.
지금 계시록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중심이 어린양이에요.
어린양이라고 예수님을 표현하는 이유는, 그분이 십자가 번제단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과 함께하는 14만4천 명, 선택받은 사람들,
마음이 수면 위에 떠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어린양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래서 이것이 예수님 재림 이후에 있는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도,
우리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게 될 때
주님이 부활하시고 우리도 함께 연합해서 부활하고는,
에베소서에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하늘에서 많은 물소리와 우레 소리가 들리더라 이거예요. 14:2
근데 그 많은 물소리와 우레 소리가
이번에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니라, 거문고 소리같이 들렸다는 거예요. 14:2b
거문고 소리라는 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기쁨을 말하는 거예요,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기쁨.
우리가 기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이 뭡니까? 노래하는 거예요.
근데 그 노래하는 것이 왜 가능합니까?
먼저 이 세상에서는 육체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란을 겪고 있지만
마음이 수면 위로 올라가게 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 수면 위로 올라가 있는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들이 몇 개 있어요.
시편 3편 5~6절에 보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마음을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마음이 감싸져 있기 때문에,
육체가 천만인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와 똑같은 내용을, 가장 멋지게 표현한 것이 시편 23편 다윗의 노래입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셔서 나를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한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언뜻 생각하기에, 아주 평화로운 목가적인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그거 아니에요.
다윗처럼 인생에 정적이 많았던 사람이 없고, 다윗처럼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 없고,
심지어 다윗은 자기 아들로부터도 왕권찬탈을 위한 반역을 경험한 자고,
그래서 아들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원수가 나를 둘러치고 있는데도 그 마음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푸른 초장에 있는 겁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땅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마음을 하늘에 두었기 때문에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마음의 평화를 깰 수가 없으니까 노래가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천군천사와 24장로와 네 생물이 하나님을 직접 보면서
그 하나님의 좋으심, 거룩하심을 찬양합니다.
거룩하심이 뭐라고요?
더 이상 좋을 수 없어요, 그래서 네 생물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찬양한다고 그랬잖아요? 계4:8
이 ‘거룩하다’를 반복하는 것은
네 생물은 영원토록 거룩하다는 말만 한다는 거예요. 무슨 얘깁니까?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너무 좋아서 거룩하다고 노래를 불렀어요,
근데 거룩하다는 노래를 부르고 또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니까 또 좋아요,
또 새롭게 좋습니다, 그래서 또 거룩하다고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가 끝나고 힘드니까 그만 두려고 했는데, 보니까 또 좋아.
그래서 또 거룩하다고 불러요… 또 좋아서요.
새 노래, 이들의 노래가 마음에 들리는 겁니다.
우리가 노래를 듣다보면 그 노래의 리듬에 따라 몸이 덩실덩실 움직이게 되듯이,
시온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이 수면 위에 떠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거예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새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재밌는 말이 나와요,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14만4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3
참 이상하지요? 새 노래를 배우는데 왜 땅에서 속함 받은 자 말고는, 배울 수가 없다는 걸까요?
이게 특별한 노래라서 그래요,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래요.
아무나 배울 수 없다는 것은,
가장 이 노래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 하박국서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유명한 3장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자, 몸이 처한 상황은 이제 바벨론이 쳐들어오면서 이렇게 망하게 될 겁니다.
이 몸은 그런 상황에 있지만 갑자기 돌변하면서 비약해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게 새 노래에요.
근데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와 창자가 흔들리고
내 처소에서 무서워 꼼짝하지 못할 육체의 상황이 주어지는데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들, 이게 아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하박국 마지막에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해놓고,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이걸 노래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몸이 처한 상황은, 뼈를 썩게 하는 것이 들어와 공포에 질려 새파래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내 마음에서는 노래를 부릅니다. 아, 이거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시편 4편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도 기가 막혀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자,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한 것, 이것이 기쁘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이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바벨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바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피조물들을 좋아하면서 기뻐하려고 하는 자들.
이들은 ‘시온 산’에서 14만4천 명이 부르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거예요.
14만4천 명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육체의 현실이 곡식과 포도주로 풍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나무와 포도원의 소출이 없어도,
육체의 현실은 뼈가 썩을 정도로 공포가 깊이 들어와 있어도,
내 마음은 이 땅에서부터 속량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땅으로부터.
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지요, 마음이 온전히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아직도 바다 속에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 중 어느 것 하나 붙잡고 끙끙대면서
그것이 문제라고 고민하고 있으면, 어떻게 외양간에 소출이 없다고 하면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하지 않은데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노래를,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자들이, 교회 밖에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바다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지배를 세상사람 모두가 다 받아요.
그런데 굳이 짐승의 표가 악센트를 두어서 강조돼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이상한 것은 어린양의 복음이 전파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있는데도
하나님과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감을 위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4만4천 명이 누구라고 했지요?
어린양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이마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선포되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마음이 땅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이들이 바로 바벨론에 속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은, 다 바다 속에 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등을 돌려서 이루어놓은 문명이고, 이게 큰 성 바벨론입니다.
근데 이 바벨론 중에서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바벨론 식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누굽니까?
아니, 왜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들리는 곳에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고 짐승의 표인 666이 새겨져 있을까?
아니, 말이 거꾸로 되었어요.
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들려지고 있는데도
그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그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을까?
마음에 666 표가 찍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래서 재밌는 표현이 나와요, 우리가 어제 그랬잖아요,
666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뭐냐? 그걸 안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했습니다,
안식이라는 건 뭐죠?
내 마음이 모든 대상에 대해서 다 죽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대상으로 삼고 관계하는 상태가 안식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그 안식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평소에 모든 시간 속에서도
안식과 샬롬과 평강이 내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니까.
그런데 이 안식을 모르는 거예요.
6일 동안 살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될 그 안식일을 제거해버려서
6이 붙습니다.
그러니까 666이라는 건 엄밀하게 말하면 6666666…
죽을 때까지 6666666…이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오늘 11절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짐승의 표를 얻은 사람들의 삶의 특성이 뭐냐 하면, 쉼이 없어요.
그 쉼도 사실 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지,
내용적으로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에서 돈 벌 때 치열하게 달라붙어서 활동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몰입하는 겁니다. 그게 쉬는 거예요.
그게 안식이고, 그게 평강이고, 그게 기쁨과 만족이고.
그런데 밤낮 쉼으로 얻지 못하리라, 다시 말하면
밤낮 하나님을 만나서 누릴 수 있는 참 평강 없이 살더라.
그러니까 666…이라는 것은 노동, 노동, 노동… 근심, 근심, 근심…
이 세상에 붙잡힘, 붙잡힘, 붙잡힘…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짐승의 표의 특징이라는 거죠.
이게 바로 바벨론의 삶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 천사의 얘기가 나오는데,
복음을 가진 천사가 처음에 ‘하늘과 바다와 모든 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배하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왜 피조물(세상 것들)을 마음에 담아서, 기뻐하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그게 바로 음행이에요, 음행.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가 나오죠,
음행을 하게 함으로써 진노의 포도주가 합당한 자로 만든다, 바벨론이 사람들을.
포도주는 기쁨을 뜻합니다. 그런데 진노의 포도주라고 그래요.
무슨 얘깁니까?
하나님을 만나서 누려야 될 기쁨의 양이 있잖아요, 무한한 기쁨입니다.
망가지지 않는 기쁨이고 평강입니다.
그런데 그것 대신에 이 세상에서 기쁨을 추구하려고 한 것,
다른 것을 마음에 집어넣어서 기뻐하려고 한 것, 이게 음행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났더라면
그 사람이 누릴 수 있었던 기쁨의 양만큼이 다 진노로 바뀌어버립니다.
이게 바로 ‘진노의 포도주’에요.
그래서 그에게 쏟아질 것인데, 그렇게 쏟아질 때
유황과 불이 끝없이 타오르는 곳에서 쉼 없이 밤낮으로 고난을 당하게 될 겁니다.
▲죽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이 있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고,
살아있을 때도 이 사람들의 특성은 밤낮으로 쉼이 없는 건데,
다른 것이 있다면, 살아있을 때는 자기가 원해서 밤낮 쉼이 없이,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만남이 없이 세상에 몰두했던 것이고,
죽은 다음에 심판 뒤에는 자기가 원치 않는데도, 밤낮 쉬지 못하고 불에서 끓음을 당하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도 불 속에 있는 거예요, 근심 걱정 홧병, 이게 다 새까맣게 타는 거예요.
한방에서 스트레스와 근심과 걱정이 가득 쌓일 때 불이 가슴으로 올라온다고 말합니다.
이게 한방에서 가장 중요한 맥을 짚을 때의 기준이에요.
불이 내려와서 배를 따뜻하게 해야 되는데, 이게 가슴에 올라와 있는 거예요.
이걸 홧병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적인 병은 다 홧병인 거죠, 불이 타는 거예요.
왜죠? 6666666… 쉼이 없이, 쉼이 없이, 쉼이 없이… 계속 살아가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모르니까요.
이게 바로 바벨론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666의 삶을 살면서 문명을 이루어가는 것.
나름대로 큰 성을 이루도록 합니다, 바다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래서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봐라, 바벨론의 문명을 봐라! 하나님 등지고 이루어놓은 이 문명의 위대함을 봐라!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지 않느냐?
세상 사람들이 다 쫓아가는데 교회 안에서도 그걸 쫓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들리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들리는데도, 그럴 수가 있을까요?
이유를 알고 봤더니, “마음에” 짐승의 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삶을 살기 위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수면 위로 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린양의 십자가가 내 마음의 부력이 되어서 바다 속으로부터 수면 위로 올라오고,
약속된 성령의 바람이 마음속에 들어옴으로, 이 바다인 땅의 수면을 발로 딛고 살면서,
도저히 바다 속에 있는 자들이 부를 수 없는, 새 노래를 부르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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