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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속에 있는 구원

LNCK 2015. 7. 31. 12:43

기다림 속에 있는 구원        40:1~5, 벧후3:14~15          14.12.07설교 스크랩, 출처

 

 

기독교는, 예수님의 처음 오심다시 오심사이에 있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오심으로, 우리 구원이 시작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우리 구원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이미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 속에 있는 종교라 할 수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대림절은

우리 구원의 과정을 되돌아보게 하고, 경험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절기라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

이미아직 아니사이에

already not yet사이에 존재하는 종말론적인 긴장

이것은 우리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국교회는 유난히 구원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고, 그래서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인데요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다보니,

한국교회는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을 잃어버린채, 나태함에 빠져버린 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구원의 확신, 즉 이미 이루어진 편재적인 구원을 강조하는 데는,

나름대로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고,

또 하나님은 한 번 택하신 그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반대되는 내용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이란, 본래적으로 미래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많은 구절은 아니지만, 한 번 믿은 사람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도,

신약성경에 분명히 적지 않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구절들을 확인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반드시 있어야 할

종말론적인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이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이란, 기본적으로 미래의 사실입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살전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고,

그래서 이미 손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고전1:8절에서, 우리가 구원 받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전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그리고 빌2:12절에서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하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미래에 완성될 것이고,

지금 우리는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2:5절과 8, 고후5:17절이 그런 구절들입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는데요,

이 종말론적인 긴장, 이미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긴장과 함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함께 해결해야할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크리스천이 되면,

그 후로 잘 믿든/ 잘 못 믿든, 어떻게 살든지에 관계없이 주님 오실 때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냐.. 아니면,

한 번 믿었다가도 신앙을 포기하면 구원으로부터 탈락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질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의 확신, 즉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우리가 이미 (미래)천국에 와 있다는 뜻은 아니죠.

 

우리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어서, 더 이상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이런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

즉 우리가 미래에 구원 받을 것이 이미 결정되었고, 그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보장되었다.. 하는 확신이죠. 그것이 소위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구원이 미래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미 구원 받은 것과 같다는 그런 뜻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냐, 아직 받지 않은 것이냐 하는 질문의 핵심은,

미래에 받을 구원이 이미 결정되고, 보장된 것이냐?

아니면, 도중에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있느냐?

하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성경은, 양쪽을 다 말씀합니다.

한 편으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말씀합니다.

 

5: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새번역)

 

위 구절 마지막에 구원을 얻으리라.. 미래형입니다.

Much more then, being now justified by his blood, we shall be saved from wrath through him.

 

구원은 미래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 구원이, 더욱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0절도 다같이 읽어봅시다.

5: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새번역)

 

여기서도 역시 구원은 미래적 사실입니다.

구원을 얻으리라’ we shall be saved

그 미래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미래에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의 십자가로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즉 칭의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있을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 이것이 롬5:9~10절의 말씀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살전5:9절에도 나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다..’

 

이것은 미래 구원을 받을 거라는 거죠

그런데 미래에 받을 구원을 미리 정하여 놓았고,

우리 구원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감격적인 필치로 기술하고 있는, 8:38~39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8: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는 구절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를 영접한 크리스천의 삶을 말씀하는 롬8장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8:13,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새번역)

 

우리 크리스천들도,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다.. 즉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이 갈라디아서에도 나옵니다.

5장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인데요,

그 가운데 16절 이하에서 사도바울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두 가지 삶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19절 이하는,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데요,

 

갈5:19. 육체의 행실은 환히 드러난 것들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우상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21.질투와 술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21절 중반부에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21b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하는 경고가 아니랍니다. 전에도 경고했답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에 하는 경고입니다.

 

지금 읽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가르침,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가장 집약적으로 담겨있는

대표적인 두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들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묘사하면서, 사도바울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바울 서신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았습니다만,

바울서신 밖으로 눈을 돌려 보면,

이러한 말씀들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8:21절 이하에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는데, 그 가운데 1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제발 용서해 달라고 하니까, 왕이 1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1달란트는 16년반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1만 달란트는 16500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 액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왕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길에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습니다.

100일 동안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이 종은 한 번 용서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자신의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을 때

왕이 그에 대한 용서를 취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 있다고, 18장의 비유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숨 쉴만한 일이죠.

 

그 정도가 아닙니다. 더 이상의 말씀도 있습니다.

6:4절 이하에는, 믿는 사람이 타락하면, 다시 회개할 수없다는, 심각한 경고가 나옵니다.

 

벧후2:20절 이하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세상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처음보다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다.. 라는 경고도 나옵니다.

 

벧후2:20 사람들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거기에 말려들어서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마지막에 더 나빠질 것입니다. (새번역)

 

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 하는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구원의 탈락 가능성

함께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한국교인들의 다수는, 구원의 확신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가운데,

한 번 믿은 자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는 믿음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이런 말씀들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있는데, 애써 외면하고 안 읽어 온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성경의 경고들에 대해서,

그것은 신자들의 나태함을 꾸짖기 위한 엄포성 경고일 뿐이지,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너무 말을 안 들을 때, 부모가 아이들에게

너 이렇게 계속 말을 안 들으면, 집에서 쫓아내 버린다, 밥을 안 준다,

호적에서 파 버린다하면서 엄포성 경고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그래도 부모가 안 쫓아낼 것을 다 알죠.

계속 경고의 수위만 높아질 뿐이지, 사실 효과는 없습니다.

 

부모가 실제로, 아이를 집에서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그저 그것은 부모의 격한 감정을 강하게 전달하는, 하나의 수사학적인 장치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엄포성 경고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우리의 나태함을 꾸짖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엄포를 놓는 것일뿐,

하나님이 실제로 그의 자녀를 버리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해 생각하십니까?

이런 주장이 맞을까요/틀릴까요?

 

저는 원칙적으로, 그 해석이 맞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한다고 그냥 집에서 쫓아내시지 않고,

우리가 깨닫고 돌아오기를 무던히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쫓아내는 분이면, 우리는 벌써 집에서 다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렇게 엄포를 놓아도 자녀가 계속해서 말을 안 들으면,

실제로 쫓아내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극단적인 경우에는, 부모와 자녀간에 인연을 끊고, 호적에서 파 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참 두려운 일입니다.

매일 죄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날 만큼, 많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없으실 만큼,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는 의구심과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아니야, 그건 엄포성 경고일 뿐이야

하고 덮어두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그 말씀들을 올바로 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믿음과 행위의 이분법,

또는 은혜와 행위의 이분법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행위와 구원은,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행위와 구원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님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과나무가 당연히 사과를 맺고, 포도나무에 당연히 포도가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나무에는, 그리스도인다운 행위의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포도나무가, 다 좋은 포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농부가 거름을 주고, 가지를 쳐 주고, 속 순을 잡아주어서

또 땅에 닿아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가지는 들어 올려 주어서

15장의 비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들어 올려 주어서

결국은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더 이상 농부의 보살핌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의 종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우리가 구원의 확실성을 말씀하는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하다 하고 말씀하는

우리가 구원 받기로 정해져 있다.. 는 구절들을 찾아보았는데요,

 

우리가 찾아본 구절들을 포함해서, 구원이 확실하다고 말씀하는 다른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 모든 구절들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음을 봅니다.

 

그 모든 구절들이 확실성의 근거를 예수님께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기계적으로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결정이 파기되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흔들리고, 쓰러지고,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어서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마치 내가 하나님 밖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그 예수로 인해,

지금 나의 삶의 모습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이미 버림받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이미 지옥에 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예수로 인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실 때, 우리가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는 삶을 살고 있을 때,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 육신을 따라 살기를 선택한다면,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면,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앞에서 확인한 롬8;13절이 바로 그 사실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하고 있다면,

비록 지금 당장은 좋은 열매를 맺고 있지 못할지라도,

 

또 지금은 상태가 좋지 못하고 빈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살피시고,

먹이시고, 강건하게 하셔서, 결국은 포도나무 구실을 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살기보다, 육신을 따라 살기를 선택하여

죄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 버릴 때,

그래서 결국 포도나무로부터 가지가 떨어져 나가 버릴 때,

주님오실 그날, 우리는 구원이 아닌, 심판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는, 종말론적인 긴장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크리스천다운 존재를 유지하며, 크리스천답게 살도록 촉구하는, 그러한 매개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루어질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며,

그 구원을 향하여 함께 걷는 우리의 걸음이 견고하고 힘차길 바랍니다.

그 기다림과 기대속에 지내는 이 대림절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모든 교우들에게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좋은 열매를 맺어 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연약한 가지들입니다.

그러나 주되신 하나님의 포도나무에 늘 연결되어, 주님의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주님의 보살핌 가운데 날로 성장하고 변화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되기 원합니다.

날마다 한 걸음씩 주님께 더 나아가게 하시고, 좌절하여 지체할 때,

뒷걸음칠 때,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맬 때, 우리를 붙드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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