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 출19:1-25 15.08.22.출처
◑언약
▲출애굽기에는 전무후무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사건이야말로
출애굽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이 만남이 대단한 사건인 이유는 하나님이 한 인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전체 집단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한 날 한 장소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이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들이 이때 받았던 율법이 얼마나 무거웠던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장면은 ‘시내산 언약’ 또는 ‘계약 체결’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종주권 계약’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강대국인 종주국과 그를 섬기는 봉신국 간에 맺어지는 조약입니다.
이때 종주국은 봉신국에게 자기가 베푼 은혜를 나열하며
몇 가지 계약 사항들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 조약은 종주국이 봉신국을 지켜줄 것이라는 형태로 마무리됩니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종주국 되신 하나님과
봉신국인 이스라엘이 맺는 언약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5절과 6절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언약’이라는 단어는 바로 ‘계약, 베리트’입니다.
신약과 구약에서 이 ‘약’이라는 단어가 바로 베리트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겠다는 내용이 계약의 핵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먼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개인적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은 인간을 안심시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맹세와 같습니다.
이스라엘과 집단적인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맹세입니다.
이스라엘 편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겠다는 확약입니다.
사실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매우 부자유한 일입니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이 한 나라 이스라엘에 매이고
이스라엘의 운명에 자신을 연루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저 멀리 뒷짐지고 계신 초월자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 부단히 간섭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자유함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필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언약을 맺고 나면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자기 운명이 됩니다.
마치 자녀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에게 매입니다.
모든 기쁨이 자녀에게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때립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시고 기꺼이 편을 듭니다.
사랑하다 보면 화도 많이 납니다. 때로는 울분도 생기고 홀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분노와 눈물은 사실 하나님의 분노와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낭비와 구속을 기꺼이 감당하시는 분입니다.
▲결국 언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이 사랑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사랑하면 희생하니까요.
우리의 희망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어둠과 무질서가 지배하고 있지만, 우리를 지키신다는 언약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혼과도 같습니다.
남남이었던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그 어떤 것보다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언약은 또한 자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엮인다는 뜻입니다.
◑율법
▲언약 관계만 맺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막 살아도 되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언약을 맺는 영광스러운 순간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결해야 하고
여인을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옷을 깨끗이 빨아야 했습니다.
일정한 경계를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넘거나 하나님을 보려하다가는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의 모습은 매우 두렵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18-19)
마치 화산 폭발이 있는 것처럼 시뻘건 불기둥이 있고, 빽빽한 구름이 있고
온 산이 진동하며 큰 소리가 울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지
십계명 말씀을 듣고 나서는 20: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런 두려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에,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고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너희가 두려우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율법은 회초리요 막대기와 같습니다.
▲그러면 율법에는 두려움만 있는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앞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 있던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마치 용맹한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업어서 나르듯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소굴에서 빼내어 안전하게 옮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먼저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겠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반응입니다.
▲80년대에 들어와서 바울 신학에서 ‘새관점’이라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샌더스라는 학자의 학설인데 그것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합니다.
신약시대에 율법은 좋지 않은 면으로만 부각 되었습니다.
율법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 이스라엘의 율법 준수 실패.
율법은 다 지켜야 구원을 받음. 율법과 은혜의 상반됨 등입니다.
그런데 실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이처럼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은혜 안에 들어가 있는 언약 백성입니다.
율법은 그 은혜 아래 머물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들이 율법을 범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게 되는가? 아닙니다.
성전과 제사라는 제도가 있고 회개라는 수단이 있어서
언제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은 은혜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모세 오경을 토라라고 합니다. 토라는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모세 오경에는 딱딱한 율법만 있나요? 법조문만 있나요?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야기,
이스라엘에게 베풀었던 은혜들, 그 사이사이에 법조문적인 율법이 들어갑니다.
은혜와 율법이 항상 같이 나옵니다.
고대 중동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법조문이 없었습니다.
이슬람의 코란을 보아도 지켜야 한다는 엄격한 조항들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바로 율법에 대한 설명이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이야기가 전문처럼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은 자가 지켜야 할 윤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 1편과 같은 율법 찬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9편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19:10
딱딱한 것이 아닙니다. 즐겁습니다.
▲율법은 사랑의 응답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를 크고 영화롭게 만듭니다.
신명기 4장 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율법이 있다는 것은, 질서가 있고 윤리가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이나 한 나라를 큰 사람, 멋있는 민족으로 만듭니다.
로마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은 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과 전통이라는 질서, 곧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경계가 무엇입니까? 법과 시스템입니다.
선진국은 법이 다스리지만 후진국은 편법과 독재와 부패가 횡행합니다.
그래서는 큰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이 큰 나라를 만듭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속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제사장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을 선민사상이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한 특별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대단합니다.
이 선민사상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프라이드가 되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교육심리학자 젠센이 유태인들의 성공 비결을 연구한 바 있습니다.
민족간 지능테스트를 해보면, 유태인이 결코 다른 민족에 비해서 지능이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젠센은 유태인의 성공 비결을 강한 자긍심에서 찾았습니다.
이 강한 자긍심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
곧 우리는 특별하다는 의식이 사람을 크고 비범하게 만듭니다.
▲미국이 큰 나라가 된 이유 중에도 이 선민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유럽을 떠나 미국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그냥 핍박을 피해서 간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스스로를 광야로 심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명 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언덕 위의 도시처럼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모범 국가를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는 사명감이 우리로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목표 의식이 분명해집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힘이 생깁니다.
오늘날 미국이 부강하게 된 이유입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사명의식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보이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특별한 의식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활력을 주고 능력을 주고 집중하게 만듭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이 비전을 잃으면 방자해집니다.
우리 민족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려워진 이유는, 비전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남북관계가 어렵습니다. 어려워진 이유 중 하나는 통일의 비전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를 이용해서 자기만 유리하게 만들겠다는 세력과,
북한을 매우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나 살기도 바쁘다는 태도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태도만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통일과 민족의 번영이라는 비전이 사라진 곳에는, 이기주의만 만연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를 위해서 살겠다는데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통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명감이 생기지 않은 이상
지금의 무기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명감, 곧 선민의식이 우리를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들고 우리를 위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민족만 차별적으로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편협한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앞 뒤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5절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주님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세계를 포기한 것인가? 아닙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은 거룩하다는 뜻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봉사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61:6)
제사장은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모범 국가로 세워서 다른 민족을 계도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열두 지파가 있고 그 가운데 제사장인 레위 지파가 흩어져 살 듯이
전 세계 가운데 이스라엘을,
지금은 교회를 세워 제사장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하나님은 그 포로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방의 빛이라 불렀습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하여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선민집단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교회를 세운 이유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곧 선덕자로서라 합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봉사자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 선민사상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전락하는 것에 맞서 싸웠습니다.
사도 바울의 투쟁은, 유대인들만의 공동체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요 세상에서 빛이 되어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지를 보여야 할 언덕 위의 도시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나라의 참된 의미입니다.
▲오래전 우리 민족을 향한 기도 제목은
‘이 민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이 기도 제목은 유효합니다.
단지 이 민족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달라는 선교적 구호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민족이 세계를 위한 제사장답게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민족이나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런 모범국가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이루어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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